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부득탐승不得貪勝 - 아직 끝나지 않은 승부
이창호 지음 / 라이프맵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 최초의 대전형 전략게임은?

힌트 하나, 중국의 기문(奇聞)·전설집인 <박물지>에는 이것을 요(堯)나라 임금이 만들어 아들 단주에게 가르쳤다고 전해짐. 힌트 둘, 가로 19줄, 세로 19줄이 만든 361개의 교차점. 힌트 셋, 흑과 백. 힌트 넷,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정식종목. 힌트 다섯, 조치훈,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이쯤하면 누구라도 '바둑' 하고 외칠거다. <박물지>의 기록을 인정한다면 바둑의 기원은 수천년 전 중국의 상고시대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바둑은 중국에서 시작됐다고 보지만 근대바둑은 일본에서 정립되었다. 우리나라에 근대바둑이 뿌리내리게 된 것은 한국인 최초, 일본기원 프로바둑 기사였던 조남철 9단의 공이 크다. 1944년 그가 설립한 한성기원은 한국 현대 바둑의 효시가 됐다. 이후 한국에는 많은 프로기사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일본을 뛰어넘지는 못했다.(조치훈 9단이 있었잖아?라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는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기원 소속의 프로기사로 활동했다.) 진정 바둑 강국 코리아의 전성시대는 조훈현 9단과 그의 제자 돌부처 이창호 9단이 열었다.

 

<이창호의 부득탐승>(이하 <부득탐승>)은  한국 바둑을 유래없는 전성기로 이끈 이창호 9단의 30년 기사생애를 정리한 책이다. 그는 만6세 바둑에 입문, 11세 사상 두번째 최연소 프로 입단, 14세 국내 최연소 타이틀(KBS바둑왕전) 획득, 17세 국내 최연소 세계타이틀 획득(동양증권배), 이후 통산 타이틀 140회를 이어간 명실상부 한국 바둑의 절대 지존이다. 이창호의 현재 나이는 37세(1975년생)다.

 

하지만 <부득탐승>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이창호의 타이틀 획득 기록이 아니었다. 타이틀 획득은 그저 그가 바둑을 통해 얻은 부속물처럼 보였다. 오히려 나는 이창호와 조훈현이 맺은 사제지간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고 부러웠다. 또 대국이 끝났다고 바둑이 끝난 것이 아니라 복기(復棋)가 끝나야 바둑이 끝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조훈현의 금연,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 같은 일화를 접하면서 이들은 바둑을 하나의 도(道)로 여기는구나하고 생각했다. 하나씩 살펴보자.

 

이창호 9단은 아홉살 되던 해 스승 조훈현을 만났다. 이때 조훈현의 나이는 서른 둘. '만났다' 보다는 '제자가 됐다'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후 7년 동안 이창호 9단은 조훈현 9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지식을 공급하는 교사는 있어도 지혜와 인생을 가르치는 스승이 부족한 요즘, 난 그들의 관계가 참 부러웠다. 그것은 마치 인류의 성인들이 그들의 제자를 가르칠 때의 장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함께 자고 함께 먹고 묻고 답하며 지혜를 체득했던 교육 방식. 난 내 아이의 좋은 학원을 찾지 말아야지, 좋은 스승을 찾으러 백방으로 다녀야지 다짐해본다.

 

선생님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이끌려 나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바둑을 만난 이후 첫 번째 운명의 순간이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현역 승부사가, 그것도 좁은 노부모를 모신 상황에서 아홉 살짜리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여 숙식을 함께하며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연을 맺은 것이다. -45p

 

내제자(內弟子)란 일본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린 도제(徒弟)제도가 바둑계에 접목된 형태로,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숙식을 함께하며 기예를 배우는 제자를 말한다. -47p

 

스승은 나의 등대였다.(중략) 300국이 넘는 사제대국을 치르면서 하나둘씩 타이틀을 넘겨주고 때때로 허탈하게 쓴웃음 짓던 나의 선생님, 조훈현 9단.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나를 내제자로 받아들인 일을 후회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중략) 실패한 재능처럼 평범한 것은 없고 인정받지 못한 천재는 세상에 널려있다. 그것이 세상사의 이치일진대, 더없이 범상한 내가 선생님이 빌려준 높은 어깨가 아니었다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고자 하는 추동력을 과연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을까.

