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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게임 - Perfect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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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화

박희곤 감독의 <퍼펙트 게임>은 야구계의 전설이 된 최동원(2011.9.14 사망)과 선동열(현 기아 타이거즈 감독)의 맞대결 경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1987년 5월 16일 롯데와 해태의 선발투수로 나서서 연장 15회까지 4시간 56분간의 혈투를 치러 한국 야구사의 불멸의 명장면을 완성했다.

 

 

2. 영화

 한마디로 멋진 작품이다. <퍼펙트 게임>은 당시의 야구와 관계된 분위기를 완벽에 가깝게 살려내고 있다. 롯데와 해태의 라이벌 관계, 프로야구단의 팀 분위기, 두 팀 팬들의 광기, 프로야구를 이용해 지역감정을 부추겨 보려는 정치권의 음모, 최동원과 선동열의 보이지 않는 경쟁, 벤치 멤버의 애환까지 챙기고 있다. 두 전설적인 투수가 벌이는 한 경기에 집중하면서 스포츠 영화가 그렇듯 웃음과 눈물이라는 감동도 빠지지 않고 곁들였다.

 

 

3. 전율 - 첫 장면, 1981년 대륙간컵 야구대회 결승전

 최동원은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자기 경기에 대한 책임감은 말할 수 없이 높았고 그것은 때때로 독기로 비치기도 했다. 1981년 대륙간컵 이틀을 거푸 선발로 던지고도 최동원은 결승전 등판을 대비하고 있다. 찢어져버린 손가락의 벌어진 틈에 순간접착제를 부어 봉합하는 장면, 전율을 느끼게 하는 오프닝이었다.

 

 

4. 흠모 또는 트라우마 - 선배 최동원을 롤모델로 삼는 선동열

 대륙간컵에서 선동열은 최동원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보며 자신도 최동원 선배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락커에 그 기사를 붙여두고 흠모한다. 하지만 선동열에게 최동원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 또는 돌아서 지나야 할 산이 된다. 그 시대는 둘의 맞대결 보길 원했다. 야구선수들도, 팬들도, 언론도, 정치권도 모두. 선동열이 모든 것에서 최동원을 앞서지만 '독기'가 없다던 감독도 선동열과 최동원의 맞대결을 허락한다. 선동열은 마침내 락커에 붙은 최동원 선배같은 선수가 되고싶다던 그 기사를 뜯어낸다.

 

 

5. 눈물, 감동 - 박만석(마동석 분), 벤치 멤버의 꿈

 그 시절 프로야구는 있었지만 프.로.야.구.선.수.는 드물었다. 군사정권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는 시작됐다. 대기업은 울며 겨자먹기로 적자일 수 밖에 없는 프로야구단을 창단했다. 몇몇 특급 선수를 제외하고는 생활마저 불가능한 프로야구선수. <퍼펙트 게임>에서 해태의 벤취 포수 박만석은 이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프로생활 시작하고도 한번도 경기 출장이 없는 선수, 연봉 300만원으로 가족 부양은 꿈도 꿀 수 없다. 치킨집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아내와 선동열의 사인볼을 원하는 아들. 아무리 깜깜해도 꿈의 스위치를 내릴 순 없다. 슈퍼스타 최동원과 선동열의 맞대결 경기, 감독은 교체포수로 박만석을 투입한다. 9회말 투아웃 1:2로 해태의 패색이 짙은 상황, 박만석의 타석. 해태의 모든 선수와 팬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순간 박만석은 헬맷이 벗겨질 만큼 크게 헛스윙을 한다. 떨어진 헬맷 속에 붙어 있는 가족 사진. 다시 헬맷을 고쳐 쓴 박만석은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에게 솔로 홈런을 날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공은 둥글고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다.

 

 

6. 음모 - 스포츠를 이용하는 추잡스런 정치권

 <퍼펙트 게임> 속 등장하는 정치인들. 그들이 당시 최동원과 선동열의 경기를 정치에 이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정황상 프로야구를 통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국민들을 기만하려 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간다. 1987년 5월이면 노태우의 6.29선언 발표되기 한 달 전이니까 말이다. 하여간 그들은 당시의 경기가 무승부로 끝난 것이 아쉬웠을 것이다. 한 쪽이 이겨 소요가 커지기를 내심 기대했을테니까.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던 국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한 가십거리가 되기를 원했겠지만 전설의 두 스타만 만들어냈을 뿐이다.

