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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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슨이 홈즈에게 책 한 권을 건낸다)

왓슨 : 홈즈, 자네였다면 '안'의 은신처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텐데...읽어 보게.

 

홈즈 : <생강>이라. 표지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안'이 주인공인 모양이지. 추리소설인가?

 

왓슨 : 하하, 그건 아니고.

 

홈즈 : 그런데?

 

왓슨 : 내일 저녁에 자네 사무실에 올테니 그때 다시 얘기하지. 

 

홈즈 :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지, 그냥 책만 주고 가는겐가?

 

왓슨 : 자리에 앉아 커피마실 기분이 나지 않아. 찬바람 좀 쐬야겠어. <생강>, 그 책이 날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거든.

 

홈즈 : 사람 참, 책 한 권 가지고 뭘 그러나?

 

왓슨 : 하여튼 난 지금 그렇네. 내일 보세.

 

(다음날)

 

홈즈 : 왓슨, 어서 오게.

 

왓슨 : <생강> 맛이 어떻던가?

 

홈즈 : 천운영이란 작가 대단해. 첫 장을 펼치자마자 다짜고짜 취조실로 데려가더니 생생한 고문현장을 보여주더군. 영상을 뛰어넘는 작가의 묘사글이 뇌리에 '공포' 두글자를 완전히 각인시켜주었네. 

 

왓슨 :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작가가 묘사한 첫 장면인 취조실에서는 내가 피해자가 되어 고문당한 느낌이었지. 공포와 수치심이 엄습해왔네. 입과 코로 들어온 물이 몸의 모든 구멍으로 다시 솟구쳐 나왔네. 전기로 몸을 지질땐 내 몸이 타들어가는 듯 소름이 돋았고...

 

홈즈 : 조금만 먹어도 싸한 맛이 오래가는 생강을 씹은 것처럼 독자의 머리속에는 짧지만 강력한 한 번의 고문장면이 작품의 끝까지 사라지지 않지. 80년대 소위 민주투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던 한 고문기술자의 실화에 허구가 덧입혀진 만큼 고문이야기가 많이 나오리라 예상할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였네. 작가가 독자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이지.

 

왓슨 : 작가가 '안'과 '선' , 두 주인공의 목소리로 작품을 이끌어 간 덕에 독자는 입체적 접근이 가능하게 됐지. 어떻게 아버지 '안'과 딸 '선'이 같은 공간, 같은 대상, 같은 시간을 다른 공간, 다른 대상, 다른 시간으로 이해하게 되는지 말일세.

 

홈즈 : 그렇지. 이왕 작가를 칭찬하는 김에 하나 더 보태볼까?

 

왓슨 : 뭔가?

 

홈즈 : 역사를 문학으로 되살려놓은 작가의 역량에 박수를 보내고 싶군. 이 고문기술자의 이야기는 자칫 현대사에서 군부독재의 그늘에 가려질 뻔했거든. 짐승같은 한 인간의 폭력 행위가 남겨놓은 상처는 아직도 시퍼렇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네.

 

왓슨 : 홈즈, <생강>은 그런 시대의 폭력과 상처도 보여주지만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이야기도하고 있네.

 

홈즈 : 들어볼까, 왓슨.

 

왓슨 : 홈즈, 우정이 얼마나 힘이 있을까? 자네와 나의 우정은 어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유지시켜줄 수 있을까? 사랑은 얼마나 강력할까? 사랑이 과연 모든 허물을 덮을 수 있을까?

 

홈즈 : 우정과 사랑?

 

왓슨 : '안'의 딸, '선'의 이야기네. 선이는 진이라는 오랜 친구가 있지. 대학생이 되면 심장뛰는 일, 청년들이 해야 할 일,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던 진이. 그 진이의 생각마저 자신의 것인양 공유하는 선이. 둘은 어릴때부터 다락방이라는 은밀한 공간에서 순정한 우정을 쌓은, 두말이 필요없는 절친이었네.

 

홈즈 : 음, '안'의 실체가 신문지상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자 우정에 금이 갔지.

 

왓슨 : 그래, 맞네. 금이 간게 아니라 끝장이었지. 선이 아버지가 '안'이라는 사실은 우정이 뛰어넘지 못하는 장애물이었네. 심지어 함께 보낸 모든 우정의 순간들마저 소름끼치고 수치스러운 시간으로 바꾸어놓았어. 홈즈, 안이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강도나 살인자였어도 진이가 선을 동정하지 않았을까? 안이 부정부패 사범이었어도 우정이 힘을 잃어버렸을까? 우정의 유지와 박탈의 경계는 어디란 말인가? 내가 짓지 않은 죄때문에 왜 내가 심판받고 나의 진정성을 의심받아야 하나?    