-109p

 

바둑은 대국이 종료되면 복기(復棋)의 과정을 거친다. 패배의 과정을 되돌아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실패는 더 많은 지혜의 보따리를 풀어 동일한 실패를 거듭하지 않도록 돕는다. 그래서 나는 바둑의 진수는 복기에 있으며 복기가 끝나야 전과정으로서의 바둑 한 판이 끝나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됐다. 독서로 말하자면 리뷰를 작성함으로써 독서를 완성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누가 복기를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실로 현명한 사람들이다.  

 

복기는 패자에게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지만 진정한 프로라면 복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패자가 복기를 주도한다. 복기는 대국 전체를 되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며, 유일하게 패자가 승자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복기는 주로 패자가 놓아보는 돌(질문)에 승자가 놓아주는 돌(응답)의 진행으로 이루어지는데,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한 대화는 짧거나 거의 없다. 말없이 늘어놓은 바둑판 위의 돌이 진짜 대화다. - 194p

 

바둑에는 '복기'라는 훌륭한 교사가 있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  -84p

 

바둑은 승자가 모든 것을 누리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복기만큼은 패자에게 더 큰 미래의 기회를 제공하는 선물과 같은 것...(후략) -217p

 

바둑이 오랜 세월동안 인류 최고(最古, 最高)의 대전형 게임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도(道)가 있기 때문이다. 조훈현 9단은 왜 '무려 24년간 하루 3~5갑씩, 3만 갑 이상 피운 담배를 단번에 끊어버리고 등산 등을 통해 체력을 보강해' 다시 '세계제패를 향해 비상'하겠다는 결단을 하게 됐을까? 조치훈 9단은 왜 교통사고로 '전치 12주의 진단'을 받고 '15시간 30분이나 걸린 대수술'을 하고 난 뒤 일주일 후 '목숨을 건진 것만도 기적'이니 '대국을 포기하라'는 주치의의 권유를 뒤로한 채 '전대미문의 휠체어대국'을 했을까? 그들에게 바둑은 하나의 종교며 의식이다. 바둑 구도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장구한 세월동안 바둑은 바둑판의 경계를 허물고 나와 인생을 깨우치는 도(道)에 이르렀다. 성경의 십계명처럼 바둑에도 '위기십결(圍棋十決)'이 있다. 열 가지의 사자성어로 이뤄진 위기십결의 으뜸은 책의 제목과 같은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를 탐하면 얻을 수 없다.' 책을 덮고 다시 표지를 내려다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 난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 일, 친구, 직장, 결혼... 내가 마음먹고 달려들면 문제될 것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 세상 위에 내가 있고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가고 싶어.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뿐야. 넘어지진 않을거야. 나는 문제없어'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를 흥얼거렸고 사랑 역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고 혹은 이룰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을 뿐.  

 

최승자의 시집 <이 時代의 사랑>은 내가 사랑을 얻지 못해 몸져 누웠던 그때로 날 데려갔다. 내 존재 의미를 끝없이 회의(懷疑)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때, 그 어떤 사물에도 미소 지을 수 없고, 그 어떤 시간에도 절망을 새겨넣을 수 밖에 없었던 그때, 유일한 희망이라곤 사랑의 기억을 그리워할 시간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때로 말이다. 괴롭고 외로워 오직 그리움만이 희망이 되었던 내 청춘의 시간을 시인은 이렇게 공감해준다. 

 

 

내 청춘의 영원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그때 난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을까를 수도 없이 생각했다. 너무나 혼란스러워 꿈도 잃어버렸다. 두려웠다. 내가 비를 좋아하게 된 건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비의 그 어두움, 축축함, 음산함 같은 것들이 마치 본래 내 성정(性情)인 듯했기때문에. 특히 빗소리를 좋아했다. 시인의 '장마'라는 시가 눈에 확 들어온다. 

