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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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를 읽었다. 펼칠땐 건달 이야기였고 덮을땐 어쨌든 왕 이야기였다. 30년간 지역의 건달계를 평정했던 마사오가 어떻게 장원두, 조창용, 박재천같은 아이들의 왕으로 군림하게 됐는지, 또 그 아이들은 어떻게 마사오의 왕국에서 성장했는지, 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는지 보여준다. 마사오의 죽음은 비로소 장원두를 '왕을 찾는 여정'으로 이끈다. 장원두의 오래된 기억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부풀려진 소문들을 비집고 다니다 보면 우리 각자의 왕을 만나게 된다. <왕을 찾아서>는 나와 당신의 유년에서 가장 빛나는 왕의 유품을 발굴해낼 수 있도록 돕는다. 비록 유년의 유물이 시간의 켜에 묻혀 장년에 이르면 용도가 전혀 다른 유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그것이 왕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만 한다면. 기억과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해도.

 

내가 여섯 살이던 여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선친께서 남겨주신 유일한 유산은 책.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 100권과 세로글쓰기로 된 철학인문서 100권. 아버지의 얼굴도, 웃음소리도, 따뜻한 손길도 너무 아득해서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 나로서는 남겨진 책을 보면서 선친을 그려보곤 했다. 그나마 때때로 어머니와 내 손 윗 형제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었다. 어린 자식들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은 '책을 많이 읽어라, 검소하게 생활하고 꼭 저축하라' 였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를 책과 저축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내 인생 첫번째 왕의 통치지침이며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을 버릴 마음이 없다.

 

왕의 법령은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게 여전히 유효하다. 왕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군림(君臨)한다.

 

지리적으로 화와이는 미국 본토와는 뚝 떨어져 있다. 거리상으로는 캐나다와 멕시코가 미국의 영역에 포함될 가능성이 더 높지만 캐나다는 캐나다, 멕시코는 멕시코일 뿐 미국과는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위치상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 본토와는 고립된 섬이지만 화와이 여전히 미국의 영역이다. 국가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통치권의 도달 여부다. <왕을 찾아서>의 장원두가 지역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지난 5년 동안 지역에는 발걸음 한 번 하지 않았다 해도 마사오의 통치는 유효하고 장원두는 마사오의 백성이다. 어떤 장소가 되었든 왕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이라면 혹 왕이 부재중-부재의 기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해도-이라 하더라도 왕의 영역이다. 내가 왕을 부정하고 멀리 떠난다고 왕국의 영역을 벗어날 순 없다. 심지어 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새 왕이 된 자 조차도 이전의 왕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조창용처럼 마사오를 힘으로 제압했다고 해서, 박재천처럼 마사오를 이용해서 제 욕심을 채운다고 해서 마사오의 백성마저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왕을 선택하는 것은 왕에게 있지 않고 백성에게 있다. 그런 백성들에게 새 왕의 통치력이 미칠 리 없다. 백성의 마음은 말할것도 없고. 죽은 마사오가 산 박재천을 능가하는 이유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니 사람이 없으면 다스릴 백성이 없는 것이고 백성이 없는데 왕은 무슨 왕. <왕을 찾아서> 290p

 

무엇이 왕을 탄생시키는 것일까? 어쩌면 욕망이?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지점에 어장이 형성되는 것처럼 왕이 되고 싶은 욕망과 왕을 모시고 싶은 욕망의 경계에서 수많은 왕의 신화가 산란되고 있는 건 아닐까? 

 

먹장구름 빗 속을 뚫고 맨발로 달려가 알현하려 했던 왕이 빈 왕좌만 남겨둔 채 어디로 갔단 말인가? 표지의 빈 왕좌에 좌정할 수 있는 왕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스스로 이미 인생의 주인이며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왕이 필요하다. 인생의 바다에서 북극성처럼 반짝이며 항로를 이끌어 줄 왕, 사라져도 군림하는 왕을 찾아 나서자. 어디가 되었든 왕이 있는 곳은 눈부시도록 화창할테니까. 

 

고개 정상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지역은 여전히 회오리 바람과 함께 피어오르는 비안개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은 눈부시도록 화창하다. <왕을 찾아서> 3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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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쥐
이은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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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1시, 왓슨이 난처한 표정으로 홈즈의 사무실로 들어선다)

 

홈즈 : 어, 왓슨. 퇴근 시간도 아닌데 어쩐 일인가?

 

왓슨 : 홈즈,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들렀네.

 

홈즈 : 급한 일? 자네가 들고 있는 그 서류 봉투 말인가?

 

왓슨 : 어어, 그렇지.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함세.

 

홈즈 : 그렇다면 오늘은 자네가 내 의뢰인이군, 하하.

 

왓슨 : 그러니까 말일세. 이게 뭐냐하면 한국 추리소설 영문판 완역본이네. 아직 영미권에서 출판되지는 않았네. 두 주 전이었지. 한국의 출판저작권 에이전트 미스터 리에게서 작품 검토 부탁을 받았네. 

 

홈즈 : 자네에게? 하긴 자네는 내가 해결한 수많은 사건들을 흥미롭고 긴장감있게 독자에게 소개했으니 그럴만도 하겠군. 

 

왓슨 :  바로 그걸세. 그걸 믿고 내게 부탁을 했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어. 오늘 아침에서야 숨을 돌리고 있는데 이 봉투가 책장 한 쪽 구석에 쳐박혀 있는게 보이지 않겠나. 이틀 뒤면 이메일로 회신을 해야 하는데 나 혼자서 검토 의견을 내놓기는 시간이 촉박하지 뭔가. 한 부 복사해서 가지고 왔으니 자네가 도와주게.

 

홈즈 : 한국 추리소설이라, 정말 흥미롭군. 한국에도 추리소설이 있단 말이지? 특정 국가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없네. 미안한 얘기지만 아시아권에서 추리소설이라면 단연 일본이니까 말이야. 히가시노 게이고, 온다 리쿠, 미야베 미유키 정도가 내가 아는 아시아 추리작가네. 모두 일본 작가들이고. 뭐 하여간 지금부터 읽어보도록 하겠네. 의뢰인께서 그토록 부탁하시니까, 하하.

 

왓슨 : 고맙네. 오늘 저녁은 내가 약속이 있으니 좀 어렵고 내일 저녁에 다시 들를테니 그때 얘기하세.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추리소설 왕국이라는 일본에서 2009년에 출간됐네. 참고하라구.

 

홈즈 : 그래? 어디 보자. <미술관의 쥐>라...

 

<다음날 저녁, 왓슨이 다시 급하게 들이닥친다>

 

홈즈 : 이 친구 참, 뭐가 그리 급한가? 서두른다고 검토 결과가 뚝딱 나오나? 맘 편히 가지고 이리 와서 앉게. 자, 여기 물 한 잔 마시며 목부터 축이게.