 

홈즈 : 그건 관계 자체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진이는 선이와의 관계를 끊어서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은 걸세. 선이와는 그냥 좀 아는 관계다,  친하지 않다, 관계가 없다는 걸 증명한 셈이지. 선이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모든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다는 나름의 판단을 하지 않았겠나?

 

왓슨 : 일리가 있군. 다음음 선이의 또 다른 무기 사랑일세. 말이 아닌 집안 꼴에도 선은 '민'을 만나 대학생활의 활기를 찾지. 민을 사랑하게된 선은 민에게 사랑고백과 동시에 '안'이 아버지라고 밝힌다네. 사랑하는 사람에게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고 스스로 위로해보지만 그건 또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낳지. 자물쇠를 잠근 후 열쇠를 잃어버린 꼴이네. 아름답고 순결한 첫사랑의 죽음. 홈즈, 사랑은 왜 그렇게 힘이 없는겐가?

 

홈즈 : 자네 말대로 선이의 우정과 사랑은 힘이 없구만. 비교해볼까? '안'이 몸담았던 조직의 의리나 안의 아내가 보여주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말이야. 

 

왓슨 : 그렇게 비교하는 것도 참 생강같군. 씁쓸하네. 안이 충성했던 조직의 의리와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남편을 숨겨주는 아내의 사랑이라... 불가사리의 썩은 발 냄새가 나. 어딘지 모르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듯하네.  

 

홈즈 : 생강같다... 그 말 당분간 자네와 나 사이에 유행어가 될 듯 싶네. 

 

왓슨 : 홈즈, 자신의 우정과 사랑을 죽음으로 내 몬 사람이 아버지라면 자넨 그 사람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 정의롭고 용감한 아버지, 음모에 빠져 누명을 써 위험에 처한 아버지, 아름답고 자상한 아버지가 사실은 잔인한 괴물이라는 걸 알게 됐다면 말일세? 복수의 화신이 되지 않겠나? 선이 남자였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르네.

 

홈즈 : 비밀을 알아 버린 것, 그리고 비밀을 말해 버린 것 그게 선이의 죄네. 비밀은 때론 폭력이 되고 때론 짐이 된다는 걸 선은 뼈속 깊이 깨닫게 됐지. '안'이 그냥 사라져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참 이기적이야.

 

왓슨 : 그냥 사라져? 웬걸? 뻔뻔스런 '안'의 행각을 보게. 딸의 가장 은밀한 공간, 다락방을 떡하니 차지해버린다네.

 

홈즈 : 다락방이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 다락방은  비밀스럽고 은밀하지만 따뜻한 추억과 행복한 순간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공간이네. 꿈꾸는 다락방이지. 하지만 <생강>에서는 폐쇄적인 공간, 파괴의 공간, 갈등의 공간으로 사용되네. 내겐 새로운 경험이었지. 다락방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구나하고 생각했네. 이것 역시 작가의 힘 아니겠나?

 

왓슨 : 안이 선의 다락방에 은신하면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 선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네. 무려 10년 남짓일세. 꽃다운 20대를 고스란히 말이야.

 

홈즈 : 정말 안타깝지. 선이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앗아간 거야. 그런데도 안은 선이의 과거가 사라지고 현재가 경원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딸과 거래를 하지. 그것도 다락방에 있는 딸애의 추억상자들을 가지고서. 그 세월동안 선이는 아버지를 재발견한다네. 짐승같은 '안'을 말이야.

 

저것은 내 아빠가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다. 침을 질질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성난 짐승이다.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 잡아다놓은 썩은 고기다. 눈알이 빠지고 내장이 파헤쳐진 먹다 남긴 고깃덩어리. 아니다 저것은 썩은 고기에 달려드는 파리떼다. 윙윙윙윙 더러운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아니다. 저것은 파리가 까놓은 구더기다. 살을 뚫고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징그러운 구더기다. 썩은내가 난다. <생강> 176p

 

왓슨 : 하지만, 홈즈, 선이가 모든 사람들과 단절되지만 유일하게 맺어가는 관계도 있어. 죽어라는 법은 없나봐.

 

홈즈 : 아, 그 남자. 매일 레코드 점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말이지?