 

 

장마

 

넋 없이 뼈 없이

비가 온다

빗물보다 빗소리가 먼저

江을 이룬다

허공을 나직이 흘러가는

빗소리의 강물

내 늑골까지 죽음의 문턱까지

비가 내린다

물의 房에 누워

나의 꿈도 떠내려간다

 

 

<이 時代의 사랑>은 최승자의 첫 시집이다. 52년생인 시인이 20대였던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써 온 시들을 묶은 것이다. 청춘의 고뇌가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절망의 시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장마처럼 쏟아진다. 마른 빵, 곰팡이, 구더기, 시체, 매독, 죽음, 살의, 고독, 알콜, 니코틴, 카페인, 배고픔, 이별, 눈물, 외로움, 땅거미, 술, 아수라장, 무덤, 깨고, 부수고, 울부짖고, 비명, 뜬구름, 검은 배, 풍지박산, 묘비, 절망, 폐쇄, 종말, 구정물, 휴지조각, 쓸쓸한, 무서운, 버림받는, 겨울, 최후, 폭파, 배고픈, 아픈......   시인이 절망의 시어들을 나열하면서 진정 외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희망의 배경은 바로 좌절과 절망이 아닐까? 그래서 희망이 더욱 돋보이는 건 아닐까?

 

최승자의 시집 <이 時代의 사랑>은 내가 가장 절망했던 시간마저도 현재의 행복한 시간으로 오는 징검다리였음을 깨닫게했다. 시를 읽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이 시집은 내가 공감한 시들이 많았다. 휴일 시작부터 연일 비가 내리며 시의 맛을 운치있게 해준 날씨가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이젠 싱그러운 가을 바람에 온 몸을 말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국의 독서 교육 - 책읽기에 열광하는 아이들 대교아동학술총서 4
김은하 지음 / 대교출판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3년전, 아들의 출생신고를 하러 면사무소에 갔다.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두 권의 그림책과 손수건이 든 책꾸러미였다. 직원에게 '이게 뭡니까'하고 묻자 '북스타트(Bookstart) 선물 꾸러미'라고 답했다. 꾸러미 속에는 북스타트에 대한 홍보물도 들어있었다. 홍보물에는 "김해시는 2007년부터 출생신고를 하는 모든 아기에게 '책과 함께 인생을 시작하라'는 의미로 책꾸러미를 선물하는 북스타트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렇게 북스타트 운동을 알게 됐다.

 

 북스타트 운동은 1992년 영국의 도서관사서 웬디 쿨링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영국 최대 규모의 어린이책 단체, 북트러스트(Booktrust)는 아이들에게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다섯번의 책 선물을 한다. 북스타트 운동도 북트러스트의 '다섯번의 책 선물' 프로그램중 일부다. 전부 다 무료다. 내 아이도 이런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김은하의 <영국의 독서교육>을 만났다.

 

<영국의 독서교육>은 저자가 6년간의 영국생활을 하면서 참여관찰한 연구의 결과다. 알토란 같은 영국의 독서교육 정보를 꼼꼼하게 소개한다. 영국이 길러내는 창의적인 인력의 뿌리가, 사람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이야기와 이벤트의 근원이, 성인이 되고 노년의 삶에 이르러서도 책을 곁에 두고 꾸준히 도서관을 찾는 이유가 바로 영유아시절의 '행복한 책읽기'와 '책과 관련된 행복한 경험'에 있음을 많은 자료와 통계로 증명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영국의 교육제도, 생활의 일부가 되고 모든 문화활동이 가능한 공공도서관, 어린이 독서문화를 주도해가는 독서 단체, 그리고 학교, 도서관, 독서단체의 유기적인 네트워킹을 통해 연중 펼쳐지는 어린이책 잔치, 작가와의 만남...그 속에서 아이들은 책과의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하는 탄성만 터져나온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영국의 독서교육을 알려준다기보다 독서문화를 보여준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독서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아이들에게 독후감쓰기를 강요하고 독서인증제를 만들어 독서의 경험마저 경쟁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볼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평생 책을 곁에 두고 행복해 하는 대신 죽어도 책은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채 성장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책 없이 성장한 아이들이 만들어갈 사회와 문화는 상상할 수도 없다.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영국의 독서교육>은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 그런 문화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녁8시, 서울 야경이 한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
 
홈즈 : 어이 왓슨, 여기야, 정말 반갑네. 이게 얼마 만인가?
 
왓슨 : 하하, 그래 홈즈. 자네도 잘 지냈지? 여름 휴가는 어디로 다녀왔나?
 
홈즈 : 나야 뭐 에어컨 시원하게 나오는 사무실에서 책 읽으며 보냈지. 자자, 앉자구.
 
