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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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자신이 여상을 나와서 겪어야 했던 설움을 잘 안다. 소위 '교양'이 없다는 것,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상급 학교라 하더라도 실업계 학교를 졸업한 어머니 같은 사람들은 졸업을 하고 직장에 취직해서는 퇴사할 때까지 말단직을 지키게 되는데,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급이 막혀 있는 데다가 교양이 없다는 수근거림을 자꾸 받게 되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양이란 게 꼭 필요하며, 교양이 모자란 것은 진짜 나쁜 일이라고 믿게 된다. 고등학교 적의 존경하는 국사 선생님이 말하지 않았던가.
"주변인들은 자신이 선망하는 주류의 기준이나 가치를 고스란히 내면화해. 그 결과, 주변인들을 누구보다 더 멸시하게 되지."  -p77  

구월의 이틀
-류시화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 부셔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갇하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시 속의 이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비의를 가르쳐줍니다. 구월은 30일이나 되지만 시인이 이 시를 쓰는 데는 단지 이틀만 필요했다는 것, 나는 이 대목이 문학에 관한 어떤 비밀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많은 어른들은 '내가 살았던 것을 그대로 적으면 소설 몇 권 분량이 된다'고 말하는데, 육십 평생의 행적이 몇 권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소설'로 화하지는 않습니다. 예술은 우리의 원체험, 각성의 순간 혹은 내면에 억압된 정신적 상처와 같은 숨어 있는 이틀을 끄집어내는 것이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나열하는 게 아닙니다. 이게 '현대문학의 이해'를 여러분에게 가르쳐야 하는 내가, 이 시로부터 찾아낸 문학의 비밀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문학은 내 삶을 구구절절이 받아 적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내 삶이 망각해버린 이틀, 혹은 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2인치를 찾아내는 겁니다."

-

"구월의 이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또 하나의 비의는 인생 혹은 청춘에 관한 것입니다. 그걸 말하기 전에,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을 또 다른 시의 한 구절을, 구월의 이틀과 겹쳐 읽어보겠습니다. 전문을 다 쓸 수는 없고 몇 구절만 써보지요."
교수는 화이트보드에 검은 매직으로 썼다.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모란이 지고 나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마냥 섭섭해 우옵니다.

"이 시의 제목과 시인을 모두들 알고 있겠죠?"
학생들이 시인의 이름과 제목을 말했다.
"맞아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죠. 그런데 이 시를 쓴 시인에게는 모란이 져버린 5월 어느 날, 그 '하루'만 살아 있는 날일 뿐 나머지 삼백예순 날은 아무런 뜻도 없는 날입니다. 단순히 모란이 져버린 것만아 아닌 게 분명한 그 하루만이 이 시의 시적 화자에게 의미가 있을 뿐, 나머지 삼백예순 날은 아무런 뜻도 없는 날입니다. 단순히 모란이 져버린 것만이 아닌 게 분명한 그 하루만이 이 시의 시적 화자에게 의미가 있을 뿐, 나머지 삼백예순 날은 구월의 이틀을 썼던 시인이 말한 것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빙하시대, 짐승들이 춤추며 몰려오는 야만적 시간에 불과합니다. 구월의 이틀에 나오는 이틀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하루는 같은 겁니다."
교수의 말은 현란한 묘기 같았다. 그래서? 은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말의 힘'에 매혹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의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할 뿐, 일평생이 인생은 아니다.' 다시 말해 나의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인생이란 20대의 어느 한 때를 가리킬 뿐'이랍니다. 나머지는 인생이 아니라 '그냥 어영부영','쓰게다시','덤','부록','죽지 못해','타성'일 뿐이랍니다. 무슨 말인 줄 알겠죠? 지금 막 여러분을 찾아온 청춘, 열여덟이거나 열아홉 혹은 스무 살일 나이인 바로 이때가, 저 두 시에 나오는 하루이거나 이틀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막 대학교에 입학한 여러분, 빙하시대를 불태워버릴 열정으로 이틀 혹은 하루뿐인 당신의 인생을 사십시오. 이 짧은 청춘의 날이 지나가고 나면, 여러분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게 됩니다."  -p127~134

