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 Su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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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써니>는 주인공 임나미 가족의 무미건조한 아침 풍경을 그리며 시작된다. 남편과 딸이 집을 나간 후 햇살 쏟아지는 탁자에 앉아 바깥 세상을 보는 그녀. 무균실의 환자같이 보였다. 임나미는 입원중인 엄마의 병원에 갔다가 투병중인 여고시절의 친구 하춘화를 만난다. 2개월 선고받은 말기암 환자. 영화를 다 보고선 진짜 환자는 춘화가 아니라 나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의 병명은 이름하여 '꿈 상실증'. 꿈을 잃은 사람들은 증세가 악화되면 결국 내가 누군지도 모른채 살아가게 된다. 무서운 일이지만 그걸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나미, 장미, 진희, 금옥, 복희같은 인물들은 이유야 어떻든 꿈없는, 아니 한때 꿈 많았던 소녀들의 대명사다. 치료받아야 하는 건 춘화가 아니라 나미이며 몸이 아픈 '당신'이 아니라 꿈을 잃은 '나'이다. 

 

임나미는 하루에도 수 천, 수 만명씩 오가는 백화점에 가서 남편이 준 돈으로 샤넬 가방을 산다. 혼자 가서 사도 신날까? (우리 아내는 "그걸 말이라고...신나죠." 했다.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 물론 신나기도 할거다. 하지만 좋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 그 이상은 아니지 않을까? 백화점을 드나드는 사람들, 그곳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내가 혼자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곳에 친구가 없기때문이다. 친구란 친밀함을 느끼는 관계다. 그 친밀함이란 친구의 기쁨과 슬픔을 내 것인 양 여기는 감정이고. 써니의 슬로건이 뭐였지?  "우리중 하나를 건드리면 모두를 건드리는 것." 그래, 그게 친밀함이다.가방과는 친밀함의 관계를 맺을 수 없잖아.(뭐 무인도라면 다를테지...톰행크스는 <캐스트어웨이>에서 배구공 윌슨과 말할 수 없이 친밀했으니까...) 

 

한때 'TV는 사랑을 싣고'같은 방송매체나 '아이러브스쿨'같은 인터넷 사이트가 친구찾기를 내세우며 유행한 적이 있었다. 춘화의 마지막 소원도 친구찿기였다. 그녀는 나미에게 여고 시절 써니 멤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친구찾기의 궁극적 목적은 나를 찾는 데 있다. '나'라는 인간은 살면서 내가 관계 맺어 온 친구의 총화니까.  친구찾기가 의미를 가지려면 찾고 난 후의 관계가 훨씬 중요하다. 85년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써니 멤버들의 현재 상황을 보라. 그들이 2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친구가 되기란 쉽지 않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때문이다. 춘화는 다시 만난 친구들에게 그.냥. 살.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되고 싶은 거되라는 말도 덧붙인다. 친구들 앞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을 유산으로 남긴다. "나도 역사가 있는 내 인생의 주인공"임을 상기시키는  춘화는 써니의 '짱'다웠다.(여고생들의 우정과 의리가 이렇게 빛날 수 있다니...)

 

내가 약간 즐거운 흥분 상태에서 말하자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 자체가 꿈같은 이야기야. 그러니까 영화로 만들어진 거고. 현실에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엄청 많은 관객들이 보고 대리만족 느끼는 거 아니겠어. 이건 백마탄 기사 이야기를 약간 변형했다고 보면 돼. 40대 중반의 여자한테 백마탄 기사가 나타날 가능성? 거의 없어. 20대 아름다운 여자라도 그 가능성이란 폐차장에 번개쳐서 태권브이 나올 확율인데 40대 아줌마는 말하면 입아파. 그러니 <써니>에선 하춘화가 '짠'하고 등장하잖아. 몰랐지? 하춘화가 백마탄 기사란걸. 나머지 친구들은 찌질하게 살아가는 부엌떼기들이고. 결혼도 안한 성공한 사업가 친구, 곧 죽을 병에 걸렸지만 여고시절 써니 멤버라는 이유만으로 소원 하나씩 다 들어주잖아. 얼마나 멋있냐. 로또야, 로또. 난 이런 친구 안 나타나나 몰라."(으윽, 확 깬다. 빈정 상하고...) 다 부정할 순 없는 말이지만 아름다운 우정과 의리를 매도하지 말라고 강변하고 싶다.(이 말은 못했다. 간이 작아서...쩝) 

