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특히 범죄와 관련한 심리학 이론 중에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생긴다는, 일종의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는 역으로 보면 나쁜 일이 생긴 사람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에 범죄의 피해자가 되려 비난을 받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또한 피해자의 상당수가 '왜 하필 내가 피해자가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갖는다는 것에 수긍할 수 있는 논리도 제공합니다. 

하지만, 조금 겪어보니 나쁜 일은 나쁜 일을 당할만한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나라에는 광역시 및 도마다 원스탑센터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동성폭력의 발생 빈도가 높아지고, 성폭력을 조사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높아지자 조사,진료,진술녹화 등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도록 지역 내 병원과 연계하여 만든 센터인데 보통 병원의 응급실 내에 있으며 24시간 여경분이 대기합니다. 

아동성폭력과 관련하여 해바라기아동센터라는 곳도 있으나 경찰이 동석하지 않은 조사는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상담보다 신고/처벌을 희망하는 경우는 원스탑센터로 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작년부터 이 원스탑센터에 아동의 진술을 분석하는 진술분석 전문가 참여제가 도입되었습니다.
작년 1년간 서울, 인천 및 경기지역의 다섯 군데에서 시범실시했던 참여제는 올해 3월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실시하고 있습니다. 대강 설명하자면 이는 요일마다 한 명씩 배치를 받아 대기하고 있다가 아동이나 지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피해자가 원스탑센터에 조사를 받으러 오면 동석하였다가 추후 피해자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어쩌다보니 맨손으로 올해부터 전국 규모의 확장과 함께 진술분석 전문가 양성 및 배치, 운영의 간사를 맡은 저도 올해부터 학교와 자취방 근처의 센터에 배치를 받아 화요일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전날 미리 연락을 받는데 오늘, 아니 이제 어제는 오후 여섯 시가 다 된 시각에 연락이 왔습니다. 피해아동이 보호자와 담임선생님과 함께 센터에 와 있다고 하여 부랴부랴 갔습니다. 아직 능숙치 않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그럴 시간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아직 저희에게는 질문권한이 없기 때문에 경찰분이 조사하시지만 창피해하는 아이에게서 억지로 사건에 대해 알아내려고 하자니 미안했습니다. 한 시간의 진술녹화 후 보호자, 담임선생님과 간단한 면담을 했습니다. 마칠 때쯤 떠오르는 생각은 내일이 어린이날이라는 것이더군요. "내일이 어린이날인데.."라는 말에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범죄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절대 그 누구에 포함되지 말아야 할 대상이 어린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제 날짜가 바뀌어 어린이날인데, 그 전날 아침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한 아이가 오늘 즐거울 수 있을까요. 365일 매일은 아니어도 적어도 어린이날만큼은 어린이가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간 진술녹화를 가지고 네 시간 반 넘게 녹취록을 쓰고 새벽 두 시에 들어와서 속상한 마음과 괜한 밤기운에 울컥해서 한 번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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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5-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죄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절대 그 누구에 포함되지 말아야 할 대상이 어린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공감합니다. 범죄의 대상이 어린이이면 안 됩니다.

푸른신기루 2010-05-07 23:59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 에효..

Alicia 2010-05-0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한테 두번 상처를 주는 일이지요.. 사실 거기서 오는 트라우마가 더 커요. 근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죠.. 내담자나 피조사자에게 빨리무언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의도자체가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해요. 지금 공부할 때의 그 고운 마음을 나중에 전문가가 되더라도 꼭 간직하세요. ^^

푸른신기루 2010-05-08 00:19   좋아요 0 | URL
가해자를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그걸 모를 거라는 건 매우 섣부른 단정이신 것 같네요. 피해사실을 확실히 알아서 조서를 꾸미거나 증언을 남겨놓지 않으면 가해자를 검거해도 송치할 수 없거나 불기소될 수 있으니까요.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것이 아동에게는 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을 겪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만, 혹시나 만에 하나 아동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모님이나 보호자가 취해야할 가장 바람직한 반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동을 센터에 데려가는 것입니다. 성교육을 받기 전이나 성지식이 없는 아이는 그것이 나쁜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기 때문에 말하는 데 꺼리거나 상처가 되는 것이 좀 줄어들거든요. 하지만 이게 어디 말처럼 쉽나요..;;
이야기를 처음 들은 사람의 반응도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님이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 피해사실을 숨길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으면 또 상처받겠죠.
음, 조금 울컥했습니다;;

Alicia 2010-05-08 10:17   좋아요 0 | URL

뭔가를 알아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부담과 절박함이 있지요.빨리 사건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성범죄사건은 조금 다를수도 있겠어요,하지만 조사받는 입장에 한번이라도 서보셨다면 이게 섣부른 단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겁니다.

푸른신기루 2010-05-09 06:33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조사과정의 폐해는 익히 '들어'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들어서 안 것이라 실제 겪은 사람만큼 느끼지는 못하겠지만요. 사건 당사자는 한 번 겪을까말까한 일이지만 그것을 조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없이 겪는 일이라서 그런 생각이 무뎌졌을 수도 있을 거고요. 조사자와 피조사자 중간에 서있는 저는 쉽게 어느 쪽에 서서 다른 쪽을 비판/평가하거나 강요하기가 어렵네요. 누구에게나 각자의 입장이 있고 그 입장 모두 중요한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