 

왓슨 : 그래, 홈즈. 아이러니지. 안의 고문 피해자였던 그 남자가 선이를 공포에서 해방시키잖나?

 

홈즈 :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네. 선은 남자로부터 안이 저지른 짐승같은 짓을 듣고 자신의 몸에 새겨넣지. 그제야 선도 남자도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네. 괴롭고 힘들지만 진실에 맞서야 하네. 아프지만 외면하지 말아야지.    

 

남자는 떠났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라디오 소리도 사라지고 남자의 목소리도 지워진다. 내 몸에 연결된 무수한 줄들이 툭툭 소리를 내며 끊어진다. 손목에 채워졌던 줄도, 발목을 붙들었던 줄도 한번에 끊겨나간다.(중략) 공중에 떠 있던 몸이 서서히 바닥에 내려앉는다. 무중력의 공간에서 돌아온 내 몸은 전보다 조금 차가워지고 조금 가벼워져 있다. <생강> 188p

 

왓슨 : 사실 딱 까놓고 말해서 안이 모든 죄값을 치러야하네만 동시대를 산 우리의 책임은 없을까?하고 생각해보게 되네. 어제 독재에 깊은 침묵으로 방관했던 자, 오늘 부정에 두눈 꼭 감는 자에게 내려치는 작가의 죽비 소리를 들어보라구.

 

비겁하다. 진짜 나쁜 사람은 당신 같은 사람이다. 강한 사람한테는 꿈쩍도 못하면서 약한 사람한테만 신경질 부리는 사람. <생강> 181p 

 

홈즈 : 정말 언중유골이군. 가슴깊이 새겨 둬야겠어.

 

왓슨 : 자네 <생강>의 주인공 '안'의 모델이 된 이근안은 지금 실제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홈즈 :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봤네. 생뚱맞게도 목사가 됐더군.

 

왓슨 : 홈즈, 알고 있구만. 난 그 사람이 목사가 된 게 몹시도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안하네.

 

홈즈 : 수 많은 사람들에게 물고문을 했던 사람이 물세례를 베푼다고 생각하면 불쾌할테지. 또 숱한 사람을 불구로 만든 자가 병자들을 치료했던 예수를 입에 올리며 설교한다면 몹시도 불편하겠지. 그런데, 왓슨, 불안하다는 건 이해가 잘 안되는 군. 이제 우리가 발톱빠진 반달곰, 힘없는 늙은 기술자가 뭐 겁이나서 불안해야한단 말인가?

 

 

혀는 거짓말을 일삼고 몸은 과장을 좋아한다. 눈빛은 정직하다. 눈빛은 거짓말을 못한다. <생강> 15p

"...그런데 아빠가 아무 걱정 말라더라? 먹고살 궁리는 다 해놨다고. 걱정은 하지도 말래." <생강> 278p

 

왓슨 : 홈즈, 혹시 '안'이 다른 기술을 연마하진 않았을까? 불안하네.

 

홈즈 : 다른 기술?

 

왓슨 : 얄팍한 간증과 과장된 눈물로 자신의 죄를 덮고 진실을 왜곡하는 설교 기술말이야. 반달곰, 장의사집 둘째아들, 고문기술자, 관절빼기의 달인, 인간백정으로 불리던 그가 정말 목사로 불리게 될까 불안하단 말일세.

 

홈즈 : 왓슨, '안'은 10년 넘게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다락에 숨어지냈네. 사실상 스스로 갇힌 셈이지. 그리고 수년간의 복역도 마쳤고. 한 인터뷰에서 '안'은 교회를 차리고 설교를 하기 위해 목사가 된 건 아니라더군. 제소자들을 위한 교정선교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했다네.

 

왓슨 : '안'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네. 그건 '안'도 잘 알고 있을걸세.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게임이 종료될 걸 예감한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건 '신'이었네. 왜 성경이 '안'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단 말인가?

 

홈즈 : 진정하게, 왓슨. 그건 우리의 영역이 아니네. 자네가 말했던대로 인간은 누구를 용서할 수 없네. 어떤 인간이 죄의 경중을 측정할 수 있단말인가? 죄의 경중을 측정할 수 없는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나? 삶의 막바지에 신의 품으로 뛰어들어간 '안'을 그냥 내 버려두게. 

 

왓슨 : 알겠네. 우리 모.두.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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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5-24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곡 형식이라서 독특하고 참신했어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BOOK소리 2011-05-25 17:17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님 반갑습니다. 독특, 참신..고맙습니다.^^ 이제 내용을 더욱 알차게 꾸려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