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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날 그후 - SF거장 14인이 그린 핵전쟁 그 이후의 세상
노먼 스핀래드 외 지음, 마틴 H. 그린버그 외 엮음, 김상온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책과 유사한 내용의 영화였는데 핵폭탄이 터져 파괴된 땅, 그리고 남겨진 방사능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할퀴고 간 모습을 그린 영화였다.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장면은 방사능에 의해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진 여자친구에게 역시 머리가 많이 빠진 남자친구가 모자를 쓰고 와서 머리핀을 선물로 주는 모습. 살아남은 의사가 체육관을 가득 메운 방사능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자신의 집이 있던 곳에 가서 폐허가 된 집터에서 가족의 추억을 찾아내고 그 곳에 머물러있는 난민가족에게 여기는 자신의 집이라며 울부짖는 모습. 그리고 그 난민가족이 그 의사에게 먹을 것을 내미는 장면(아마 이 장면이 엔딩씬이었던 것 같다). 그 영화는 내게 전쟁, 특히 핵폭발 후의 절망에 대해 암시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동안 잊고 있던 전쟁과 최후의 날에 대한 절망을 일깨워주었다. '거대한 섬광'과 '터미널 해변'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외의 단편은 작가 나름대로의 상상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이루어져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소소한 사건들을 통해 최후의 날 이후를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여러 작가들이 다양한 소재로 글을 썼지만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이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개인의 끝없는 탐욕에 의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그 후에 남겨진 절망과 고통.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 모두 좋지만 "세상을 파는 가게"와 "그대를 어찌 잊으리, 오 지구여……" 두 편이 가장 좋았다. "세상을 파는 가게"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난 후 과거의 평범했던 일상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그대를 어찌 잊으리, 오 지구여……"는 지구를 떠나야했던 인간이 멀리서 지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폐허가 된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의 비참함보다 더 와닿았다. 아, "현대판 롯"은 냉소적인 유머까지 겸비한 단편. 결말에서 웃음이 났다.
북한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핵을 보유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전쟁과 폭탄은 안 돼!"라고 무작정 막기보다 "그 후를 생각해서라도 안 돼!"라는 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책. 별 다섯개도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