왓슨 : 자네 정말 전망좋은 자리를 잡았군 그래. 참 아름다운 서울이야.
 
홈즈 : 간만에 자네와 식사자린데 신경 좀 썼지. 며칠 전에 예약을 했어. 맘에 드는 모양이구만?
 
왓슨 : 맘에 들어. 좋아.
 
홈즈 : 자네가 좋다니 나도 기분이 좋아. 야경 좀 즐기라구. 내 식사 주문할테니.
 
왓슨 : 그런데 홈즈, 서울에 교회가 많긴 많구만. 저기 십자가들 좀 보게. 마치 서울을 손에 넣은 점령군의 깃발같네. 온통 붉은색이 물결치는 것이 말일세.
 
홈즈 : 새삼스럽긴. 자네도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한 홍콩의 세계적인 건축가 아론 탄 같은 말을 하는구만.
 
왓슨 : 아론 탄 같은 말을 한다구?
 
홈즈 : 그래, 아론 탄은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왓슨 : 글쎄?
 
홈즈 : 자네가 방금 본 서울 야경이야. 십자가라고 했어. 
 
"한국에 오면 항상 인상적인 게 야경 속에 빛나는 십자가예요. 교회가 정말 많죠. 올 때마다 십자가는 더 늘어나는 거 같아요."   - 아론 탄
 
왓슨 :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홈즈 : 그렇지. 아론 탄은 건축가니까. 뭔가 개성 없고 획일화된 이미지에 대해서 좋은 의도로 말하진 않았겠지.
 
왓슨 : 십자가를 하나의 풍경으로만 보니까 그런 것일테지.
 
홈즈 : 맞아, 우리가 십자가를 하나의 풍경으로 본다면 그건 십자가의 본질적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밖에 말할 수 없어. 낯익은 십자가지만 의미는 아주 낯설게 된 거지.
 
왓슨 : 그래. 참, 자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의  신작 <십자군 이야기1> 읽었나?
 
홈즈 : 오호, 자넨 읽었나보군? 십자가 얘길 하다 보니 <십자군 이야기1>가 떠오르는 모양이지?
 
왓슨 : 그렇다네. 난 지난 주 휴가를 보내면서 짬짬이 읽었지.
 
홈즈 : 친구가 이래서 좋다니까. 나도 읽었네. 하하, 맘이 통했군 그래.
 
왓슨 : 정말 잘 됐네. 멋진 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책이야기까지 할 수 있다니.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로 날걸세. 하하.
 
홈즈 : 이제, 스테이크가 나오는 구만. 천천히 먹으면서 이야기해 보자구. 왓슨, 시오노 나나미 대단하지 않나? 
 
왓슨 : 대단하지. 일흔 다섯이 되도록 이런 대작들을 줄기차게 써 내는 걸 보면 말이야. 그 엄청난 지적 열정을 누가 따라갈 수 있겠나?
 
홈즈 : 물론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왓슨, <십자군 이야기1>의 첫 문장 좀 보게. 첫 문장을 선언하듯 던져두고 그에 대한 해설을 하듯 십자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오노 나나미가 대단해 보이더란 말이야.
 
전쟁은 인간이 여러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할 때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11p
 
왓슨 : 홈즈, 나도 그랬어. 그럼 먼저 십자군 전쟁의 목적부터 이야기해 보는게 어떻겠나?
 
홈즈 : 십자군 전쟁의 목적이라... 책의 첫 문장과 어울리겠는데. 해보자구.
 
왓슨 : 십자군 전쟁의 대의명분은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회복이었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을 몰아내는 것, 신의 깃발아래 모인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십자군의 궁극적 목표였지.신앙심 깊었던 중세 그리스도교도들을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로 묶어준 끈이기도 했고.
 
홈즈 : 왓슨, 난 말이야 성도(聖都) 회복이라는 십자군 궁극의 목표를 찬찬히 생각해봤네. 예수가 어린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 입성했던 곳, 최후의 만찬을 열었던 곳, 십자가에 못박혔던 곳, 부활해서 하늘로 승천했던 곳이 바로 성도 예루살렘이지. 예루살렘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그리스도교도들의 성지라네. 하지만 성지를 회복하면 거룩해질 수 있을까? 거룩함이란 대체 뭘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생겨났네.
 