 

 

7. 명언 - '일구일생, 일구일사'

 최동원이 경남고 재학시절 그를 키워준 스승이자 감독이 남긴 가르침은 '공 하나에 살고 공 하나에 죽는다'라는 의미의 일구일생 일구일사였다. 최동원은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새겨 지켜냈다. 야구든, 축구든, 노래든, 글쓰기든 생과 사를 거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감독은 최동원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데 훈련이 끝나고 라면을 함께 먹으며 이런 말도 한다. "다이아몬드는 처음부터 빛나지 않고 갈고 닦아야 우리가 보는 그렇게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로 다시 태어난다"라고. 야구장의 내야를 다이아몬드라고 부른다. 최동원은 그 내야의 중심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었다.  

 

 

8. 거짓말 - 무쇠팔, 고무팔

 언론과 팬들은 최동원을 향해 무쇠팔이라고 불렀고 선동열을 향해 고무팔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최동원은 선수시절 그 어느 누구보다 완투능력이 뛰어났다. 한 번 던진 경기는 끝까지 책임진다는 영화 속 대사가 말 그대로 진실이었다. 하지만 오른쪽 어깨에 흉하게 남은 선명한 수술 자국과 수시로 병원을 찾아 진통제를 맞으며 공을 던지는 최동원. 손가락이 찢어지고 야구공에 피를 묻혀가며 끝까지 공을 던지는 선동열. 누가 이들을 무쇠팔, 고무팔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망신창이가 된 육신을 다 태운다면 혼신을 다했던 그들의 열정만 고스란히 남지 않을까?

 

 

9. 명장면과 사족 

 최동원과 선동열의 경기가 15회말로 종료된 순간, 최동원은 다시 홀로 당연하다는 듯 마운드에 올라 공을 잡는다. 그때 팀 동료 김용철(조진웅 분)이 한 마디 한다. "야, 너 뭐하냐? 경기 끝났어, 임마."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며 텅 빈 그라운드에 홀로 선 자신을 발견한다. 이 장면은 최동원이 어떤 마음으로 경기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 장치였다. 이렇게 끝났다면 좋았을 걸. 뱀다리들이 덕지덕지 붙기 시작한다. 팬들이 다른 편 투수의 이름을 연호하는 가운데 경기장 안에서는 개와 원숭이 같았던 양팀의 선수들이 악수를 하고 화해하는 장면들이 꽤 오래 삽입되어 있다. 할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편집해내고 싶은 부분이다.

 

 

10. 배우들 - Goooood!

 조승우와 양동근의 연기는 실제 인물들의 사투리와 투구폼, 습관을 어색하지 않게 잘 표현해내고 있다. 마동석, 조진웅, 현주니 등 조연급 연기자들- 의 맛깔나는 연기도 일품이다. 이들 때문에 엄청 웃었다.

 

 

11. 기대감

 <퍼펙트 게임>의 성공은 <퍼펙트 게임2>, <퍼펙트 게임3>의 제작을 불러 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최동원의  84년 한국시리즈 4승 신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도전과 성공, 이승엽의 56호 홈런 기록처럼 한국프로야구에는 영화화 소재가 여전히 많다. 국내 최대규모의 야구팬들이 그대로 극장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2011년 한국프로야구 누적관중수는 680만을 넘었다. 사상최대다.나는 영화를 보며 2012년 한국프로야구는 올해보다 더 흥행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박찬호, 이승엽의 국내 복귀는 구름관중을 모으며 사상 최초 700만 관중을 가볍게 뛰어넘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했다. 영화와 야구의 선순환 시대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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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웨이 - M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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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김준식(장동건 분) 너무 많이 달렸어. 적당히 달려야지. 경성에서 노르망디까지 징하게 달렸네. 스토리도 없이."