도덕적 행동이란 각 개인의 자각이 전제된 끝에 나오는 것이고, 그런 자각에 이른 사람이 도덕적 군자다. 그런데 좌파들은 도덕적 행동이나 자각조차도 국가가 함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요하기까지 해야 한다고 여긴다. 국가가 강제적으로 길러준 도덕은 그 도덕을 지탱해왔던 국가가 흔들리면 모래성처럼 흩어져버린다. 고등학교 시절을 통틀어 은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마지막 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이 망해도 한국인들에게 유교적 겸양이나 염치 같은 도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소련이 망하면서 그 많던 사회주의 인간형이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린 걸 비교해보면, 왜 틀에 박힌 도덕을 국가가 강요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거다."  -p160

반복은 지옥이다. 지옥은 반복이다. 반복과 지옥은 이음동의어다. 동서양의 지옥도는 하나같이 현란하고 그래서 매혹적인 풍경으로 덧칠되어 있지만, 실제 지옥이란 끓는 기름물이 튀고, 불로 달군 쇠꼬챙이가 난무하는 풍경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옥에 빠진다는 말은, 다름 아닌 반복의 지옥에 빠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생에서 도둑질을 한 사람은 지옥에서도 계속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을 견디며 도둑질을 반복해야 하고, 살인을 했던 사람은 계속 그날의 처참했던 도끼질을 반복해야 하며, 근친상간을 했던 사람은 계속 자기 두 눈이 제 두 눈두덩이 속에서 섞여버릴 것만 같았던 부끄러운 육정을 반복해야 한다. 그게 지옥이다. 다시 말해 벌겋게 단 쇠꼬챙이로 혀를 뽑고, 귀 속에 뜨거운 쇳물을 붓고, 불에 달군 쇠말뚝을 당신 항문에 쑤셔 넣는 형벌장이 곧 지옥은 아니란 말씀.

다시 쓴다. 반복은 지옥이다. 지옥은 반복이다. 이때 지옥과 반복은 이음동의어다. 지옥은 결코 바로크적인 현란함으로 우리를 현혹하지 않는다. 동서양의 지옥도는 하나같이 끔찍하고 외면하고 싶은 형벌을 세세히 묘사했지만, 그런 형벌을 거듭해서 몇 번 당하고 나면 그 정도쯤이야 간지럼처럼 받아넘길 수 있는 내성이 생긴다. 자꾸 하다 보면 불로 내 살갗을 지지는 형벌 따위도, 쑥뜸을 뜨는 일과 같아진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런 벌도 코딱지를 후비는 것만큼 시원한 일로 바뀐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지옥을 혹형의 세기로 오해하고, 그걸 묘사한게 바로 동서양의 지옥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옥을 좀 더 단순하게 이해해야 한다. 지옥이란 그냥 반복을 가리킬 뿐, 혹형의 강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게 될 때, 우리가 간구하게 될 사항은 뻔하다. 지옥에 던져진 우리가 바라는 희망은 단순하다. 이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달라는 것! 그럴 때,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크게 구해내는 건 사랑이다. 사랑만이 우리를 반복의 지옥으로부터 구해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랑은 바복의 지옥에 빠진 우리를 번쩍 들어 단숨에 변화의 신세계에 올려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은 것을 영원히 반복하고 싶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희망이다. 그것은 반복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반복 가운데서 쉬게 하고, 반복 가운데 힘을 얻게 하며, 반복 가운데서 자유를 얻게 한다. 우리가 죽지 않고도 겪게 되는 지옥, 바로 반복으로 점철된 '지금-여기'라는 삶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반복이라는 무의미한 형벌로 가득한 삶을, 반복이란 행위로 감싸고 돌파하는 양식이다.   -p179~181

"은, 내 말 들려?"
"응, 들려."
"「구월의 이틀」이란 시 기억나?"
"응, 나지. '현대 문화의 이해' 시간에 들었잖아."
"그래, 요즘 자꾸, 그 교수의 말이 생각나."
"뭐가?"
"지난 1년간이 우리들의 '이틀'은 아니었을까? 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러면 우리 청춘이 끝난 거네."
"그래, 우리들의 '이틀'은 끝났어."  -p303~304

