무릇 고향이란, 특히 글쟁이들에게 고향이란, 아침 겨우 때우고 나면 막바로 점심 걱정을 하는 징글징글한 굶주림과 자고 나면 꿈처럼 늘어나는 빚, 그리고 점심시간 물배를 채운 뒤 퀭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유난스레 새파란 하늘 같은 것이었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과 나무 이름이었으며, 인공 시절 뒤란 대숲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다는 삼촌의 빛바랜 흑백사진 속 잘생긴 얼굴과, 그런 삼촌을 가슴에 묻고 평생 수절한 숙모의 너무도 어여쁜 볼연지 같은 것이었으며, 때로는 장터 마당에 코주부 안경을 끼고 나타나 쿵짝쿵짝 북을 치던 약장수라든지 이마로 못을 박고 안광으로 벽돌을 깨고 입으로 불을 토해내던 천하괴력의 차력사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지금은 기억마저 희미해져 더욱 아련하기만 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것, 그게 바로 고향이었다.-13쪽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압고 더 '冊'답다. <소설가 이태준>-22쪽
경제력보다 더 중요한 게 혁명적 정열의 보전이었다.-37쪽
더도 덜도 없이 이 나이는 꼭 그렇게 오는 것만 같다. 이제 눈부시게 따가운 햇살을 피해 슬슬 '그늘의 미학'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 문득 허무해지는데, 엎지른 죽그릇 같은 마음 한구석에서 쑥스럽게도 꿈이 새록 솟는다. 면 단위 마을의 공공도서관 관장, 그보다 더 작은 마을의 별정우체국 국장, 하루에 두 차례망 기차가 서는 간이역의 역장, 김치박물관이나 우표박물관 같은 특수 목적 박물관의 학예관, 시키는 사람은 없어도 할 일은 많은 향토사학자, 발품으로 먹고 사는 여행전문기고가...... 세상에서 가장 한가하면서도 가장 보람 있을 것만 같은 직업들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45쪽
지난해 장미 이후론 한 번도 물맛을 보지 못한 커튼-46쪽
속도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버리면 안 보이던 것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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