 

80년대를 살아온 여학생들의 우정, 꿈, 현실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는 <써니>. 난 개인적으로 남자들의 우정과 의리를 그린 <친구>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폭력과 살인으로 마무리되는 <친구>를 보면서 우정, 꿈과 같은 말들이 지닌 긍정의 의미를 되새기긴 힘들었다. <써니>는 달랐다. 너무 웃고 즐기다 보니 '<써니>의 앤딩씬이 댄스 연습장이었나'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환하게 웃는 춘화의 스케치 영정을 앞에 두고 'sunny'의 선율에 맞춰 그녀들이 추었던 춤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가 극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의 환희처럼 보였다. 진정한 친구는 살기(殺氣)가 아니라 활기(活氣)를 불어넣는다. 춘화처럼.

 

꿈을 잃은 그대들, 우리 다시 춤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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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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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아내가 물었다. "여보,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할건데요?" 이럴때는 질문과 대답사이에 틈을 둬서는 안된다. 나는 번개와 같이, 빛의 속도로 대답했다. "순장 풍습을 따라야지. 같이 관에 들어갈거요." 아내가 막 웃었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 절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돼요. 나하고 함께 죽는 건 용서해도 먼저 죽는 건 용서못해요!" 그렇다. 결혼은 반드시 사별을 전제하고 있다. 잊고 살 뿐이다. 

 

 나는 아직 배우자를 먼저 잃어버리는 슬픔을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 슬픔은 내가 아내를 사랑한 정도에 비례하리라 짐작해볼 뿐이다.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C.S.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에서 아내 조이를 잃은 슬픔을 비통하게 쏟아놓고 있다. 무신론자로 살아오던 루이스는 32세(1929년)때 유신론자가 됐다. 이후 그는 역사에 남게 될 기독교 변증서 -<고통의 문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예기치 못한 기쁨> 같은 - 를 써냈다. 이들 책에서 늘 하나님 편에 서서 변론했던 루이스는 조이를 상실한 슬픔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지 '하나님이 계시는가'라고 되묻기까지 한다.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 아픔을 표현한 말이지만 아내가 없는 현실을 이보다 더 아프게 인식할 순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렇게 묻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증상이다....(중략) 그러나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 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리고 나서는,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중략)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 <헤아려 본 슬픔> 22p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모든 광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찾아보라고 해도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손길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죽었다. 죽어버린 것이다.

- <헤아려 본 슬픔> 32p

 59세가 될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루이스는 암에 걸린 조이와 병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이들의 극적인 사랑이야기는 <Shadow Land>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강추!) 결혼후 잠시나마 조이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면서 희망을 엿보았던 루이스였으니 슬픔과 절망을 더 컷으리라.

 

 루이스가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헤아려 본 슬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뇌를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 글쓰기는 확실히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루이스는 처음의 슬픔의 장막을 걷어내고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다. 아내 조이를 계속 죽은 자로 애도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대할 것으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우리 결혼에 대해 나는 '너무 완벽해서 지속되지 못했다'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중략)...그러나 또한 이는 '그 나름의 완벽함에 다다랐다. 이루어야 할 만큼 이루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길게 늘일 필요가 없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됐다. 그 과정을 터득하였다. 내 보기에 미쁘다. 이제 다음 연습으로 갈 준비가 되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2차 방정식을 배워서 즐겨 할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거기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다. 선생님은 다음 단계로 옯겨 가신다. 이는 우리가 무언가를 배웠고 성취했기 때문이다. 