 
   


장정일이 10년만에 내놓은 신작 소설.
그가 '생각'이라는 책에서 '20대 80'의 사회란 소설을 구상한 것에 대한 언급 이후로 소설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세상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독서를 통한 생각들을 정리한 '공부','생각' 그리고 '독서일기'를 제외하곤 작품활동이 뜸했는데 10년만에 '우익청년 탄생기'라는 주제로 '구월의 이틀'을 썼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쿡쿡거리거나 '그렇군!'이라고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작품엔 자신의 앞선 작품들이 패러디되어 녹아 있다. 보트하우스, 아담이 눈 뜰때, 중국에서 온 편지 등에서 보았던 기존의 표현들, 생각들이 그의 작품을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금새 눈치챌 수 있도록 녹아 있는데다가 현실 정치에 대한 풍자적 표현들이 기발하게 표현되어 읽는 재미를 더하게 만든다. 
 

재미난 반어적 표현 하나(참고로 이 소설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 배경이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들어선 교회에서 은은 별안간 가슴이 뛰게 하는 것을 목격했다. 수많은 신도들 가운데 유난히 귀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온화하고 사려 깊으며 인내심이 있어 보이는 그의 얼굴로부터 은은한 후광이 발했다. 3류 국가로 곤두박질하는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리신 분!
'바로 저 분이야! 나는 저 분을 위해 내 온몸을 바쳐야지!'
바로 서울시장이었다. 그 귀하신 분을 먼발치에서 본 이후로 은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은은 생각했다.

'누구나 자신의 누추한 심신이나 죄의식을 가려줄 위장이 필요하다. 종교는 그러기 위해 남녀노소 누구든 빌려 입을 수 있는 외투지, 바바리맨의 바바리코트 같은 것이지.'    -p311~312

책의 띠지를 왠만하면 버리는 내가 이 책의 띠지는 버리지 못했다. 장정일의 번뜩이는 눈빛이 살아있는 사진과
'내가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건, 한평생이 아니라 생의 어느 한 순간' 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매끈하고, 거친 듯하면서도 날렵하며, 무딘듯 하면서도 날카로운 장정일의 글.
이 책 이후로도 더 많은 작품이 쓰여졌으면 한다. 
 

사족 : 장정일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저질작가라고 말하는 사람들. 제발 책 좀 읽고 이야기하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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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이계삼 지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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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친구'와 '골방', 그리고 온전히 스스로에게만 열려 있는 '무위의 시간'이다. 흔히 교육의 중요한 하위요소로 인정하는 학습, 노동, 사색은 '친구'와 '골방', 그리고 '무위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구성하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구성되는 비율이 한 존재의 정신적 외양을 결정한다. -p27

저는 폭력의 근원을 먼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폭력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수많은 성현들이 거기에 답했고, 저 또한 그분들의 말씀을 붙잡아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폭력은 '무지'에서 옵니다. 개별 존재에 가해지는 구체적인 폭력은 개별 존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아이들 세대 전체에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 또한 '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집단적 몰각에서 옵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논리도 성립합니다. 폭력의 대칭어는 아마도 '비폭력'-사랑-이겠지요. 비폭력 혹은 사랑의 바탕은 그 대상에 대한 '앎'입니다. 잘 아는 존재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설사 폭력이 행사되더라도 거기에는 반성과 구원의 계기가 이미 내재해 있습니다. '자기가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p46

진정한 의미에서 교양이란 책을 많이 읽는 것, 논리적으로 우수한 글을 쓰는 것과 별 상관이 없다. 이 시대의 우수한 교양인은 이 타락한 말과 글의 지배에 더욱 깊이 감연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살아있는 세계를 믿지 않고 말과 글을 존중하는 도착된 의식, 현실적인 쓸모밖에 볼 줄 모르는 유치한 계산속, 쓸데없는 엘리트의식으로 양 어깨가 빵빵한 가련한 허수아비가 될 가능성이 훨씬더 높다는 말이다. 교양이란, 실제적인 쓸모가 없고, 값없이 주어져야 하며, 그 값없음, 쓸모없음으로 제 쓸모를 찾는다. 교양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이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 되는 그 순간부터 교양은 타락한다. -p63