 

 <마이웨이>는 한 장의 사진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노르망디 해변에서 연합군의 신문을 받고 있는 조선인. 그는 독일군복을 입고 있다. 감독이라면 강한 호기심이 일었을 것이고 작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누르기 힘들었을 터. 하지만 영화로 다시 태어난 그 독일 군복의 조선인은 수많은 전쟁장면만 찍어대다가 죽는다. 작품 만드느라 애쓴건 알겠는데 수고했다는 말을 못하는 심정이었다. 가족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도, 연인에 대한 가슴시린 사랑도, 조국에 대한 투철한 애국심도 없다. 일단 감동은 둘째치고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의 스토리가 극히 약하고 사건의 개연성이 너무 부족해서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조선인 마라토너 김준식과 일본인 하세가와 타츠오(오다기리 조 분)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애증의 관계를 이어가고 결국 화해로 마무리된다. 전체 설정은 좋은데 그 격동의 시대를 모두 다루려 했다는 것이 문제다. 중국, 소련, 독일을 거쳐 프랑스 노르망디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무려 12,000km다. 오로지 전투신에만 올인한 이유가 뭘까? 스펙타클도 한두번이지 한 영화에서 무려 4번을 보니 지루하다.

 

 또 전지적 작가 시점의 등장이 불편했다. 일본군 장교로 소련군과 전쟁하던 중 타츠오가 후퇴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권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중에 타츠오는 포로가 되어 소련군으로 독일군과 전투에 투입된다. 이때 타츠오는 소련군 장교가 후퇴하는 아군 병사들을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관객이 직접 타츠오의 과거를 오버랩시키며 뭔가를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감독은 그 장면을 굳이 교차편집해서 오버랩시키는 친절을 베푼다. 마지막 장면에서 타츠오는 준식의 이름을 달고 마라톤에 참가한다. 앞뒤의 정황으로 충분히 관객이 찾아낼 수 있는 마지막 감동마저 어린 시절 준식과 타츠오가 처음 만나 순수하게 달리기 시합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앗아가 버린다. 씁쓸하다. 

 

 아쉬움이 크다보니 또 눈에 거슬리는 부분하나 더 지적질하자면 저격수로 등장하는 판빙빙이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장면이다. 여자 저격수가 딱총 하나들고 전투기 한 대를 잡는 장면은 람보를 연상시켰다. 람보는 그래도 기관총이었는데. 적당히 했어야 했다. 

 

 뭐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노르망디에서 재회한 준식과 타츠오가 나누는 대화 장면, 준식이 타츠오에게 대충 이런 말을 한다. "여기서 경성까지 얼마나 걸릴까? 우리 너무 멀리까지 왔지?" 나는 내가 대사를 받아치고 싶었다. "그래, 동건아 너무 멀리까지 왔어. 이건 아니잖아. <친구>에서처럼 부산 자갈치 시장바닥이나 적당히 뛰었어도 되잖아? 하여간 애썼다."

 

 

 

 <마이웨이>를 보면서 작품을 이끌어 가는 건 인물보다 스토리라는 걸 더 절실히 느꼈다. 서사의 힘, 그게 있어야 한다. 같은 사진을 모티프로 한 소설들이 있다. 조정래의 <사람의 탈>, 이재익의 <아버지의 길>, <마이웨이>의 원작으로 알려진 김병인의 <디데이>가 그것이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아버지의 길>을 먼저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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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대만 - Alway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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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과 동시에 남루한 작업복 차림으로 생수를 배달하는 남자 주인공 철민(소지섭 분) 등장, 그는 야간에는 빌딩 주차관리를 한다. 3분후 여자 주인공 정화(한효주 분) 등장, 재고 빼고 할 것 없이 철민과 만난다. 관객의 인내를 테스트하지 않는다. 빠른 전개. 좋다.

 

그런데 어라, 여주인공 정화가 앞을 못본다. 얼씨구, 철민의 전직은 권투 선수네. 아이쿠, 철민은 고아에, 정화는 사고로 부모잃고 혼자 살고. 아하...치명적인 병이 있는 여자 주인공, 삶이 고달픈 전직 복서라~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은 가을의 최루성 러브 스토리. 걱정이 앞섰다. 이럴 때 쓰라고 이런 말이 있다.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

 

그래도 혹시나, 끝까지 봐야지. 맙소사, 이젠 운명의 장난질까지 더해지다니. 영화같은 이야기가 영화 속에 펼쳐진다. 잘 나가던 복서에서 '빚 대신 받아주는 사람'으로, 그러다 사고치고 학교(?)까지 다녀와 비루한 생을 계속하는 철민. 철민이 친 사고와 정화네 가족의 사고가 바로 하나로 엮여있다는 비극적인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완성된다는 또 하나의 믿을 수 없는 사실.