 

왓슨 : 고맙네, 홈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가 깊어진다고 생각하니 혹 일을 그르치게 될까봐 맘 졸이게 되는군 그래. 지금부터 저녁 내내 자네와 얘기한 걸 정리해서 내일 회신하려면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는 다 틀렸겠지? 

 

홈즈 : 뭐 꼭 그렇지는 않을걸세. 자, 거기 접시에 놓인 빵과 과일도 먹게. 

 

왓슨 : 그러세. 이제 좀 진정이 되는군. 시작해 볼까, 홈즈.

 

홈즈 : 왓슨, '이은'이라는 이 한국작가 말이야. 다른 작품도 있겠지? <미술관의 쥐>도 꽤 수작이긴 하지만...음, 왓슨, 자넨 <미술관의 쥐>를 읽어보니 어떻던가?

 

왓슨 :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네. 자네와 내가 등장하는 셜록 홈즈 시리즈와는 또 다른 느낌이더군. 먼저 소재가 아주 독특했어. 미술관, 화가, 큐레이터, 그리고 그 중심에 그림이 있지. 그림도 동양화가 아니라 서양화더군. 대표적으로 등장한 그림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파의 거장 조르조네의 '템페스타'였고.

 

홈즈 : 맞아.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소재로는 독특했지. 독특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소재라고도 할 수 있지. 만약에 작가가 그림이라도 동양화를 선택했다면 영미권의 우리에겐 좀 낯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네. 또 칭찬할만한 게 있나?

 

왓슨 :  물론일세. 작품 전반에 큰 물줄기처럼 흐르는 주제의식이네. 

 

홈즈 : 주제의식? 

 

왓슨 : 추리소설에서 무슨 주제의식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 읽는동안 긴장과 스릴 즐기면 추리소설은 역할은 다했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미술관의 쥐>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주제가 있네. 그건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지. 박길용 관장이 김준기와 만나는 첫장면부터 미술작품을 투자의 대상으로만 보는 경매장에서 양누리와 강윤희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거쳐, 변재범 실장이 형사 강정수에게 돈이 예술이라고 떠들어대는 장면을 지나, 김준기와 양누리가 박길용 관장의 마지막 칼럼 '미술관의 쥐'를 읽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말일세.

 

 

박길용 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김준기를 바라보았다.(중략)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중략) "자네가 말한 대로네. 예술 말일세. 그냥 자네가 좋아하고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지." <미술관의 쥐> 16-17p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예술계에 전문적으로 몸담고 있는 사람이건 단순히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고 봐요. 바로 예술이요. 예술 그 자체요. 그런 게 점점 없어져가요......" <미술관의 쥐> 122p

 

변재범은 김정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예술이 뭡니까?" "뭐라고?" "김 형사가 생각하는 예술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요." (중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은 뭔데?" "자본 아니겠습니까?" <미술관의 쥐> 258p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 예술을 시작할 때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바로 예술이니까요. 예술은 뭐 대단하고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순수의 회복, 그게 바로 예술입니다. <미술관의 쥐> 280p

 

 

홈즈 : 그렇군. 주제의식... 자네가 <미술관의 쥐>에 대해 호평을 했으니 난 비평을 좀 해볼까하네. 그렇다고 혹평을 하려는 건 아니네.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네.

 

왓슨 : 오, 궁금해지는군. 들어볼까?

 

홈즈 : 왓슨,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은 독자의 호기심을 연료로 작동하네. 제목을 보고 몇 장 넘기면 하나 둘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건이 터지지. 그 지점부터 독자는 끊임없이 궁금증으로 꽉 찬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네. 범인이 누구인지, 범죄는 어떻게 저질렀는지, 왜 저질렀는지, 추리의 단서는 무엇인지, 어떻게 사건이 해결될 것인지 하면서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지.

 

왓슨 : 그렇지.  그런데?

 

홈즈 : 어쩐 일인지 <미술관의 쥐>는 이런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고 치밀하게 자극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네. 띄엄띄엄 자극하는 것 같더군. 왜일까? 생각해 보았지.

 

왓슨 : 답이 나오던가?

 

홈즈 : 그건 독자의 질문에 일목요연하게 답하며 사건을 이끌어 가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네.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추리를 전개해서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성실하게 독자에게 보여주는 인물말일세. <미술관의 쥐>에서는 김준기와 양누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약하단 말이지. 독자는 형사  김정수, 미술전문기자 오진환까지 초점에 잡아두어야 하네. 번거롭지. 돋보기의 초점이 분산되면 불을 일으킬 수 없듯이 시선이 분산되면 추리의 응집력 현저히 떨어진다 것, 자네도 알고 있겠지.

 

왓슨 : 그렇게 볼 수도 있구만. 근데 홈즈, 그건 자네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우리 이야기를 독자에게 보여줄 때 언제나 자네를 중심으로 삼았네. 이 때문에 우리 독자는 누가 범인인가?에 주의를 모으고 홈즈 자네가 어떻게 추리해서 사건을 해결하는지에 집중할 수 있어. 하지만 <미술관의 쥐>는 좀 다르지.  우리의 이야기가 사건과 추리 중심-누가? 어떻게?-이라면 <미술관의 쥐>는 주제-왜?-가 중심이네. 탐정이나 형사가 핵심인물이 아니지. 자네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네.

 

홈즈 : 음, 그래도 퍼즐을 한 사람이 맞춰나갔으면 좋았을텐데... 임팩트가 약하단 말일세. 김준기나 양누리 말고 오진환 기자가 적격이었네. 미술전문기자로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데다 예의 날카롭고 치밀한 논리로 사건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었을텐데 말일세.

 

왓슨 : 허, 자네 무척 아쉬운 모양이군.

 

홈즈 : 또, 자네는 주제의식을 잘 드러냈다고 했지만 난 오히려 그것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인물과 구성이 성기게 되지 않았나 생각하네. 변재범 실장이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왜 자본이 예술이라고 주장하게 됐는지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네. 나영호, 강윤희 팀장이 왜 변재범과 공모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폭력조직과 변재범은 어떤 루트를 거쳐 한 통속이 되었는지 연결고리가 느슨하네. 오진환이 사건에 깊이 개입하면서 그 전모를 밝혀가던 때 갑자기 경찰에 넘기게 되는 장면도 이해하기 어렵네. 기자라면 치열한 기자의식과 특종에 대한 애착이 있었을텐데 말이야.

 

왓슨 : 듣고보니 일리가 있군, 홈즈.

 

홈즈 : 독자의 가독성을 저해하는 논문의 삽입도 눈에 거슬리더군. 너무 길었네.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되는 '템페스타'의 용을 설명하기위해 논문을 통째로 인용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박진감을 반감되더니 이야기의 속도가 확 떨어졌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다가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꽉 막힌 시내로 진입한 느낌이었어.

 

왓슨 : 나도 그 부분은 좀 지루하더군. 작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 독자는 인내심이 부족한 거고.