- <헤아려 본 슬픔> 74~75p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 게 아니라, 그 다음 표현 양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연인 덕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다음에는 춤의 비극적인 양식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비록 그 육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도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과거와 추억, 슬픔 혹은 슬픔으로부터의 위안, 자신의 사랑 따위를 사랑하느라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헤아려 본 슬픔> 76p

 

우리는 한 몸이었다. 이제 둘로 갈라진 이상, 그것이 완전하고 온전한 체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결혼한 상태일 것이며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리라....(중략)...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어느 민담에 산 자의 애도가 죽은 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다. 죽은이들은 우리더러 제발 좀 그만두라고 말한다...(중략)...어쨌든 내게는 앞으로의 계획이 명백하다. 나는 가능한 자주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갈 것이다. 나는 그녀를 웃음으로 맞이하기조차 할 것이다. 내가 그녀를 덜 애도할수록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 <헤아려 본 슬픔> 81~83p

 이제 조이도 루이스도 죽음의 단계를 넘어갔다. 조이의 표현대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로운 상태'로 영원의 샘으로 돌아간 것이다. 먼저 과정을 밟아간 루이스가 슬픔을 미리 헤아림으로써 나같이 그 단계를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들에게 족보(?)를 남긴셈이다. 앞날에 대한 무지는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던가? 더구나 알지도 못하는 거대한 슬픔의 산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으로 찾아든다면 나는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을 다시 읽겠다. 루이스의 글들이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아내와 나는 '자다가 편안히 함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조이가 말했듯 둘이 한날 한시에 죽어 나란히 누워있는것처럼 간다해도 그것이 이별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겠지만. 만약에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이 먼저 가야된다면 내가 슬픔을 헤아리는 자가 되기를...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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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 - 당신을 위한 글쓰기 레시피
김민영 지음 / 청림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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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전, 블로그를 시작했다. 글을 잘 써 보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때문에. 읽은 책, 본 영화, 들은 강연에 대한 리뷰를 올렸다. 머릿 속에 떠오른 단상, 아들과의 에피소드도 블로그에 남겼다. 글을 올리고 며칠이 지난 뒤 다시 읽어보곤 했다. 낯 뜨거웠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글 잘쓰기로 소문난 블로거들을 찾아 인터넷을 떠돌아다녔다. 세상에는 글 잘 쓰는 인간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뭔가 배워보고자 했다가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였다.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이하 <첫 문장>)는 나처럼 글쓰기 세계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딱 맞는 책이다. 낯선 세계로 가는 길엔 두려움이 앞선다.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붉은 모자로 눈빛을 가린채 윽박지르는 훈련소의 교관이어서는 안된다. 미소를 머금은 컨설턴트가 따뜻한 시선으로 글쓰기 초심자를 맞이해야 한다. <첫 문장>의 저자 김민영처럼 말이다.

 


글쓰기의 절반은 자신감과 용기입니다. 한발만 나아가면 '주위 시선'이라는 장애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거기다 내밀한 경험, 상처, 아픔 같은 소재를 꺼내야 하니, 힘든 일이죠.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거기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이 겪지 못한 나만의 경험을 쓸 수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문턱을 넘어야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기고, 무슨 얘기든 끄집어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죠.
-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 54p

 저자는 어떤 독자가 <첫 문장>을 읽을지 잘 알고 있다. 6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한 문장도 쓰지 못하는 사람, 빨간 펜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 글을 쓰라고 백지를 나눠주면 머리 속이 백지가 되어 버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독자들을 앞에 두고 그녀는 신뢰와 공감을 이끌어 낸다.

 