 

뭘 믿고 송일곤 감독은 이런 뻔~한 이야기를 또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낸 걸까? 곁에 있다면 묻고 싶다. "감독님, 이 영화가 관객동원에 성공할 것 같습니까?  가을마다 간직해야 할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신념때문인가요? 소지섭과 한효주의 네임 밸류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인지요?" 라고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은 11월 현재 <오직 그대만>의 관람관객수는 100만을 넘었다. 오 마이 갓!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감독을 만나 물을 수 없다면 내 스스로 흥행의 이유와 영화의 의미를 찾는 수 밖에.

 

먼저, 관객이 돈을 내고 표를 사도록 하려면? 그래 배우의 네임 밸류, 무시할 수 없다. 또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들의 입소문도 좋아야 하고. 하지만 실패하지 않을 만큼만 관객을 확보할 수 있는 소재가 있다면? 일단 영화를 시작할 수 있다.

 

'가을 사랑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사랑을 기대하는 청춘들, 지금 사랑을 진행중인 연인들, 뜨거운 사랑의 경험이 있는 중년들, 가슴 아픈 사랑의 상처를 가진 남녀들, 다시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그 누구에게라도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소재. 성공을 장담할 순 없지만 실패의 확률을 확 줄일 수 있는 소재. 

 

<오직 그대만>은 '사랑과 관련된 관객'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마치 새로 나온 커피에 호기심을 가지고 맛 보기에 나선 커피매니아들처럼 영화가 뿜어내는 진한 사랑의 향기에 '괜찮네' 라는 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나도 그렇게 영화를 보게 됐으니까.

 

왜 관객들은 '괜찮네' 라는 평을 내놓았을까?.(완전 주관적인 견해로)  이유는 두 가지다. 군더더기 없이 신속한 사건 전개와 주제 집중도. 따라서 관객은 영화에 몰입할 수 있고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고 본다. 관객이 집중한다는 건 그만큼 영화의 완성도가 높다는 뜻이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뭘 보고 나온건지 생각나지 않는다면 만 원도 안되는 관람료가 아깝기 마련이니까. 하여간 <오직 그대만>은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잘 직조해서 관객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주제도 제목처럼 오직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다. 만약에 영화가 정화와 철민의 '사랑'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정화를 범하려했던 직장 상사 마팀장(김정학 분)의 이야기를 좀 더 전개했다면? 직장내 성희롱, 불륜, 장애인 인권 문제로 접근해가지 않았을까? 또 철민이 격투기로 재기에 성공했다면, 그래서 링에서 자신을 칼로 찌른 민태식(윤종화 분)을 통쾌하게 복수했다면?(영화를 본 남자들은 그랬으면 하고 바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줍잖은 액션이나 헝그리 스포츠 영화로 흐르지 않았을까? 곁가지를 사족처럼 달지 않고 두 주인공의 사랑이야기에 집중한 송일곤 감독에게 박수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영화의 의미를 찾아야 하니까.

 

<오직 그대만>은 '눈뜬' 동시에 '눈먼' 이야기다. 무슨 소린고? 자, 들어보시라. 정화는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어버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다. 철민은 세상에 대해 마음을 닫아버렸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영혼, 그 또한 장님이다. 사랑은 둘을 눈 뜨게 한다. 세상도 보이고 미래도 보인다. 왜냐고? 동시에 그들은 사랑에 눈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는가? 이해가 됐으면 눈뜬 동시에 눈먼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내가 찾은 이 영화의 첫번째 의미는 '사랑은 눈뜨게 하는 동시에 눈멀게 한다' 이다. 

