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다. 장모님이 돌아가신 지 반년만이다. 아내와 나는 부모를 모두 잃은 처지가 되었다. 살아생전 장모님께는 무한한 애정과 연민을, 장인어른께는 적지 않은 원망을 내색한 아내는 장모님 때와는 다르게 대성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딸과 아버지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이구나.
자식으로서 잘못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장인어른을 생각할 때 늘 후회가 되는 대목이 있다. 언젠가 장인어른과 테니스를 했는데 콜을 고지식하게 불렀었다. 웬만하면 장인어른께 유리하도록 콜을 해야 했는데 장인어른을 이겨서 뭘 하겠다고 곧이곧대로 불러서 기어코 장인어른을 이겼다.
인터넷에 장인어른의 흔적이 있는지 검색해봤다. 25년 전 교장 인사 발령 기사 한 줄이 있었다. 왈칵 슬픔이 밀려왔다. 그땐 얼마나 꿈에 부풀었고 설레셨을까. 함께 발령받은 인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많은 분이 이미 이 세상 분들이 아닐 터이고 교직 생활의 인연으로 문상을 온 분은 거의 없었다. 이미 퇴직한 지 20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노년일수록 취미 생활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인어른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게이트볼을 매일 즐기셨는데 제일 먼저 우르르 몰려오셔서 애통해하신 분들이 게이트볼 동료들이셨다. 게이트볼 회원들은 점심을 같이 해 먹곤 했는데 독거노인인 장인어른이 좋아하는 반찬을 매일 해오고 한 번이라도 싫은 내색을 비추면 절대로 그 반찬을 해오지 않았다는 동료 게이트볼 회원분의 말씀을 들었다.
40년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맺은 인연보다 매일 게이트볼을 함께 한 동네 분들과의 추억이 노년을 외롭지 않게 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억지웃음을 난발하는 분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뭔가 담백하지 않다는 생각인데 또 다른 부작용이 있더라. 학교에 복귀해서 인사를 드리는데 나를 위로한다는 의도인 것 알겠지만 “아니, 사모님께서는 매년 (흐흐흐) 초상을 ( 흐흐흐 )당하시고 (흐흐흐 )힘드시겠어요 (흐흐흐) ”라고 말씀하시더라.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