왓슨 : 어렵군.
 
홈즈 : 거룩함은 구별됨이네. 세속적이지 않고 신성한 것을 말하지. 그러니까 어떤 지역을 누가 지배하느냐, 즉,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들이 점령하고 이교도들을 몰아내야만 거룩함이 확보된다고 할 순 없어. 그리스도교도들이 경전의 참된 의미를 삶 속에서 실현하는 곳이면 그곳이 거룩해지는 법이야. 당연히 세속화된 예루살렘이 성도(聖都)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진 삶 속의 현재 공간'이 성도(聖都)가 되는 것이란 말이지.
 
왓슨 : 상당히 일리있는 말이야. 하지만 이건 어떤가? 내가 자란 산 좋고 물 좋은 고향 마을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환경이 심하게 오염되고 인심도 야박해졌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겠나? 살아 있는 동안 조금이나마 내 고향을 다시 아름다운 마을로 되돌리고 싶지 않겠나 말이야. 십자군의 성도 회복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듯 싶은데. 
 
홈즈 : 왓슨, 자네 말이 틀린 건 아니네. 하지만 우린 <십자군 이야기1>에서 성도 회복이라는 궁극의 목적보다 앞서는 십자군 전쟁의 또다른 목적들을 발견하게 되네. 어떤 의미에서는 속셈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야. 신분과 계층에 따라서 주판알을 튕기며 수지타산을 계산했다고 봐야지. 왓슨,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왜 십자군을 일으켰을까? 자기 영지를 다스리던 제후들-툴루즈 백작 레몽, 렌 공작 고드프루아,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 같은-은 왜 험난한 십자군 원정을 떠났을까?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해양도시국가들은 왜 십자군 전쟁에 끼게 됐을까? 사제의 허가를 받지도 않은 남자, 여자, 어린이를 포함한 중세 하층민들은 왜 은자 피에르를 따라 민중십자군의 대열에 들어섰을까?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황제를 눈 속에 세워둠으로써 로마 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을 이슬람과의 전쟁에 내보냄으로써 로마 교황의 권를 과시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 하인리히를 상대로 한 권력투쟁에서 20만에 승리한 것이다. 119p
 
비잔틴 군대와 싸운 전력이 있는 보에몬드가, 비잔틴제국 황제의 요청으로 시작된 십자군에 마흔 일곱이라는 나이로 참가하기로 한 이유는 무어일까. 답은 실로 간단하다. 자신만의 영지. 그것도 광대하고 풍요로운 영지를 원했다는 것. 52p
 
중세의 하층민에게는 일상 생활 그 자체가 이미 가혹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십자군 참가는 그 혹독한 나날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33p
 
왓슨 : 음, 그러니까 십자군에 관계된 사람들의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상황들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됐다는 말이지?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전쟁의 아이디어 속에서 동시 해결을 꿈꾸게 된 것이로구만.
 
홈즈 : 그런데 왓슨, 개별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들은 본래 십자군의 대의명분인 거룩성을 부각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바래게 하는 요소 아닌가?  십자군 1세대가 성도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왕국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원정내내 얼마나 많은 방화, 살육, 약탈을 저질렀나?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참된 거룩함을 버렸던 십자군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네.

 
왓슨 : 음...
 
홈즈 : 돈과 권력을 상대로 대회전(大會戰)을 선언해야할 교회, 희생과 봉사의 자리에 소금처럼 스며들어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게릴라전을 펼쳐야 할 교회가 지금 어떤가? 영지를 확장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에 뛰어든 영주들처럼 교인 수를 불리고 교회당을 넓혀가는 상업적 성장주의에 취해있네. 그것도 "주예수가 바라시는 일을 한다"는 믿음 속에서 말이네. 우리 인구의 4분의 1이나 되는 기독교인들은 어떤가? 기복신앙에 푹 빠져 있지 않나?
 