 비결이 뭘까? 첫째, 진솔함이다. 글쓰기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행복, 꿈, 자신감, 용기 같은 삶의 가치를 쏟아낸다. 그녀의 솔직함 앞에 독자는 무장해제한다. 둘째, 친근감이다. 저자는 여느 독자들처럼 온라인 블로그를 운영하며 이웃블로거들과 교류한다. 또, 글쓰기 강의를 하며 오프라인 수강생들을 만난다. 다가가기 편하다. 셋째, 생생함이다. <첫 문장>에는 저자가 글쓰기 현장에서 만난 초심자들의 사례가 실려있다. 현장의 초심자들은 내 이웃, 내 친구이며 바로 내 모습이다. 넷째, 충실함이다. <첫 문장>은 1단계 글감 찾기부터 13단계 공개하기까지 글쓰기 입문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담아냈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때문에 나도 <첫 문장>을 깊이 신뢰하고 공감하게 됐다. 다른 모든 것을 두고서라도  저자 스스로 글을 쓰면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걸 알겠기때문이다. 저자의 블로그명이 '스윗 도넛'이고 일하는 회사가 '행복한 상상'이다. 도넛의 둥근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달콤한 글 한 편 써낼 수 있지 않을까? 내 글도 반짝반짝 빛나게 되지 않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마음까지 다독이는 글쓰기 입문서,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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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브하트 - Bravehear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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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나'로 살 수 없다. 자본과 재화가 거래되는 시장에서는 인간도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 인간은 철저히 구매자의 기호와 욕구에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쓸모가 없다.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의 욕구'는 끼어들 틈이 없다. 욕구를 상실한 인간은 꿈꿀 수 없는 인간으로 변한다. 꿈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꿈꿀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 몸은 살았지만 영혼은 사라진 인간으로 말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했지만 21세기 현재 '인간은 죽었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난 자주 꿈과 직장의 경계에서 서성인다. 그 경계지역엔 꿈을 좇아 자유의 땅에 도달했다는 사람들의 노래가 희미하게 들린다. 하지만 현실을 버린 직장인들의 피비릿내도 진동한다. 코를 막고 저 자유의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현실은 확성기를 통해 경고방송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어떻게 먹고 살 건지 생각해 보셨나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그래 꿈을 찾아 떠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협박성 멘트는 나를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내 인생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가 '자유'를 외치며 방어선을 구축한다. 든든한 우군이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자유는 대학가서 마음껏 누리고 지금은 죽자 살자 공부할 때'라고 외치는 교주같은 선생님들과 그 말을 경전처럼 따르는 친구들 틈에 있었다. 그래서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었다. 대학에 가서는 잠깐이었지만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고등학교 선생님들께 감사하며 그분들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주어지는 시간은 자유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나는 내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시간의 통제를 국방부에 위탁하기로 했다. 2년 동안 입고 먹고 자고 일어나는 모든 일상이 기계같았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대학생활과는 180도 정반대의 시간관리였다. 육체적으로 고달팠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군복무시절까지 나는 시간과 상황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제대후 그제서야 난 내가 누군지, 뭘 해야할 지 고민하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때 <브레이브 하트>를 만났다.

 

 내가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그 때, 난 무슨 고민을 하든 마지막에 가서는 막연하게나마 '자유로왔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런 내게 <브레이브 하트>는 자유 이야기는 잠시 뒤에 하자면서 정체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는 13세기말 스코트랜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에 용감하게 맞섰던 인물이다. 당시 스코트랜드는 잉글랜드에 빌붙어 주체성을 잃어버린귀족들과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모르는 평민들뿐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설 순 없다.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월레스는 스털링 전투에 앞서 스코트랜드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멋진 연설을 한다. 자신은 '윌리엄 월레스'이고 우리는 '자유인'이며 '목숨을 빼앗을 순 있지만 자유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아직도 스코트랜드를 상징하는 푸른 염료를 얼굴에 잔뜩 바른 월레스가 칼을 빼들고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자기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꿈과 자유로 가는 첫걸음이다. 그것은 내장된 나침반 같은 것이다. 혹 길을 잃어도 방향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돕는 마음 속 북극성이다.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월레스와 자기가 누구인지 왔다 갔다 하는 귀족 브루스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월레스는 어린 시절 소규모 전투에서 아버지와 형을 한꺼번에 잃는다. 그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월레스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자유인이다. 용기를 갖고 꿋꿋하게 살아라." 월레스는 이 말을 평생 가슴 속에 새겼고 그렇게 살았다. 브루스는 귀족 가문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문이 스코트랜드의 왕위를 차지하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문둥병으로 몸이 썩어가던 그는 브루스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조언한다. 때로는 웰레스의 편에 때로는 잉글랜드의 왕 롱생크의 편에 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중립은 미덕이 아니다. 회색의 다른 이름이며 배신의 은신처가 된다. 결국 브루스는 월레스를 배신하고 스스로 자책하는 가롯유다꼴이 되어버린다.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업그레이드되면 자존감과 자신감의 양날개가 생긴다. 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물질에 자신을 팔지 않는다. 그런 일관된 행동은 자신감을 불러 일으킨다. <브레이브 하트> 속 스코트랜드의 귀족들은 롱생크가 주는 황금, 영토, 작위에 눈이 멀어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영혼을 팔아버린 족속들이었다. 월레스는 돈과 명예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 있었다. 요크성을 점령한 월레스에게 롱생크가 이사벨라 공주를 보내 휴전제의를 하면서 작위, 토지, 금을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거절한다. 결국 롱생크의 계략에 빠져 잉글랜드로 잡혀온 월레스는 감옥에서 이사벨라 공주와 재회한다. 비참한 처형을 하루 앞두고 공주는 월레스에게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자비를 구하'라고 말한다. 그 때 월레스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가슴에 담을 대답을 한다. "롱생크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난 이미 죽은거나 마찬가지요....사람은 언젠가는 죽소. 목숨이 붙어있다고 살아있는 건 아니니까(Every man dies, not every man really lives.)"