 

홈즈 : 왓슨, 주제를 더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이건 어땠을까?

 

왓슨 : 뭔가?

 

홈즈 : 독자는 변재범과 그 일당이 범인인 줄 알지만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진 채 마무리되는 거지. 윤후 화백과 오진환은 여전히 실종 상태로 처리하고 변재범 일당은 수사를 비웃으며 정로미술관에서 아랑곳없이 근무하는 걸 보여주는 걸세. 작가가 예술계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면 내 방법이 독자에겐 더 설득력을 얻지 않았을까?

 

왓슨 : 이 작품의 긍정적인 면도 있었겠지?

 

홈즈 : 물론이네. 자네도 언급한 독특한 소재와 뛰어난 주제의식이 대표적이겠지. 그리고...<미술관의 쥐> 자체가 '템페스타의 용'이라는 추측도 해봤지.

 

왓슨 : 뭐라고?

 

홈즈 : 자네, 박길용관장이 김준기에게 '그림 속에 답이 있다'는 암시를 한 것, 기억하지?

 

왓슨 : 물론이네. 그게 나중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됐지. 

 

홈즈 : <미술관의 쥐>가 하나의 암시네. 작품은 자본이 득세하고 순수성을 잃어버린 예술계의 현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했네. 추측건대 작가는 예술계의 내부고발자가 될 수도 있었을걸세. 언론에 터뜨릴수도 있었겠지. 납치되어 감금당한 채 부인의 가짜 그림을 그렸던 윤후 화백이 사용했던 방법을 작가 이은도 사용한 거네. 전문가가 아니면 의식하지도 못하는 점을 찍는 방법. 예술계의 사람들이 <미술관의 쥐>를 얼마나 읽을까마는 예술계 내부의 썩은 부위를 아는 사람이 읽게 된다면 뜨끔 뜨끔하지 않겠나?

 

왓슨 : 그럴듯한데 홈즈. 그렇지. <미술관의 쥐>는 미술, 음악, 문학 등을 아우르는 예술계 전체에서 충분히 '템페스타의 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는걸.

 

홈즈 : 왓슨, 어서 가서 정리하게. 그리고 그 출판저작권 에이전트에게 이은의 다른 작품도 보내달라고 부탁해보게. 미래가 더 기대되는 작가라는 말도 덧붙이고 말이야.

 

왓슨 : 알겠네. 즐거웠네, 홈즈. 숙제를 끝낸 기분이야.

 

홈즈 : 참, 왓슨. 자넨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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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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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하던 1995년, 나는 잊을 없는 경험을 했다. 하도 충격적인 일이어서 처음엔 꿈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4월 5일 식목일, 기상 시간도 오전 6시에서 7시로 1시간 늦춰진 휴일이었다. 다들 곤히 잠들어 있던 새벽, 갑자기 내무반과 복도에 불이 켜지며 비상이 걸렸다. 눈[雪]때문이었다. 강원도에 눈이 지겹도록 많이 온다는 건 지난 겨울을 지나면서 알게 됐지만 '설마' 4월에 눈이랴, 하고 침구을 정리했지만 연병장은 '정말' 하얀 눈을 가득 품고 우리를 맞았다. 

 

경남 김해에서 줄곧 자라온 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절기상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는 물론 경칩(驚蟄)과 춘분(春分)까지 지난 4월에 눈이라고? 김해에서는 겨울에도 보기 힘들었다. 20대 초반까지 눈 오는 날을 본 건 손에 꼽는다. 눈 오는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기념 촬영을 했다. 밥그릇에 설탕을 두어 숟가락 넣고 깨끗한 눈을 가득 퍼 담아 빙수(氷水)라며 먹던 기억도 떠오른다.

 

완연한 봄이라고 생각했던 4월의 눈은 꽃샘추위의 영역이 얼마만큼 확대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후로 나는 우리나라의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뚜렷한 건 맞는 말이지만 계절의 경계는 허물어 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봄의 한 가운데서도 꽃샘추위가 불쑥 불쑥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가을이 되어서도 '인디언 서머'가 더위를 몰고 오는 것처럼, 뚜렷한 사계절 속에 뜻밖의 계절이 엄연히 존재한다. 

 

홍천에서 군 복무를 하지 않았으면 4월에 눈이 간혹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리라.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나의 주변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사유하게 만든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4월에 만난 눈같았다. 우리 역사 속에 뜻밖의 역사가, 그리고 엄연한 역사가 쓰여지고 있음을 목격했다. 

 

<검은 꽃>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韓人)들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김영하가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역사 자료를 1차 자료로 하여 허구를 덧입혔다. 전형적인 팩션형 소설이다. 대한제국의 몰락,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 멕시코의 내전과 혁명 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다양한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혀있다. 김영하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역시 김영하라고 할만큼 흡입력이 대단하다. 

 

책을 덮는 순간 여러가지 이야기가 머리 속에 폭죽처럼 터졌다. 조국을 떠난 선조들의 삶,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과 약탈, 같은 민족 사이라도 끊임없이 충돌하는 개인들의 삶, 남녀의 사랑과 그 유한성,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선택, 꿈과 삶과 죽음의 허무함...슬프고 아프고 화나고 허탈하고 여러 감정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애니깽들의 삶을 살아 본 것처럼 나도 모르게 몰입했었나 보다.

 

하여간 <검은 꽃>이 내게 질문을 해왔다. 첫번째, '당신은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가?' 대한제국을 선택한 적이 없는 조선의 백성들은 어느날 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대한제국의 한인들은 1905년 멕시코로 건너왔지만 1910년 원하지 않는 일본인이 되었다. 국가의 행위가 모든 국민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대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모든 인간에게 원죄가 되고,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모든 인류에게 면죄부가 된다는 기독교의 교리처럼 말이다.  

 

요시다가 돌아서는 이정을 잡았다. 참, 이제 너도 일본인이야. 그러니까 너의 행적도 우리로서는 모두 보고 사항이야. 아고 있게지만 멕시코에 사는 모든 한인들은 1910년부터 모두 일본인으로 국적이 바뀌었어.(중략)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검은 꽃> 260p

 

조국이 없어진 멕시코의 한인들은 멕시코 내전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병이 된다. 40여명으로 구성된 용병들은 마야문명의 한복판에 신대한(新大韓)이라는 국가를 건설한다. 하지만 뿌리가 없어진 나무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는가?  전투중에 전멸하지만 김이정에게는 자신만의 논리가 있었다.

 

왜놈이나 되놈으로 죽고 싶은 사람 있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차라리 무국적은 어때? 돌석이 말했다.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검은 꽃> 306p

 

대한민국 건국 6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묻는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고 죽는 것이 자랑스러운가? 자랑의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해도 이 나라는 감사의 조건들은 갖추고 있다. 내가 누리는 풍요로운 현재는 이 조상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과거가 기반이기 때문이다. 

