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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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난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 일, 친구, 직장, 결혼... 내가 마음먹고 달려들면 문제될 것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 세상 위에 내가 있고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가고 싶어.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뿐야. 넘어지진 않을거야. 나는 문제없어'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를 흥얼거렸고 사랑 역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고 혹은 이룰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을 뿐.  

 

최승자의 시집 <이 時代의 사랑>은 내가 사랑을 얻지 못해 몸져 누웠던 그때로 날 데려갔다. 내 존재 의미를 끝없이 회의(懷疑)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때, 그 어떤 사물에도 미소 지을 수 없고, 그 어떤 시간에도 절망을 새겨넣을 수 밖에 없었던 그때, 유일한 희망이라곤 사랑의 기억을 그리워할 시간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때로 말이다. 괴롭고 외로워 오직 그리움만이 희망이 되었던 내 청춘의 시간을 시인은 이렇게 공감해준다. 

 

 

내 청춘의 영원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그때 난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을까를 수도 없이 생각했다. 너무나 혼란스러워 꿈도 잃어버렸다. 두려웠다. 내가 비를 좋아하게 된 건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비의 그 어두움, 축축함, 음산함 같은 것들이 마치 본래 내 성정(性情)인 듯했기때문에. 특히 빗소리를 좋아했다. 시인의 '장마'라는 시가 눈에 확 들어온다. 

 

 

장마

 

넋 없이 뼈 없이

비가 온다

빗물보다 빗소리가 먼저

江을 이룬다

허공을 나직이 흘러가는

빗소리의 강물

내 늑골까지 죽음의 문턱까지

비가 내린다

물의 房에 누워

나의 꿈도 떠내려간다

 

 

<이 時代의 사랑>은 최승자의 첫 시집이다. 52년생인 시인이 20대였던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써 온 시들을 묶은 것이다. 청춘의 고뇌가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절망의 시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장마처럼 쏟아진다. 마른 빵, 곰팡이, 구더기, 시체, 매독, 죽음, 살의, 고독, 알콜, 니코틴, 카페인, 배고픔, 이별, 눈물, 외로움, 땅거미, 술, 아수라장, 무덤, 깨고, 부수고, 울부짖고, 비명, 뜬구름, 검은 배, 풍지박산, 묘비, 절망, 폐쇄, 종말, 구정물, 휴지조각, 쓸쓸한, 무서운, 버림받는, 겨울, 최후, 폭파, 배고픈, 아픈......   시인이 절망의 시어들을 나열하면서 진정 외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희망의 배경은 바로 좌절과 절망이 아닐까? 그래서 희망이 더욱 돋보이는 건 아닐까?

 

최승자의 시집 <이 時代의 사랑>은 내가 가장 절망했던 시간마저도 현재의 행복한 시간으로 오는 징검다리였음을 깨닫게했다. 시를 읽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이 시집은 내가 공감한 시들이 많았다. 휴일 시작부터 연일 비가 내리며 시의 맛을 운치있게 해준 날씨가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이젠 싱그러운 가을 바람에 온 몸을 말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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