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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티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분홍색의 상큼한 책표지를 보면 과연 이 책이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진다. 나는 '블랙티'라는 이름의 장미가 있는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것도 굉장히 비싼 장미라고 하는데, 그런 장미를 받는 사람은 굉장히 행복해야만 할 것 같다. 물론 자신이 별로 받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서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왠지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가득차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책인데, 사실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비밀,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조금은 범죄를 저지르고 싶어하는 욕망을 살짝 표현한 책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꽤 독특하면서 재미있는 소설 단편 모음집이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왠지 처음에 나오는 단편인 '블랙티'였다. 몇 년동안 다른 사람들의 가방을 아무도 몰래 가져가도 걸리지 않았던 그녀가 다른 사람이 놓고 간 장미꽃을 주웠다가 딱 걸리고 만다. 물론 그녀는 지하철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절도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동안 자신이 저질러왔던 일들이 있기 때문에 차마 아니라고 말은 못하고, 보다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조금은 안타까웠다고 하면 이상하게 느껴질까? 보통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산다. 100% 완벽하게 모든 법을 지키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 왠지 모를 연민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두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마음속에 죄의식을 묻어둔채로 그렇게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따뜻하지는 않아도, 친밀감이 물씬 묻어나는 단편 소설집이다. 담담한 작가의 문체가 더욱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듯 하다. 그러고보면, 요즘에는 사소한 잘못쯤은 그냥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런데 어디선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기억에 담아두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건망증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의외로 많이 안 좋은 인상을 타인들에게 남기고 다녔다. 물론 자신이 한 선행도 까먹는 어이없는 주인공이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으면서 절대 남에게 빌린 물품은 제때 가져다 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단편이다. 자신이 저지른 작은 잘못에도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사실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끌릴만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소박한 느낌이 굉장히 담백하다. 가끔은 이렇게 기름기가 쭉 빠진 글을 읽고 싶을 때가 있다. 화려한 미사여구에 지쳤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