<검은 꽃>의 두번째 질문, '역사는 반복되는가?' 최근 정부의 주요 복지코드는 출산장려정책과 다문화정책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다문화관련. 다른 지역도 외국인들이 많겠지만 김해에는 외국인 등록인구가 1만 5천명이다. 불법외국인들까지 합하면 3만명에 이른다는 기사도 있다. 50만 인구에서 3만명이라면 6퍼센트다. 적지 않다. 베트남, 중국, 우즈베키스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중에는 결혼이주여성들도 상당수 있다. 우리가 먹고 살기 힘들어 다른 나라로 이주했던 것처럼 그들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먹고 살기가 괜찮아진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농장주가 노예들을 수탈하듯, 양반이 하인들 위에 군림하듯, 기업주들이 외국인노동자들을 착취한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들을 대하는 시민들의 꺼려하는 태도도 그들의 가슴에 상처를 준다. 우리 스스로 퇴보된 역사를 현재로 가져오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잊고 역사는 잊어도 역사를 기억하는 개인은 있기 마련이며 이들은 삭제된 파일을 복원하는 프로그램 엔지니어들처럼 역사의 진실을 복구하는 힘이 있다. 동남아의 아시아인들이 한국을, 적어도 김해를 아름다운 기억과 역사의 공간으로 그들의 문학 속에 그렸으면 좋겠다. 

   



<검은 꽃>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문학의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잊어버린 개인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비록 애니깽, 까레이스키, 조센징으로 불리던 우리 선조들의 아프고 비참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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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가족 레시피 -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
손현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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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의 사무실, 오후6시 즈음)

왓슨 : 이보게, 홈즈 아직 멀었나? 난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네. 점심을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떼웠네.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홈즈 : 이제 이것만 정리하면, 자, 다 됐네. 여섯시 조금 넘었군. 자네가 그렇게 시장하다니 어서 나가세. 내가 맛있는 저녁을 사지. 

왓슨 : 지금은 뭐든 먹을 수 있네. 삼겹살이든, 해물탕이든, 자장면에 탕수육이든 뭐든 좋아. 뱃가죽이 등에 붙어 버렸거든. 

홈즈 : 사무실 맞은 편 골목에 오삼불고기를 기막히게 잘하는 집이 있네. 거기로 가세.

왓슨 : 오삼불고기, 생각만해도 입 속 가득 침이 고이는군. 오징어와 삼겹살에 매콤한 양념을 넣고 불판에 익힌 다음 상추와 깻잎에 싸서 먹으면...

홈즈 : 바로 저길세. 식사때만 되면 길게 줄을 서서 먹을만큼 인기가 있네. 오늘 저녁엔 아직 줄이 없군.

왓슨 : 어이쿠, 그래도 식당 안은 거의 꽉 찼는데...음..냄새가 좋아.

홈즈 : 자, 저쪽 빈 자리에 앉자고. 

왓슨 : 허, 홈즈, 입구 쪽을 보게. 자네 말이 맞구먼. 이제 막 줄을 서기 시작하는데. 운이 좋았어. 

홈즈 : 여긴 따로 주문이 필요없어. 메뉴가 오삼불고기뿐이거든.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바로 음식이 차려진다네. 이것 보게, 벌써 불판이 나오는 군. 워낙 장사가 잘 되는 집이라 말이야, 식재료도 신선하다네. 

왓슨 : 벌써, 다 익어가는 걸.

홈즈 : 천천히 많이 먹게. 

(식사가 끝나고 커피전문점에서)

홈즈 : 왓슨, 오삼불고기는 맛있던가?

왓슨 : 하하, 알면서 뭘 그렇게 물어보나. 정말 잘 먹었네.

홈즈 : 하긴 한마디 말도 없이 입에 쌈을 쉴새없이 밀어넣더구만. 그리고 가족들에게 맛 보이려고 5인분이나 포장을 했으니...알만하네. 그건 그렇고 내가 음식 값을 계산하는 사이, 자네 주인 아주머니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데...

왓슨 : 아, 그거. 어떻게하면 그렇게 맛있는 오삼불고기를 만들 수 있는지,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지 물었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더군. 여기 이렇게 받아 적은 종이도 있어. 

홈즈 : 오삼불고기 레시피구만. 어디 볼까? 

왓슨 : 여기 있네. 

홈즈 : 음, 그러니까 오징어 한 마리, 삼겹살, 떡볶이용 떡, 양파, 양배추, 대파에 갖은 양념을 넣어 잘 버무린 다음 불판에 구워 상추, 깻잎에 싸서 먹으면 되는구만.

왓슨 : 그렇지, 아주 쉽지?

홈즈 : 그런데 말이야 왓슨, 갖은 양념이 뭔가? 

왓슨 : 갖은 양념은 뭐 고추장, 간장, 설탕, 고추가루, 마늘로 만들었겠지.

홈즈 : 왓슨,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먹는 음식점을 운영하는 주인이 그 비법을 쉽게 이야기해 줄 것 같나? 우리가 오삼불고기를 만들기 위해 자네가 적어온 식재료를 다 준비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아주머니가 말한 '갖은 양념'을 만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 될걸세.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들지만 전혀 다른 맛을 낼 거란 말이지.

왓슨 : 하기야 그렇겠지...그렇지 않다면 너도 나도 스스로 만들어 먹을테니까.

홈즈 : 뭐, 너무 실망하진 말게. 오삼불고기가 먹고 싶을때마다 그 식당엘 가면 되니까 말일세. 이제 지난 주에 읽었던 책 이야기 좀 해볼까? 

왓슨 : 그러지, 손현주 작가의 <불량가족 레시피>네.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홈즈, 묘하게도 자네 말을 듣다보니 이 책에 대한 통찰이랄까, 영감이랄까 뭐 그런게 떠올랐네. 오삼불고기 레시피, 불량가족 레시피 하다보니까 말이야...

홈즈 : 하하, 그 친구 무슨 영감이 떠 올랐길래 그렇게 묘한 미소를 짓나?

왓슨 : 홈즈, 그러니까 말이지, 자네는 <불량가족 레시피>에서 여울이의 가족이 '불량'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홈즈 : 내 생각에는 그들이...

왓슨 : 홈즈, 잠깐만. 자네는 직업이 직업인 만큼 벌써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네만. 필 받았을 때 말일세.

홈즈 : 그렇게 하게, 재밌을 듯하네.