왓슨 : 홈즈,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
 
홈즈 : 당연하지. 하지만 교회의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렸네. '교회 오면, 예수 믿으면' 복받고 성공한다는 말 좀 그만하면 좋겠네.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면죄가 주어진다고 했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말과 뭐가 다를게 있단 말인가? 이탈리아 해양도시국가 베네치아가 상업적 이익을 목적으로 십자군과 거래하던 장면 기억나나? 교회가 믿음과 영성을 장사하듯 팔아치워서는 안되네. 교회는 말이야 이윤을 창출하는 일류기업을 모델로 삼아서는 안되네. 또 긍정마인드와 성공학에서 배우려 해서도 안되고 말이야. 교회는 성경을 깊이 상고해야 하네. 경전을 두고 왜 자꾸 다른 데를 기웃거리나 말이야. 양적 성장에 교회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어리석은 짓을 이제 그만두었으면 하네. 목회자가 바른 말씀을 선포하고 교인들에게 말씀과 일치되는 삶을 강조함으로써 거룩함에 이르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왓슨 : 이의 없네. 백번 천번 옳은 말이네. 안타깝게도 한국 대형 교회는 대체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네. 하지만 재정적으로, 정치적으로, 수적으로 너무 견고해서 무너뜨리기 힘든 성같지. 한국교회 역사상 지금보다 더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는 없었던 것같네.
 
홈즈 : 뛰어난 장수가 우수한 병사들을 이끌고 공성전을 감행하든지 내부적으로 위대한 개혁지도자가 나오든지 해야겠어. 하지만 <십자군 이야기1>에서 보듯 역사상 명장으로 알려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성전을 싫어했다지.
 
주위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도시를 공략하기는 무척 어렵다. 집 안에서 버티는 상대를 계속 집 밖에서 공격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병력과 군량이 충분하다 해도 무더위와 혹한, 비와 눈과 바람을 고스란히 감수하면서 공격해야 한다. 더군다나 배후에서 적의 원군이 나타나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또한 열악한 환경에서는 역병도 발생하기 쉽다. 적과의 전투에서 죽는 자보다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위생상태가 나빠 죽는 자가 더 많은 것이 공격하는 측의 고민 중 하나였다. 더구나 공격하는 내내 병사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바로 그 때문에 역사상 명장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성전을 싫어했다. 126p 
 
왓슨 : 공성전을 피하려면 내부에서 개혁 세력이 등장하는 수 밖에 없겠구만.
 
홈즈 : 그렇지. 세속화된 교회의 잘못을 회개하고, 성경과 삶이 일치되기를 기도하며, 교회의 머리가 목사가 아니라 예수라고 고백하는 '거룩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한다고 나는 믿네.  
 
왓슨 : 홈즈, <십자군 이야기1>에는 '홈'에서 싸우면서도 '어웨이'에서 싸우는, 십자군에 영토를 빼앗긴 이슬람교도들의 이야기가 나오질 않나.
 
홈즈 : 나오지.
 
왓슨 : 시오노 나나미는 이슬람측의 열세 이유를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궁극적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네. 십자군은 총지휘관은 없었지만 어쨌든 성도 회복이라는 궁극적 목적은 있었는데 말이야. 맞는 말이야. 이슬람교도들은 서로간에 영지쟁탈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마치 현재의 한국 교회들이 교인 쟁탈을 벌이듯이 말이야. 난 거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더하고 싶네.
 
홈즈 : 뭔가?
 
왓슨 : 그건 세금을 적게 걷고 몸의 안전만 보장하면 지배자가 누가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당시 일반 민중들의 생각이지. 다시 위기의 한국 교회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구. 이슬람교도들의 열세 이유에서 보듯 한국 교회의 개별 성도들도 현재의 교회 위기에 대해 책임없다고 할 수는 없네. 자신의 부귀영화, 가족의 무병장수에만 관심이 있고 교회 지도자들의 비성경적인 언행에 무심했다면 신의 정죄를 피할 수 있을까? 비록 개별 성도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호버크와 철제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중무장 기병같다고 항변하더라도 말이야. 
  
홈즈 : 맞네.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참전한 전쟁이 무슨 전쟁인지 분명히 알아야하네. 적은 누군지, 어떤 전쟁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제대로된 무장을 하고 전투에 목숨을 걸 수 있지.
 
왓슨 : 그래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전쟁은 무슨 전쟁인가?
 
홈즈 : 영적전쟁이지. 눈에 보이지 않아. 하지만 눈에 보이는 전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싸움이네. 한국 교회가 신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들로 가득 채워진다면 제2의 종교개혁이 가능하지 않겠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신약성경 에베소서 6장>
 
왓슨교회의 개혁이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네. 한국 기독교 초기, 타국의 사람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서양의 선교사들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가서 그들이 침묵으로 말하는 바를 경청했으면 좋겠어.
 