 

<오직 그대만>은 '손' 이야기다. 또 이건 무슨 소리냐고? 자, 또 귀를 쫑긋 세워 들어보시라. 정화는 손으로 세상을 만진다. 만지는 행위는 그녀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대학시절 조각을 전공한 예술가였으며 시력을 잃고는 점자로 책을 보고, 안마로 사람을 읽는다. 철민은 주먹으로 세상을 때린다. 때리는 행위는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복서일땐 상대에게 펀치를 날리고 빚 받아내는 일을 할 땐 채무자를 가혹하게 두들겼다. 만지는 행위는 창조의 행위지만 때리는 행위는 파괴의 행위다. 누가 이길까? 힌트를 주겠다. 정화는 철민의 얼굴을 점자를 읽듯 만질 수 있지만 철민은 정화의 얼굴에 손 끝 하나 댈 수 없다. 내가 찾은 이 영화의 두번째 의미는 '만지는 손이 때리는 손을 이긴다' 이다.

 

<오직 그대만>은 '공간' 이야기다. 진짜 이건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글쎄, 나도 그렇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한 번만 더 들어보시라. 정화는 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는 연립주택에 거주한다. 독서실처럼 칸막이로 구분된 지정석에 앉아 하루 종일 전화상담을 한다. 철민의 세상은 사각의 링, 복역했던 학교(?), 주차관리요원용 콘테이너 박스다. 그들의 공간은 좁고 폐쇄적이다. 어둡고 퀴퀴하다. 사랑이 시작되자 그들의 공간이 넓어지기 시작한다. 철민은 정화의 집을 볕이 잘 들도록 수리해 준다. 정화는 철민을 '사각의 링' 위에서 내려오게 만든다. 마지막 재회의 장면을 보라. 탁트인 공간에서 뜨겁게 포옹하는 그들을 말이다. 내가 찾은 이 영화의 세번째 의미는 '사랑은 넓은 공간, 밝은 공간으로의 이동이다' 이다.  

 

후유, 이제야 맘이 좀 풀린다. 

 

<오직 그대만>을 봐야 할 이유를 묻는 그대에게 이 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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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 - Naoko-winning run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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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가 끝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아보곤 한다. 머리와 가슴에 동시에 각인된 그런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도 영화 제목보다 먼저 떠 오른다. 가령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브레이브 하트>에서 주인공 월레스가 형틀 위에서 "프리덤"을 외치는 장면이 그렇다.

 

머리 속에 후루야마 토모유키의 <나오코>를 단 한 장면만 저장할 수 있다면 나는유스케가 육상부 감독을 끌어안은 채 나오코에게 손을 내미는 바로 그 순간을 선택하겠다. 어찌나 그 순간이 눈부시던지, 이 영화 <나오코>는 바로 이 장면을 찍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믿어버렸다. <나오코>는 그렇게 내 마음 속에 남게 됐다.

 

<나오코>에는 10대의 남, 여 주인공이 등장한다. 먼저 이키 유스케. 일본 남해의 나미키리지마 고교의 달리기 선수다. 일본의 바람(日本海の疾風)으로 불리며 언론의 주목을 받는 100m 유망주지만 정작 본인의 꿈은 '고교역전 마라톤' 출전이다. 아버지 영향이었을 터. 유스케의 아버지 역시 '일본의 바람'으로 불리며 학창시절 유명세를 탓지만 유스케가 초등학교 6학년때 사망한다. 천식 치료차 섬을 찾았던 한 여자아이가 뱃전에서 바다로 떨어지자 유스케의 아버지는 소녀만 구해내고 자신은 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여자아이의 이름은 시노미야 나오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고등학생이 된 나오코와 유스케는 동경의 한 육상경기대회에서 다시 만난다. 유스케는 선수로, 나오코는 진행보조요원으로.

 

둘의 시간은 오르막 구간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오코는 유스케에게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사고였다고 해명할 기회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시간도 없었다. 설령 그런 자리가 마련된다고 해도 유스케의 마음이 열리지 않는 한 나오코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스케는 더 이상 나오코를 보고 싶지 않다. 아버지의 죽음이후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달리기로 자신의 시간을 채웠다. 부서진 마음과 닫혀진 마음, 나오코와 유스케는 그렇게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홀로 달린다. 