왓슨 : 자, <불량가족 레시피>에 나오는 여울이의 가족을 하나 하나 보자구. 먼저 주인공 권여울. 17세, 소원여고 1학년이네. 엄마는 나이트클럽의 댄서. 혼외자로 태어났네. 나중에 다시 얘길 하겠지만 보통이 넘는 아이지. 다음은 여울이의 할매네. 생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세 명의 손자, 두 명의 아들을 뒤치닥거리하고 있어. 할매의 나이는 무려 여든 셋일세. 예순 셋이 아니라 여든 셋.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픈 삶의 역사가 있네. 이제 여울이의 아빠. 이 자는 제일 불량한 이력을 지녔어. 두 여자와 결혼했고 한 여자와 동거했네. 그때마다 아이들을 낳았고.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인사지. 여울이의 삼촌이라는 사람은 명문대를 졸업한 투자전문가네. 하지만 거듭된 투자 실패로 투자자들을 피해 도망다니다 결국 뇌경색으로 신체 마비가 와 버렸어. 아내와는 위장 이혼을 했지만 지금은 진짜 이혼이 되어버렸네. 지금은 밥만 축내는 식충이... 여울이의 오빠는 중학교때부터 다발성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네. 스물 한 살 청년이 기저귀를 차고 다니네. 내성적인데다 병약하고 소심하지. 언니 유나는 열 아홉의 고3 수험생이네.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이 있지만 대학 진학은 꿈도 못꾸고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채권추심 하청업을 돕고 있지. 홈즈, 숨이 차네.

홈즈 : 나도 책은 읽었네만 여울이, 할매, 아빠, 삼촌, 오빠, 언니의 이력을 자네 입으로 다시 들으니 참 기가 막히는군. 뭐 이런 가족 구성이 다 있나. 한 집에 사는 게 기적이네.

왓슨 :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완전 막장 드라마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고 말이야. 한 사람 한 사람을 뜯어보니 정말 가관이고 <불량가족 레시피>란 제목이 딱 들어맞더군. 

홈즈 : 그런데?

왓슨 : 그런데 말이야, 홈즈. 그 가족이 불량스런 맛을 내는 건 그들이 과거에 만들어 온 삶의 이력과 태생도 한 몫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달았지.

홈즈 : 그래? 뭔지 어서 말해 보게. 뜸 들이지 말고.

왓슨 : 그건 바로 '말'일세. 

홈즈 : 말?

어려서부터 할매는 나만보면 '송장 칠 나이에 똥 걸레 빨게 한 년'이라는 소리를 거침없이 밷었고, 그런 잔소리와 타박은 나를 이 집에서 겉돌게 만들었다. <불량가족 레시피> 14p~15p

"그게 다 타고난 어머니 팔잔데 어떡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속 썩이는 자식을 둔 것도 능력없는 남편 만난 것도 어머니 복이라고 생각하고..." 삼촌이 머릴 감싸고 소리를 빽 질렀다. <불량가족 레시피> 25p

갑자기 언니가 내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아야, 뭐야?" "일어나, 이년아! 내가 미쳐 정말!" 왜 아침부터 지랄이야!" <불량가족 레시피> 73p

"가시나야, 퍼뜩 죽어라. 어려서 술 많이 처묵으면 빨리 죽는다 카더라.(중략) 나중에 지 엄마맹키로 유흥가로 빠질라 카나." <불량가족 레시피> 76p

"네가 술꾼이냐! 이제 겨우 열일곱뿐이 안 된 년이 어디 할 짓이 없어 술 처먹고 새벽까지 싸돌아다녀!" 불곰의 큰 손이 우악스럽게 내 얼굴을 쳤다. <불량가족 레시피> 84p

"그러니까 우리 집에는 나 말고 일하는 인간이 없는 거네. 다 큰 자식은 허구한 날 빌빌대서 응급실에 실려가지를 않나, 동생이란 놈은 대갈통 맛이 갔다는 핑계로 뺀질거리질 않나" <불량가족 레시피> 124p

"너도 나가, 새끼야! 다 필요 없어. 그렇게 술 처먹지 말라고 일렀건만 애비 소리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사람 구실 못할 거면 나가 죽어, 이 새끼야..." <불량가족 레시피> 126p

왓슨 : 이 가족의 비밀은 그들이 지금 서로에게 내밷는 '말'에 있다는 뜻일세. 그들이 하는 대화를 잘 살펴보게, 홈즈. 그들의 대화는 부정적인 말이 빗발치는 전쟁터네. 서로의 가슴을 향해 날리는 치명적인 독설과 폭언을 보게. 한 마디 말로도 사람을 죽게 할 수 있고 마음 속 깊은 곳에 한을 품게하고 복수의 칼을 갈게 만들지. 하물며 그게 일상적이라면 더 말해 뭣하겠나? <불량가족 레시피>를 읽는 동안 내 혀 끝에서 느껴졌던 불량스런 맛. 그 맛을 낸 갖은 양념이 바로 욕설, 저주, 비난, 한탄, 원망이 뒤섞인 그들의 말이었던 게야.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말[馬]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마음대로 부립니다. 배를 보십시오. 그렇게 큰 배가 강풍에 밀려 다녀도 항해사는 아주 작은 키 하나로 그 배를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이와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현대인의 성경> 야고보서 3장 2~5절  

홈즈 : 왓슨, 대단해. 그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몸을 성장시키듯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을, 특히 청소년을 성장시키지. 인간은 타인의 말 속에서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말일수록 영향력은 커지지. 짐작했겠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은 바로 가족일 수 밖에 없네. 가족은 출생 공간일 뿐만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며 씻고 자는 생활 공간이기도 하네. 이 공간 안에서 축복, 감사, 위로, 격려, 지지, 인정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인간은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네. 성장기의 아이들에겐 더욱 치명적이네.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감도 없지. 자신감이 없으면 대인관계도 소극적으로 되고 말이야.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네. 

왓슨 : 홈즈, 역시 자네가 더 정확하게 짚어주는군 그래. 여울이도, 할매도, 아빠도, 오빠도, 유나도, 삼촌도 똑같은 뉘앙스로 내밷는 말이 있네. '내 마음을 몰라 준다' 라는 것이지. 가족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이 말들이 참 가슴 아프더군.

도대체 할매는 내가 왜 그러는지에 대한 탐구가 없다. 마음을 살피려 하지 않고 행동의 결과만 볼 뿐이다. <불량가족 레시피> 18p 

"느그들이 에미 힘든 거 알아주기를 하나, 배꼽잡게 웃겨 주기를 하나." <불량가족 레시피> 20p

"그리고 너, 한 번이라도 아빠 입장 생각해 봤어? 맏딸이면서 말이야." <불량가족 레시피> 93p

"아버지가 내 맘 한번 알아준 적 있었어요? 따뜻한 위로 한번 했냐고요? 내 나이에 기저귀 차고 다니는 심정 알기나 해요?" <불량가족 레시피> 126p

여울이는 자기 가족을 '불쌍한 영혼의 집합소'로 '삼류인생들의 이야기'로 인식하고 있어. '불량'을 '좋은'으로, '불쌍'을 '행복'으로, '삼류'를 '일류'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두말할 필요없이 '말'을 바꾸는 것이겠지. 

