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부득탐승不得貪勝 - 아직 끝나지 않은 승부
이창호 지음 / 라이프맵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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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대전형 전략게임은?

힌트 하나, 중국의 기문(奇聞)·전설집인 <박물지>에는 이것을 요(堯)나라 임금이 만들어 아들 단주에게 가르쳤다고 전해짐. 힌트 둘, 가로 19줄, 세로 19줄이 만든 361개의 교차점. 힌트 셋, 흑과 백. 힌트 넷,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정식종목. 힌트 다섯, 조치훈,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이쯤하면 누구라도 '바둑' 하고 외칠거다. <박물지>의 기록을 인정한다면 바둑의 기원은 수천년 전 중국의 상고시대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바둑은 중국에서 시작됐다고 보지만 근대바둑은 일본에서 정립되었다. 우리나라에 근대바둑이 뿌리내리게 된 것은 한국인 최초, 일본기원 프로바둑 기사였던 조남철 9단의 공이 크다. 1944년 그가 설립한 한성기원은 한국 현대 바둑의 효시가 됐다. 이후 한국에는 많은 프로기사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일본을 뛰어넘지는 못했다.(조치훈 9단이 있었잖아?라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는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기원 소속의 프로기사로 활동했다.) 진정 바둑 강국 코리아의 전성시대는 조훈현 9단과 그의 제자 돌부처 이창호 9단이 열었다.

 

<이창호의 부득탐승>(이하 <부득탐승>)은  한국 바둑을 유래없는 전성기로 이끈 이창호 9단의 30년 기사생애를 정리한 책이다. 그는 만6세 바둑에 입문, 11세 사상 두번째 최연소 프로 입단, 14세 국내 최연소 타이틀(KBS바둑왕전) 획득, 17세 국내 최연소 세계타이틀 획득(동양증권배), 이후 통산 타이틀 140회를 이어간 명실상부 한국 바둑의 절대 지존이다. 이창호의 현재 나이는 37세(1975년생)다.

 

하지만 <부득탐승>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이창호의 타이틀 획득 기록이 아니었다. 타이틀 획득은 그저 그가 바둑을 통해 얻은 부속물처럼 보였다. 오히려 나는 이창호와 조훈현이 맺은 사제지간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고 부러웠다. 또 대국이 끝났다고 바둑이 끝난 것이 아니라 복기(復棋)가 끝나야 바둑이 끝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조훈현의 금연,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 같은 일화를 접하면서 이들은 바둑을 하나의 도(道)로 여기는구나하고 생각했다. 하나씩 살펴보자.

 

이창호 9단은 아홉살 되던 해 스승 조훈현을 만났다. 이때 조훈현의 나이는 서른 둘. '만났다' 보다는 '제자가 됐다'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후 7년 동안 이창호 9단은 조훈현 9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지식을 공급하는 교사는 있어도 지혜와 인생을 가르치는 스승이 부족한 요즘, 난 그들의 관계가 참 부러웠다. 그것은 마치 인류의 성인들이 그들의 제자를 가르칠 때의 장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함께 자고 함께 먹고 묻고 답하며 지혜를 체득했던 교육 방식. 난 내 아이의 좋은 학원을 찾지 말아야지, 좋은 스승을 찾으러 백방으로 다녀야지 다짐해본다.

 

선생님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이끌려 나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바둑을 만난 이후 첫 번째 운명의 순간이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현역 승부사가, 그것도 좁은 노부모를 모신 상황에서 아홉 살짜리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여 숙식을 함께하며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연을 맺은 것이다. -45p

 

내제자(內弟子)란 일본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린 도제(徒弟)제도가 바둑계에 접목된 형태로,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숙식을 함께하며 기예를 배우는 제자를 말한다. -47p

 

스승은 나의 등대였다.(중략) 300국이 넘는 사제대국을 치르면서 하나둘씩 타이틀을 넘겨주고 때때로 허탈하게 쓴웃음 짓던 나의 선생님, 조훈현 9단.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나를 내제자로 받아들인 일을 후회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중략) 실패한 재능처럼 평범한 것은 없고 인정받지 못한 천재는 세상에 널려있다. 그것이 세상사의 이치일진대, 더없이 범상한 내가 선생님이 빌려준 높은 어깨가 아니었다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고자 하는 추동력을 과연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을까.

-109p

 

바둑은 대국이 종료되면 복기(復棋)의 과정을 거친다. 패배의 과정을 되돌아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실패는 더 많은 지혜의 보따리를 풀어 동일한 실패를 거듭하지 않도록 돕는다. 그래서 나는 바둑의 진수는 복기에 있으며 복기가 끝나야 전과정으로서의 바둑 한 판이 끝나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됐다. 독서로 말하자면 리뷰를 작성함으로써 독서를 완성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누가 복기를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실로 현명한 사람들이다.  

 

복기는 패자에게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지만 진정한 프로라면 복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패자가 복기를 주도한다. 복기는 대국 전체를 되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며, 유일하게 패자가 승자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복기는 주로 패자가 놓아보는 돌(질문)에 승자가 놓아주는 돌(응답)의 진행으로 이루어지는데,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한 대화는 짧거나 거의 없다. 말없이 늘어놓은 바둑판 위의 돌이 진짜 대화다. - 194p

 

바둑에는 '복기'라는 훌륭한 교사가 있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  -84p

 

바둑은 승자가 모든 것을 누리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복기만큼은 패자에게 더 큰 미래의 기회를 제공하는 선물과 같은 것...(후략) -217p

 

바둑이 오랜 세월동안 인류 최고(最古, 最高)의 대전형 게임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도(道)가 있기 때문이다. 조훈현 9단은 왜 '무려 24년간 하루 3~5갑씩, 3만 갑 이상 피운 담배를 단번에 끊어버리고 등산 등을 통해 체력을 보강해' 다시 '세계제패를 향해 비상'하겠다는 결단을 하게 됐을까? 조치훈 9단은 왜 교통사고로 '전치 12주의 진단'을 받고 '15시간 30분이나 걸린 대수술'을 하고 난 뒤 일주일 후 '목숨을 건진 것만도 기적'이니 '대국을 포기하라'는 주치의의 권유를 뒤로한 채 '전대미문의 휠체어대국'을 했을까? 그들에게 바둑은 하나의 종교며 의식이다. 바둑 구도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장구한 세월동안 바둑은 바둑판의 경계를 허물고 나와 인생을 깨우치는 도(道)에 이르렀다. 성경의 십계명처럼 바둑에도 '위기십결(圍棋十決)'이 있다. 열 가지의 사자성어로 이뤄진 위기십결의 으뜸은 책의 제목과 같은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를 탐하면 얻을 수 없다.' 책을 덮고 다시 표지를 내려다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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