 

 그래.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살아있다고 산 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마치 동전의 양면인듯 하나가 되어 굴러온다. <브레이브 하트>에는 많은 사람이 죽는다. 대규모 전투신이 많이 나오니까 무지기수로 죽는다.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월레스의 아버지와 형이 죽고, 아내 머론이 죽고,  친구 해머쉬의 부친 켐벨이 죽고 결국 자신도 죽는다. 월레스는 죽음도 삶의 일부로 생각한 것같다. 아버지도 머론도 친구의 부친도 모두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월레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처형되기 직전 감옥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너무나 두렵습니다. 부디 용감히 죽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먼저 간 소중한 사람들이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삶의 끝을 떠올리면 좀 더 진지하게, 좀 더 집중해서, 좀 더 용기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에 맞닿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에 월레스가 '자유(freedom)'를 외치는 순간을 가장 인상깊은 장면으로 꼽는다. 나도 무척 감동적인 장면으로 기억한다. 울컥하고 뭔가 올라오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는 '자유는 주어진다' 라는 믿음을 버리고 '자유는 선언이다' 라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난 내 자유를 누군가가 강탈해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는 내 속에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그 자유를 선언하고 용기를 가지고 자유인으로 사는 것 뿐이다. 투쟁의 결과로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브레이브 하트>의 한 장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월레스와 롱생크가 격돌하는 폴커크 전투 장면. 브루스와 귀족들의 배신으로 처절하게 패배당한 후 죽어가는 해머쉬의 부친 켐벨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 틀렸어. 보내 주거라.....나는 자유인으로 충분히 살았다. 이렇게 장성한 네가 늘 자랑스러웠고...난 행복했단다." 난 월레스와 스코트랜드의 자유는 저 잉글랜드를 정복해야만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로 가는 길 위에 들어선 사람은 누구나 '자유인'으로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벌써 15년 전이다. 방황하던 나에게 꿈과 자유의 메시지를 전했던 <브레이브 하트>의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 가슴 속 나침반을 다시 들여다 본다. 여전히 꿈과 자유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월레스의 기도를 나도 읇조린다. "너무나 두렵습니다. 부디 꿈과 자유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프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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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풀 도감 (양장) - 우리 땅에 사는 흔한 풀 100종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10
김창석 글, 박신영 외 그림, 강병화 외 감수 / 보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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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세상 모든 풀을 '잡초'라고 불렀다.

 

지난 해 3월, 두 돌을 지난 아들 녀석은 찬기운이 물러가자 저녁마다 산책을 나가자며 졸랐다. 그리곤 산책길에서 처음보는 풀, 꽃, 나무를 만날 때마다 '아빠, 이건 뭐예요?' 라며 줄기차게 묻기 시작했다. 꽃과 나무는 그래도 반쯤은 이름을 대 가며 답해 줄 수 있었지만 풀은 달랐다. 가지 수가 많았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는 대부분 낯익은 풀들이었지만 강아지풀, 토끼풀, 괭이밥 말고는 모두 '잡초'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다. 내 머릿 속에는 풀들의 이름이 없었다. 나의 순수한 무식함과 뻔뻔스런 오만함이 세상 모든 것에 막 관심을 가지고 선의로 다가서는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중지능이론이 퍼뜩 떠올랐다. 80년도 초반 하버드대학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지능지수(IQ)만으로 인간의 지적능력을 측정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중지능이론을 발표했다. 즉, 과거의 지능지수 측정이 언어, 공간, 논리수학영역으로 한정되었다면 가드너 교수의 다중지능이론은 인간친화, 자연친화, 자기성찰, 음악, 신체운동까지 포함하여 8가지 영역의 지능이 복합적으로 관련되면서 인간의 지적 능력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부모라면 자녀가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모든 영역에서 지적 능력을 고르게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건 의무라고 해야할 것이다. 아들 녀석의 자연친화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순 없었다.