홈즈 : 왓슨,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하지만 가출도 나를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말을 바꿀 수 없으면 당분간 부정적인 말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볼 필요가 있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몸으로 현실에 부딪히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건 무척 힘들어. 하지만 그 힘든 현실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될 걸세. 

갑자기 삼촌이 다시 보였다. 몸까지 성치 않으면서 혼자 힘으로 살아 내려는 노력이 눈물겨웠다. 자식에게 떳떳하기 위해 24시간을 주유소에서 지내는 그 의지가 대단해 보였다. <불량가족 레시피> 165p

왓슨 : 음, 가출이 아주 부정적이진 않다?

홈즈 : 성인들의 경우는 어느 정도 괜찮지. 하지만 청소년들의 가출은 반대네.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너무 취약하네. 여자 아이들에겐 더욱 취약하고.

왓슨 : 여울이의 경우는 가출 안하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지. 물론 가출을 꿈꾸는 아이지만 말이야. 끝까지 아슬아슬 했네만.

홈즈 : 여울이는 특별한 가정 환경을 가진데다 17세의 여고생이니 방황은 당연하겠지?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됐는지,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기 마련이네. 감추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기도 하겠지? 할 수만 있다면 변신이라도 하고 싶지 않겠나?

왓슨 : 허허, 이제야 자네 본격적으로 여울이를 조명하겠다는 뜻이구만. 시작해 보게, 홈즈. 여울이의 변신이야기 말일세.

홈즈 : 눈치챘군. 왓슨, 내가 모자, 안경, 콧수염 같은 걸 변장하고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변신하는 이유는 의뢰받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일세. 그런데 여울이가 코스튬플레이 동호회에서 발표를 위해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 건 그 목적이 좀 다른 것 같더구만. 현실에서 나로 살 수 없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기때문에 만화나 영화 속 캐릭터가 되는 것이지. 여울이의 변신은 두 가지 상반된 목적을 가지고 있네. 하나는 숨기기 위해서지. 남에게 보이기 싫은 것,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라네. 다른 하나는 드러내기 위해서지. 남에게 보이고 싶은 것, 알려졌으면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네. 왓슨, 자네 의사로서 할 말 없나?

왓슨 : 그런 변신을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겠지. 변신의 두 목적 사이에서 여울이는 부조화를 경험해야 하네. 뿐만 아니라 현실 상태와 변신 상태의 불일치에 침묵해야 하고. 

홈즈 : 그렇군. 하지만 여울이는 변신을 통해 없던 자신감이 생기고, 관심을 끌고 인기를 얻으면서 존재감을 느낀 모양이네. 요즘 청소년들이 개인 블로그나 온라인 게임을 통해 자신을 대신하는 캐릭터, 즉 아바타를 만들어 성장시키는 방법 대신 여울이는 직접 만화나 게임의 캐릭터로 분장하는 코스튬플레이라는 방식을 택했네. 동화처럼 직접 마법을 걸 수 있었다면 여울이는 영영 영화 슈렉의 '피오나 공주'로 살아 가고 싶었을 걸세. 하지만 변신은 또 다른 변신을 부르기 마련이며 이 캐릭터, 저 캐릭터를 전전하다보면 결국 천의 얼굴을 가지게 되네. '나'로 살고 싶어 시도한 변신이 '나'를 완전히 없애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지. 다행스럽게도 여울이는 코스튬플레이를 통해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법, 나로 살아가는 법을 깨닫게 되지. 

이런 우스꽝스로운 분장을 하면서 자신감이라는 것도 얻었다. 습관처럼 달고 다니던 우울함도 조금은 떨칠 수 있었고, 엄마의 빈자리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고마워, 코스튬플레이! (중략) 이제 진짜 용기를 내 출가한 사람처럼 세상을 향해 나아갈 생각이다. <불량가족 레시피> 194-195p

왓슨 : 홈즈, 여울이가 코스튬플레이 동호회에서 덤으로 얻은 게 하나 더 있네. 

홈즈 : 자네, 오늘 말이 척척 나오는 군.

왓슨 : 그런가? 여울이가 불량스런 말의 홍수를 헤쳐갈  희망의 뗏목. 그건 책이었네. 코스튬동호회에서 좀 생뚱맞게 40대의 아줌마, 마리아를 만나잖나. 그녀는 여울이에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지.

홈즈 : 음, 기억이 나는군. 여울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서 천사 미하일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답을 내놓는 장면이 흥미로웠네.

미하일은 세몬과 살면서 그 질문의 답을 얻는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사랑이며, 사람은 사랑때문에 산다는 게 그 답이었다. (중략)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서 얻은 답이다. <불량가족 레시피> 103p

왓슨 : 하지만 여울이가 마리아 아줌마와 톨스토이의 작품에 대해 나누는 장면, 구속된 아빠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영치해 주는 장면을 떠올려 보게. 여울이는 미하일의 답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걸세. 희망적인 이야기가 필요했던 여울이에게 좋은 선물이 된 셈이네.  

홈즈 : 이런 희망적인 이야기가 마리아 아줌마를 통해 여울이와 독자에게 전달된 건 좀 아쉬웠네. 왜냐하면 뭐랄까 작가가 끼여든 느낌이었어. 내가 보기에는 여울이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어른에 대한 신뢰가 없네. 할매, 아빠, 얼굴도 모르는 엄마, 학교 선생님, 매점 아저씨 등과 관계를 봤을때 말이야. 그래서 좀더 자연스러운 인물을 매개로 제시되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왓슨 : 일리가 있는 말일세. 그래도 청소년 소설의 지평을 넓힌 건 분명하네. 대부분의 청소년성장소설이 입시, 왕따, 학교 폭력, 이성관계 등 진부한 소재를 활용하네만 <불량가족 레시피>는 특별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몰락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가족의 재기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점, 코스튬플레이를 긍정적으로 소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홈즈 : 하여간 여울이는 가정 형편상 방황을 많이 하네. 나이트 클럽에 가서 술도 마시고, 공부보다는 코스튬플레이에 더 관심이 많고,  학교에서 식권도 위조해서 팔아먹었다가 들켜서 곤혹을 치르고,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고백했다가 딱지 맞고... 등등. 왓슨, 난 말이야, 청소년 시기의 방황이 한 개인의 연대기에서 신화(神話)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네. 당장 현실이라서 아프지만 시간 한겹 두겹 쌓이게 되면 언젠가는 과거의 일이 되기 마련이네. 신화가 뭔가? 국가 탄생의 태몽아닌가. 신화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뿌리내려 역사의 굳건한 반석으로 존재하네. 신화가 없는 그리스와 로마를 상상할 수 있나? 신화가 없는 민족은 돌아갈 땅이 없는 짚시와 진배없네. 평생 끝나지 않는 여행을 하다가 종내는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삶을 마감하는 것이지. 방황이 넓고 깊을수록 아름다운 신화가 탄생하는 법이라네. 인류사가 처음부터 역사시대로 시작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나. 들려줄 신화가 없으면 무척 쓸쓸할 걸세. 청소년기의 방황은  인생이라는 장엄한 연대기의 신화네. 