 

나오코는 유스케의 나미키리지마고 육상부가 '큐슈역전마라톤'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경에서 토호쿠로 날아온다. 육상부원이 부족해 나미키리지마고의 요시자키는 나오코에게 유스케가 뛰는 구간의 급수를 부탁한다. 하지만 나오코가 들고 있던 생수병을 유스케는 받지 않고 지나쳐 간다. 유스케는 급수없이 선두 경쟁을 하다가 오버 페이스, 결국 탈수로 쓰러진다.

 

유스케의 아버지가 죽은 후 유스케를 아들처럼 보살펴온 나미키리지마고의 육상부 감독은 나오코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듣고 유스케를 나무란다. 그는 나오코와 나오꼬의 부모에게 '아이들의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하고 싶다'며 여름방학 훈련기간동안 나오코가 나미키리지마고의 육상부 매니저로 봉사해주기를 부탁한다. 

 

이후 나오코, 유스케, 육상부 감독, 육상부원들의 이야기가 차례 차례 펼쳐진다. 역전마라톤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장해가는10대들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전형적인 청소년 성장 소설, 아니 청소년 성장 영화라고 봐도 된다. 역동적인 달리기 장면과 정적인 인물들의 심리 묘사, 특히 대사가 거의 없는 나오코의 표정 연기 그녀의 심리 상태를 알아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일품이다. 

 

우리는 인생의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원치않는 갈등을 겪게 되고 삶의 가치들을 고민하게 된다. 특히 10대의 시간은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뛰어나 감정적으로 축축하고 습할 때가 많다. <나오코>는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고 따뜻한 볕이 드는 양지의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좀 아프고 힘들긴 하지만 마음 속에 생긴 인생의 물음표는 경쾌하게 길 위를 달리다보면 느낌표로 바뀔 것이라는 메시지를 가지고서 말이다. 

 

<나오코>에는 여러 차례 '왜 달리는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육상부 감독은 '우리는 뭘 위해 달리는 걸까하고 수없이 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유스케의 뛰어난 달리기 실력에 열등감을 갖고 있던 육상부원들이 '나는 누구를 위해 뛰는가?'를 묻기도 한다. 유스케 역시 경기중에 '아버지, 왜 이렇게 뛰어야 하지요?'하고 자문한다. 그것은 등산을 하는 사람에게 '왜 산에 오르는가?'라고 묻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왜 사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나오코>의 답변은? 주인공들의 달리기를 참고해 보면 되지 않을까? 쫓고 쫓기는 달리기는 시작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오버페이스, 열등감, 강박증을 동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혼자서 달리기는 고독의 공포에 시달리기 쉽다. 물론 스스로 질문하고 돌아볼 수 있는 좋은 면도 있지만. 멈춰서서 뒤돌아 달리는 역주행은 최악이지만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제일 좋은 달리기는 함께 달리기다.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믿음과 우정을 쌓아 더 멀리 더 빨리 뛸 수 있게 한다. 유스케와 나오코가 혼자 뛰는 장면과 함께 뛰는 장면을 비교해 보라. 함께 뛰는 모습이 보기도 훨씬 좋다.

 

그리고 코치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나오코와 유스케, 유스케와 육상부원들이 하나의 완전하고 아름다운 사슬이 되어 달릴 수 있었던 건 육상부 감독이 아이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 덕분이다. 같은 극을 가진 자석들처럼 서로를 튕겨 내기만 했던 이들이 마지막 순간 범위를 넓혀가는 호수의 동심원처럼 커다란 포옹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퍽 감동적이었다. 함께 뛴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는 건 삶에 대한 긍정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아름다운 달리기 속에 나의 '오래달리기' 추억이 오버랩된다. 
 


오래달리기

“3학년 1반 1번이 누구냐?” 체육 선생님께서 교실 문 앞에서 큰소리로 물으셨다. “접니다.” 내가 손을 들었다. “그래, 오늘 네가 너희 반 체력장 인솔 조장이다. 반별로 1번이 조장하기로 했으니 오늘만 수고해라.”

선생님께서는 급하게 2반으로 가셨다. 내가 가타부타 말할 새도 없었다. 그저 선생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볼밖에. 고3 체력장이 열리던 날 아침이었다.