홈즈 : 그래,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고 선포하기 전에 '신이 그것을 바라실까?' 먼저 물어야 하지 않겠나?
 
왓슨 : 너무 센 말들을 막 쏟아놓았는데 자네 괜찮겠나?
 
홈즈 : 걱정말게. 제일 먼저 나 들으라고 한 소리니까. 나도 한국 교회의 위기를 초래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해. 무척 마음 아프네.
 
왓슨 : 홈즈, 이제 스테이크를 좀 즐겨볼까? 
 
홈즈 : 하하, 그러지. 우선 식사기도부터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만 보는 바보>, <책에 미친 바보>. 제목만 들어도 같은 인물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에 대한 책들이다. 제목은 한자 '看書痴(간서치)'를 각각 '책만 보는 바보', '책에 미친 바보'로 번역한 것이다.

 

두 책은 1년 간격을 두고 발행됐다. 2004년엔 <책에 미친 바보>가, 2005년에 <책만 보는 바보>가 출판됐다. <책에 미친 바보>는 최근 내용을 보강하여 개정판이 나왔다.

 

같은 인물 이덕무를 다루고 있지만 <책에 미친 바보>는 저자 이덕무, 역자 권정원으로 되어 있다. <책만 보는 바보>는 저자가 안소영으로 나온다. 왜 그럴까?

 

<책에 미친 바보>는 이덕무의 원문 한자를 역자 권정원이 국문으로 옮긴 것이므로 저자 이덕무, 역자 권정원이 맞다. 이덕무의 원문 글을 주제별로 나누어 국문으로 번역하고 내용에 따라 읽는데 도움이 되도록 역자가 해설을 달았다. 반면 <책만 보는 바보>는 저자 안소영이 이덕무의 글을 바탕으로 그의 친구들, 시대상황을 엮어 마치 인물, 사건, 주제가 있는 문학작품처럼 되살려 내고 있다.

 

솔직히 읽는 재미는 <책만 보는 바보>가 낫다.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도 <책에 미친 바보>보다 훨씬 강하다. <책에 미친 바보>는 원문을 접해 볼 수 있는 잇점이 있지만 문체는 건조하다. 한 권만 읽으라면 난 <책만 보는 바보>를 읽겠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서 다를 수 있고 두 책의 성격이 다른 만큼 균형잡힌 비교가 어렵다. 이 생각은 100% 개인적인 것이다)

 

아무튼 이제 두 권의 책이 내게 준 이덕무의 이미지는 책과 친구, 두 가지다. 삶을 살면서 이 두 가지만 있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 뭐가 있을까? 이덕무는 평생 신분제도의 구속을 받는 사회구조 속에서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도 못했고 스스로 배부르게 먹지도 못한채 가난과 처절하게 싸웠다. 세상 부귀영화가 부러웠을만 했을텐데 그는 책과 친구에게 삶을 의지했다. 든든했을테지. 그래서 이덕무의 삶이 부럽다.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는 그의 책 <미쳐야 미친다>에서 이덕무에게 압도당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늘 그가 나를 압도하는 대목은 호한한 독서와 방대한 저작이 결코 아니다.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맑은 삶을 살려 애썼던 그의 올곧은 자세가 나는 무섭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만년의 별 실속 없는 득의거나, 그 많은 임금의 하사품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알아줄 기약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제 가는 길을 의심하지 않았던 그 믿음이 나는 두렵다.......(중략) 그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던 맹목적인 자기 확신, 독서가 지적 편식이나 편집적 욕망에 머물지 않고 천하를 읽는 경륜으로 이어지던 지적 토대, 추호의 의심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

<미쳐야 미친다> 81-83p

 

 정민 교수의 글을 읽고 나니 이제 정민 교수의 글이 부럽다. 이덕무에 대한 짧고 알찬 글을 읽고 싶다면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중 이덕무편을 읽으면 된다.

 

<책만 보는 바보>, <책에 미친 바보>, <미쳐야 미친다>. 곁에 두고 다시 읽어 마음을 맑게 하고 인생의 가르침을 얻는데 유용한 책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