왓슨 : 큭큭.

홈즈 :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 왓슨?

왓슨 : 여울이 할매 있잖나. 정말 경상도 사투리 맛깔나게 쓰더군. 그 할매도 시간이 지나면 신화적인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니 우스워서. 

홈즈 : 여든 셋의 할매와 열 일곱 소녀의 동거. 여울이가 몇 살까지 살 지 모르겠지만 결혼해서 애 하나만 낳아봐도 할매가 신화 속의 영웅보다 더 위대했다고 엉엉울며 고백할걸세. 대단한 할매야.

왓슨 : 11시가 넘었군, 나가세.

홈즈 : 조심해서 들어가게, 오삼불고기 잘 먹고. 

왓슨 : 오늘 고마웠네. 또 연락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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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4-2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곡 형식이라 읽기가 좋았어요^^

BOOK소리 2011-04-24 08: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프리트님.
 
소설 파는 남자 - 출판 저작권 에이전트 이구용의 한국 문학 수출 분투기
이구용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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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왓슨의 병원> 

  

홈즈 : 왓슨, 자네 뭘 보고 있길래 입이 귀에 걸렸나? 친구가 문을 열고 들어와도 모르고. 

 

왓슨 : 어, 홈즈, 왔구만. 미안하네. 방금 우리 직원이 주고 간 청첩장을 보느라.

 

홈즈 : 청첩장? 사람하곤... 자네가 장가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좋아하나?

 

왓슨 : 홈즈, 이 청첩장의 신랑, 신부는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네. 신랑은 학교 후배고 신부는 내가 병원을 오픈할 때부터 지금까지 성실히 근무하는 직원이네. 꽤나 아끼는 젊은들이지. 제법 오랫동안 지켜봤네. 지난해 겨울, 두 사람을 시내 한 카페로 불러내 만남을 주선했어. 1년 지난 지금 한 청첩장에 두 사람의 이름이 찍혀있으니 내 입이 찢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청첩장에 내이름은 없지만 난 이 청첩장을 고이 간직해둘 작정이야.

 

홈즈 : 그러니까 자네 양복이 두 벌이나 생기게 됐다는 말이군. 하하.

 

왓슨 : 30년을 넘게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일세. 좀 과장하자면 나는 한 세계와 한 세계를 연결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셈이지.

 

홈즈 : 과장이 아니지. 내가 직접 관련이 없는 세계에 뛰어들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위대한 업적이지. 탐정인 나도 그렇다네. 의뢰인들은 나를 찾아와 사건을 의뢰하네. 나는 나와 전혀 관계없었던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평생 관련없을 것 같았던 사건에 발을 들여놓네. 의뢰인과 사건 사이에 내가 끼어들게 되는거야. 사건을 해결할때마다 나도 쾌감을 느끼는 것이고.

 

왓슨 : 듣고 보니 '뭔가를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일'이 좀 있군 그래. 우리가 흔히 에이전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 말이야. 스포츠 에이전트가 대표적이겠지. 스포츠 선수들을 대신해서 그들을 특정 팀에 소개하고, 좋은 계약을 이끌어 내며, 조건이 더 나은 팀으로 이적시키고, 광고 등 후원 기업을 발굴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 많은 일을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들. 하지만 관리하던 선수가 세계적인 스타가 되면 말없이 미소짓는 이들. 크루즈가 열연했던 영화, <제리 맥과이어>는 스포츠 에이전트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어.

 

홈즈 : 에이전트의 삶이라. 그렇다면 며칠 전 읽었던 책, <소설파는 남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지. 어디보자, 그래 여기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신작이 있네. 왓슨, 어떻게 이 책은 자네 서가에 꽂히게 됐을까?  

 

왓슨 : 역으로 추적하면 되겠지. 먼저 난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서 이 책을 배송받았네. 인터넷 서점은 국내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공급받았을 거고. 프랑스어니까 역자가 번역을 했을거고, 편집, 인쇄를 거쳐 출판되었겠지. 프랑스 작가니까 저작권 계약도 했을 거고. 물론 작가가 작품을 집필한 게 제일 먼저일 것이고.

 

홈즈 : 맞네. 자네가 언급한 과정 중에 <소설파는 남자>는 저작권 계약과 관련있네. <소설파는 남자>의 저자는 임프리마코리아의 이구용 상무네. 그의 직업은 출판저작권 에이전트. 좀 생소하지? 그는 해외 작가의 작품을 국내 출판사에 소개하고 국내 작가의 작품을 해외 시장에 내놓는 일을 하지.

  

왓슨 : 조금 더 쉽게 말해 줄텐가?

 

홈즈 : 그러지. 이구용 상무는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이네. 시장은 출판 저작물 시장이고 물건은 소설이지. 국내 시장에서는 해외 작가의 소설을, 해외 시장에서는 국내 작가의 소설을 파는 거라네. <소설파는 남자>에서는 국내 소설의 해외 진출기만 다루고 있네. 국내 작품이 해외 진출로 진출하는 과정을 늘어놓자면 국내 작가의 작품 -> 국내 출판사 -> 에이전트(이구용) - 해외 에이전트 - 출판사 정도가 되겠지. 에이전트가 바로 작가를 관리하기도 하네.

 

왓슨 : 그렇다면 에이전트가 하는 일이 단지 저작물을 '파는' 것만은 아니겠는데.

 

홈즈 : 제대로 봤네. '파는'의 의미를 '최종적인 계약행위'로만 보면 너무 좁은 해석이네. 넓게 봐야지. 왓슨, 계약이 성사되기까지는 적어도 6개월~1년 정도가 걸려.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지속적인 마케팅 전부가 '파는'의 의미네. 국내 저자에 대한 소개 자료, 샘플 번역본은 기본이지. 샘플 번역본 작업을 할 역량있는 번역자를 선정하는 일, 작품을 해외 시장에 소개하는 것이니 만큼 보편성과 독창성을 기준으로 세일즈 포인트를 잡는 일, 해외 에이전트를 설득하는 일,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읽고 해외진출작 후보군을 발굴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다네.

 

 

에이전트는 씨앗을 뿌리는 농부이기도 하고, 꽃가루를 옮기는 벌이나 나비 같은 매개자다. 농부는 좋은 씨앗을 구별해낼 줄 알아야 하며, 벌과 나비는 좋은 꽃가루를 촉각으로 감지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토양에 뿌릴지, 어떤 꽃 위에 날라야 할지 알아야 한다. <소설파는 남자> 11p


 

왓슨 : 기본적으로 언어 역량과 문학에 대한 소양이 필수적이겠군. 대인관계지수도 높아야겠고. 무엇보다 강한 체력이 바탕이 돼야겠는데. 