체력장 종목은 여섯 종목. 제자리 멀리뛰기, 턱걸이, 윗몸 일으키기, 공 던지기, 100미터 달리기, 오래달리기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오전에 치러지는 다섯 종목만으로도 20점 만점을 다 따내고 오후엔 느긋하게 오래달리기에 임했다. 그 날 점심을 먹고나서 난 우리 반 아이들의 점수를 확인했다. 50여명 중에 서너명 말고는 다 만점을 따 놓은 상태였다. 운동신경이 둔한 그 서너명이 문제였다. 

그때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난 교탁 앞으로 걸어나가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오후에 오래달리기 할땐 다같이 줄을 맞춰서 뛰자. 아직 만점 못 받은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같이 뛰면 다 만점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어때? 괜찮지 다들?” “그래, 그래. 그러자.” 너나 할 것없이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3학년 1반부터 순서대로, 그러니까 우리 반부터 오래달리기를 시작했다. 우린 약속한대로 출발선에 4열 종대로 길게 늘어섰다. 아직 만점을 얻지 못한 아이들을 중간에 배치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출발을 알렸다. “삐익.” 난 마치 군부대의 소대장처럼 옆에 서서 구령을 외쳤다. “하나, 둘, 셋, 넷” 선생님들이 처음엔 의아한 듯 보셨지만 두바퀴를 그렇게 돌자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세바퀴째. 한 친구가 내게 다가와 뭔가 속삭이고는 속도를 내며 저만치 달려나갔다. 대열이 흐트러지고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야, 야, 다들 신경쓰지마. 쟤는 체육학과 지원할거래. 체력장 모든 종목 기록이 중요하다니까 놔 둬.” 네바퀴째. “그런 게 어딨냐. 다같이 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그럼 나도 그냥 빨리 뛸란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고 뛰쳐나가자 대열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연히 ‘운동신경 둔한 그 서너명’은 맨 뒤로 쳐졌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한 말을 먹어버릴 순 없었다. 난 가장 운경신경이 둔한 녀석과 뒤로 쳐졌다. 우리 반 친구들 모두가 결승점을 통과하고선 반바퀴나 뒤쳐진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날 난 정말로 ‘오래’ 달렸고 난생 처음 꼴찌를 했다. 결승선에서 생물선생님께서 내 손바닥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기록을 써 주시며 말씀하셨다. “하하, 난 네가 그렇게 굼벵인줄 몰랐다. 실망이야.” 웃으며 하신 그 말씀... 평소 친분으로 생각해보면 농담삼아 하신 말씀이셨지만 그날 내 속은 밴댕이보다 더 좁아져 있었다.

다들 꼴도 보기 싫어 혼자 교실로 들어와 버렸다. 잠시 후 친구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체육학과 지원할 거라던 그 친구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미안하다. 그럴려고 했던 건 아닌데.” 또 다른 녀석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끝까지 책임지려고 꼴찌로 들어오는 거, 멋지더라. 화 풀어라.” 그리고 같이 꼴찌로 들어온 그 친구가 악수를 청했다. “고맙다. 평생 기억날 거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 날 잃어버린 거라고는 꼴찌로 들어온 그 친구와 뛴 몇 분 정도의 시간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로 돌아가 다시 ‘오래’달리기를 하라면 몇 번이고 뛸거다. 꼴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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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 Sunn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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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써니>는 주인공 임나미 가족의 무미건조한 아침 풍경을 그리며 시작된다. 남편과 딸이 집을 나간 후 햇살 쏟아지는 탁자에 앉아 바깥 세상을 보는 그녀. 무균실의 환자같이 보였다. 임나미는 입원중인 엄마의 병원에 갔다가 투병중인 여고시절의 친구 하춘화를 만난다. 2개월 선고받은 말기암 환자. 영화를 다 보고선 진짜 환자는 춘화가 아니라 나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의 병명은 이름하여 '꿈 상실증'. 꿈을 잃은 사람들은 증세가 악화되면 결국 내가 누군지도 모른채 살아가게 된다. 무서운 일이지만 그걸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나미, 장미, 진희, 금옥, 복희같은 인물들은 이유야 어떻든 꿈없는, 아니 한때 꿈 많았던 소녀들의 대명사다. 치료받아야 하는 건 춘화가 아니라 나미이며 몸이 아픈 '당신'이 아니라 꿈을 잃은 '나'이다. 