 

풀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당연히 책을 스승삼았다. 내게 풀 이름을 가르쳐 준 책,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풀 도감>(이하 <풀 도감>)이다. <풀 도감>은 우리 땅에 사는 흔한 풀 100종을 세밀화로 그려 생김새와 한살이를 설명해주는 풀 그림 사전이다. 사진이 아닌 세밀화로 그려진 풀들에서는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 풀내음도 막 나는 것같다. 책 맨 앞에는 쉽고 빠르게 찾아볼 수 있도록 '그림으로 찾아보기'를 붙여놓았다. 또한 식물은 생김새에 따라 어떻게 분류되는지, 어떤 한살이의 과정을 거치는지를 개괄하고 있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하나 하나 소개하기 시작한다. 숲을 본 다음 나무를 보는 것같다. 친절한 책이다. 

 

어릴 때 풀 이름을 몰라서 맘대로 이름을 붙였다. 계란 후라이가 연상돼 계란꽃이라고 불렀던 개망초, 기는 줄기로 땅바닥을 완전히 감싸고 있어 뱀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아 뱀풀이라 여겼던 환삼덩굴, 나팔꽃을 닮아서 작은 나팔꽃으로 알았던 아기메꽃, 강아지풀이 너무 커서 변형된 강아지풀이라 의심했던 수크랑. 나는 한 동안 아들 녀석과 함께 '잡풀'의 감옥에 갇혀있던 풀들을 의미의 공간으로 탈출시켰다. 재미가 쏠쏠했다. 

 

이제 주변의 풀 이름이 궁금해질때마 나는 <풀 도감>을 펼친다. 도감을 펼쳐 풀의 정체를 확인하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이 세상 존재들의 '다양성'을 용감하게 말살해 왔는가를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 단 한사람도 '그냥 인간'으로 불릴 사람은 없다. 한 사람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독특함은 셀 수가 없다. 우리는 그 다양함 속에서 '특별하고 유일한 그 누구'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나비를 '그냥 나비'라고 부르는 것은 나비에 대한 모욕이 되는게다. 굴뚝나비, 배추흰나비, 처녀나비, 모시나비, 표범나비, 유리창나비, 지옥나비, 부전나비...그래서 나비박사 석주명은 국내 240여종의 나비 이름을 불렀다. 곧은 뿌리와 수염 뿌리, 곧은 줄기와 감는 줄기, 그물맥과 나란히맥, 통꽃과 갈래꽃이 다르다는 사실이 자명한데도 난 그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름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지 못하니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잡풀', '그냥 풀'이라 했다. 세상에.

 

걸어서 하는 아침 출근길, 아들과 함께하는 저녁 산책길에 이제 쇠뜨기, 지칭개, 참새귀리, 새팥, 흰명아주가 인사를 한다. 친한 친구가 확 늘었다. 아들 녀석 가르치려다 내가 배웠다. 세상에 '그냥~'은 없다. 세상 모든 풀은 이름이 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이 가슴에 환하게 울려퍼진다.

 

"사물에도 인간과 똑같이 이름이 있다. '창가의 꽃'이 아니라 '창가의 제라늄'으로 묘사하는 편이 훨씬 좋다. '제라늄'이라는 단어 하나가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한 영상을 만들어 내고, 우리가 그 꽃의 존재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도와 준다.....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마음속 흐릿한 부분이 선명해지면서 이 지상의 삶에 튼튼한 줄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내가 아는 식물들인 산딸나무나 개나리를 보면 그 장소에 더 깊은 친근감을 느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 줄 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쾌한 증명인 것만 같다."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120~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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