 

홈즈 : 하하, 왓슨. 체력이 강해야지. 이구용 상무는 수시로 떠나니까. 그것도 미국, 일본, 중국, 유럽으로 말이야. 돌아다녀야 하는 인간들은 체력이 좋으니까 돌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돌아다니니까 체력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나도 사건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으니까. 

 

왓슨 : 그래, 이구용 상무가 성과를 좀 냈나? <소설파는 남자>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겠지?

 

홈즈 : 당연하지.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말이야, 자네가 궁금해하는 해외 진출에 성공한 작과와 작품의 이야기는 1부 '에이전트의 기쁨'에 나오네. 대표적인 케이스는 김영하, 조경란, 신경숙 등이네.

 

미국 아마존닷컴 종합순위(2010년 10월 1일 현재)에서 <빛의 제국>이 종합 판매 순위 227위, '미스터리 & 스릴러'의 하위 분류의 장르인 '스파이 & 음모 스토리' 영역에서는 2위, 그리고 '문학 & 소설'의 하위 분류인 순수문학 영역에서는 38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중략) 2010년 10월 초 현재,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미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 터키, 브라질, 중국, 베트남 등에 판매되었으며, <빛의 제국>은 미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폴란드, 일본 등으로 저작권 수출이 완료되었다. <소설파는 남자> 26-27p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2011년 4월 5일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 전문 출판사 크노프(랜덤하우스 계열)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크노프의 수석 편집자이자 부사장인 로빈 데서는 <엄마를 부탁해>의 초판을 10만부 찍겠다고 선언했다. <출판사 리뷰> 중에서

 



 

2부는 해외 진출 전략을 구상중이거나 세계인의 문학으로는 한계를 드러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 '에이전트의 고민'이네. 하일지, 이기호, 김훈, 김별아 등이 소개되어 있네

 

3부는 가까운 미래에 해외에 소개하고 픈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지. 이름하여 '에이전트의 도전'. 에이전트의 도전에는 아동 청소년 문학에까지 범위를 넓혀 세계 독자에게 선보이고 싶어 하네. 이경혜, 이금이, 황선미, 이외수, 차인표 등이 그들이지.

 

<소설파는 남자>는 격주간 서평전문지 <기획회의>에 1년간 연재됐던 24개의 꼭지를 한 권으로 묶은 것이라네. 이구용 상무는 출판저작권 에이전트의 시각으로 24명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네. 중간 중간 실려있는 해외 에이전트들의 메일과 의견은 읽는 재미와 현장의 박진감을 더해 준다네.

 

왓슨 : 읽어보고 싶군. 홈즈, 그러면 말이야. 이구용 상무의 직업적 보람이랄까, 사명이랄까 이런게 있을 것 같은데. 이를테면 의사인 내가 환자를 치료해서 낫게 하는 것, 탐정인 자네가 사건을 해결하고 진실을 밝혀 내는 것처럼 말일세.

 

홈즈 : 국내 시장에서 출판되는 해외 소설은 엄청나다네. 하지만 국내 작가의 소설이 해외 시장에서 출판되기란 쉽지 않지. 출판저작권을 수출하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인내를 요하지만 이구용은 우리 언어와 정서, 사상과 문화의 서식지를 개척한다는 사명이 있지 않겠나. 국내의 독자들만 만나던 작가가 이구용을 매개로 나라 밖의 독자를 만나 세계적인 문학가로 성장한다면 이것은 그의 보람이겠지. 실제로 이구용은 자신이 저작권을 관리하는 작가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한국문학의 브랜드가 되고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게되는 꿈을 꾼다네.  

 

작품 하나를  당장 어느 나라에 파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1년 후, 10년 후, 그리고 30년 후, 아니 수백 년 후를 내다보고 작업해야 한다. 그것이 정도(正道)다. 세계 독서 시장으로 나가면 그때부터 작가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기 때문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러시아의 톨스토이, 미국의 마크 트웨인, 일본의 하루키라는 식으로 말이다. <소설파는 남자> 34-35p

 

현재 미국 출판 시장에서 해외 출판 저작물 수입은 전체 출판물 중 3퍼센트 안팎에 그치고 있으며, 더구나 해외 문학 수입 비중은 그 중에서도 단 1퍼센트에도 못미치는 상황이니 한국 문학이 그 1퍼센트 내에 진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만하다. <소설파는 남자> 8p 

 

"이구용은 비즈니스로서가 아니라 사명감을 가지고 작가의 작품을 읽고 쓰고 만나고 설득하고 소개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신이나고 자신감이 생기고 나도 모르게 국경 바깥의 독자들에 대해 상상하게 되곤 하는데, 현실을 바탕으로한 그의 치밀한 계획에 신뢰가 가기때문일 것이다." - 소설가 신경숙 

 

왓슨 : 대단하군. 준 외교관 인걸.

 

홈즈 : 외교관 이상이지. 이구용은 프론티어 정신 그 자체네. 우리 문화의 영역을 확장해 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출판저작권 에이전트라는 직업적 측면에서도 그렇고.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보고 많은 젊은이들이 출판저작권 에이전트에 도전하기를 바란다고 했네. 박세리의 LPGA  진출을 보고 자란 세대를 박세리 키드라고 하지. 지금은 LPGA를 평정해버린 박세리 키드. 신지애가 대표적이지. 이구용을 보고 출판저작권 에이전트를 꿈꾸는 이구용 키드들도 나왔으면 좋겠네.

 

왓슨 : 그렇군. 하기야 국가가 부여한 최소한의 사명감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 외교관들의 행태가 '상하이 스캔들'이라는 이름으로 썩은 냄새를 풍기는 지금, 출판저작권 에이전트 이구용의 이야기는 수목원의 나무가 뿜어내는 산소처럼 신선하군 그래.

 

홈즈 : <소설파는 남자>에는 해외 출판물의 국내 소개는 다루고 있지 않네. 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구용이 <소설사는 남자-해외문학 국내 수입 분투기>도 펴냈으면 좋겠네. 그리고 전체적인 출판저작권 시장의 규모, 거래 금액, 해외 에이전트의 사례 등도 몹시 궁금하더군.

 

왓슨 : 참,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구용 상무가 <제리 맥과이어>를 봤는지 모르겠군. 영화 초반부에 제리가 내레이션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제안서의 내용을 독백으로 읊어대는 바로 그 장면. 실제로 제리는 며칠뒤 회사에서 해임당하네만...하여간 이구용 상무가 소설파는 남자로 분투라 할만큼의 노력 끝에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해도 "출판저작권 에이전트는 방대한 작가와 작품보다는 소수의 개성있고 독창적인 작가들에게 진실한 관심을 기울여야하며 정작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네.

 

홈즈 : 자자, 왓슨 이제 나가지. 이야기 저녁 먹으면서 하세.

 

왓슨 : 그러세. 허, 시간이 많이도 지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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