 

임나미는 하루에도 수 천, 수 만명씩 오가는 백화점에 가서 남편이 준 돈으로 샤넬 가방을 산다. 혼자 가서 사도 신날까? (우리 아내는 "그걸 말이라고...신나죠." 했다.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 물론 신나기도 할거다. 하지만 좋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 그 이상은 아니지 않을까? 백화점을 드나드는 사람들, 그곳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내가 혼자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곳에 친구가 없기때문이다. 친구란 친밀함을 느끼는 관계다. 그 친밀함이란 친구의 기쁨과 슬픔을 내 것인 양 여기는 감정이고. 써니의 슬로건이 뭐였지?  "우리중 하나를 건드리면 모두를 건드리는 것." 그래, 그게 친밀함이다.가방과는 친밀함의 관계를 맺을 수 없잖아.(뭐 무인도라면 다를테지...톰행크스는 <캐스트어웨이>에서 배구공 윌슨과 말할 수 없이 친밀했으니까...) 

 

한때 'TV는 사랑을 싣고'같은 방송매체나 '아이러브스쿨'같은 인터넷 사이트가 친구찾기를 내세우며 유행한 적이 있었다. 춘화의 마지막 소원도 친구찿기였다. 그녀는 나미에게 여고 시절 써니 멤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친구찾기의 궁극적 목적은 나를 찾는 데 있다. '나'라는 인간은 살면서 내가 관계 맺어 온 친구의 총화니까.  친구찾기가 의미를 가지려면 찾고 난 후의 관계가 훨씬 중요하다. 85년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써니 멤버들의 현재 상황을 보라. 그들이 2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친구가 되기란 쉽지 않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때문이다. 춘화는 다시 만난 친구들에게 그.냥. 살.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되고 싶은 거되라는 말도 덧붙인다. 친구들 앞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을 유산으로 남긴다. "나도 역사가 있는 내 인생의 주인공"임을 상기시키는  춘화는 써니의 '짱'다웠다.(여고생들의 우정과 의리가 이렇게 빛날 수 있다니...)

 

내가 약간 즐거운 흥분 상태에서 말하자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 자체가 꿈같은 이야기야. 그러니까 영화로 만들어진 거고. 현실에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엄청 많은 관객들이 보고 대리만족 느끼는 거 아니겠어. 이건 백마탄 기사 이야기를 약간 변형했다고 보면 돼. 40대 중반의 여자한테 백마탄 기사가 나타날 가능성? 거의 없어. 20대 아름다운 여자라도 그 가능성이란 폐차장에 번개쳐서 태권브이 나올 확율인데 40대 아줌마는 말하면 입아파. 그러니 <써니>에선 하춘화가 '짠'하고 등장하잖아. 몰랐지? 하춘화가 백마탄 기사란걸. 나머지 친구들은 찌질하게 살아가는 부엌떼기들이고. 결혼도 안한 성공한 사업가 친구, 곧 죽을 병에 걸렸지만 여고시절 써니 멤버라는 이유만으로 소원 하나씩 다 들어주잖아. 얼마나 멋있냐. 로또야, 로또. 난 이런 친구 안 나타나나 몰라."(으윽, 확 깬다. 빈정 상하고...) 다 부정할 순 없는 말이지만 아름다운 우정과 의리를 매도하지 말라고 강변하고 싶다.(이 말은 못했다. 간이 작아서...쩝) 

 

80년대를 살아온 여학생들의 우정, 꿈, 현실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는 <써니>. 난 개인적으로 남자들의 우정과 의리를 그린 <친구>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폭력과 살인으로 마무리되는 <친구>를 보면서 우정, 꿈과 같은 말들이 지닌 긍정의 의미를 되새기긴 힘들었다. <써니>는 달랐다. 너무 웃고 즐기다 보니 '<써니>의 앤딩씬이 댄스 연습장이었나'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환하게 웃는 춘화의 스케치 영정을 앞에 두고 'sunny'의 선율에 맞춰 그녀들이 추었던 춤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가 극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의 환희처럼 보였다. 진정한 친구는 살기(殺氣)가 아니라 활기(活氣)를 불어넣는다. 춘화처럼.

 

꿈을 잃은 그대들, 우리 다시 춤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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