몰락이란, 사물의 기초에 도달하는 일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진 자신을 한탄하며 주저앉아 있을 때 청년은 그 아스팔트 위를 목발도 없이 뛰어다닌다. 아무것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음을, 결국 제 손으로 대지를 짚고 일어서야 함을, 몰락해본 사람은 안다. -p120

내가 바라보았던 정겨운 일상 속의 저 민중들과 지금 한미FTA를 지지하는 민중은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현실'이다. 불을 보듯 뻔해 보이는 미래를 향해 한발 두발 다가가는 이 현실을 되돌려야 한다는 강파른 당위만이 남아있을 때 누구나 외롭고 아득하다. 그러나 어떻게 되든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바라보지만 말고, 직접 말을 걸어 호소하고, 투쟁해야 한다. 희망의 다른 근거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한 행동 속에서, '대동'의 세상을 만나고 싶다. -p238


지금,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울고 있는 그 사람은
까닭도 없이 이 세상에서 울고 있는데,
나를 우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웃고 있는 그 사람은
까닭도 없이 이 세상에서 웃고 있는데,
나는 웃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느 곳에서 거닐고 있는 그 사람은
까닭도 없이 이 세상에서 거닐고 있는데,
나에게로 오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죽어가는 그 사람은
까닭도 없이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음이 무거울 때>  -p276~277
 
   

 


우리교육, 교육희망, 한겨레 신문 등을 통해 알게된 이계삼 선생님. 그의 작은 사진과 글만 보았을 때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이번 여름 밀양에서 받은 독서 연수에서 만난 이계삼 선생님은 내 생각과 다르게 푸근한 모습이었고, 이웃집 아저씨처럼 다정다감하였다. 연수 뒷바라지를 위해 부산 떠는 모습을 보며 저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냉철한 글들을 썼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녹색평론에서 그동안 썼던 글들을 모아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다. 허승 선생님께 이야기했더니 냉큼 사준다 하신다. 덕분에 좋은 책 좋은 기분으로 받아 읽었다. 그런데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책을 덮는 순간 눈물이 났다. 양심이 찔려서, 저분과 같이 열정적으로 살지 못하고, 아파하지 못해서, 언행일치 하지 못해서, 스스로의 가증을 견딜 수 없어서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힘들었다. 죽비같은 말들 잊지 않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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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재 하늘 1
권정생 지음 / 지식산업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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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치고 억수비가 쏟아져도 날씨가 개이면 만물은 다시 햇빛을 받아 고개를 들고 잎을 피우고 꽃봉오리를 맺듯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것은 그렇게 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p44

천지가 뒤흔들리고 난리가 나도 세상에는 아기가 끊임없이 태어났다. 조선의 골짝골짝마다 이렇게 태어나는 아기 때문에 모질게 슬픈 일을 겪으면서도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그 아기들은 자라서 어매가 되고 아배가 되고 할매, 할배가 되었다. -p57

귀돌이는 아직 몸도 마음도 어렸다. 동생 분옥이와 이순이네와 함꼐 돌담 밑에서 소꿉살림하는 것이 더 그리웠다. 어매 없이 일찍부터 철이 들었따고 모두 맹랑하게 보았지만 그건 귀돌이 속내를 몰라서다. 사람은 누구나 바로 앞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땐 더 큰 어려움도 견디며 이겨나가는 것이다. 귀돌이한텐 동생 분옥이는 그런 소중한 상대였다. 귀돌이가 어른스러울 수 있었던 것도 저보다 작고 어린 분옥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p85

수동댁은 운명을 거슬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재차 꺠달았다. 그 운명의 물은 아래로 흘러가는 대로 흘려보내야 한다. 다만 흘러가면서 사람은 제 몫에 맡겨진 임무를 해나갈 뿐이다. -p98

만약 사람한테 일이 없으면 슬픔에 찢겨 죽어버릴 것이다. 일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슬픈 일 괴로운 일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p104
<한티재 하늘 1권>


그렇게 둘은 실컷 울고 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산다는 건 이렇게 서로 용서하는 데서 힘이 솟는 건지도 모른다. -p148

정원이뿐만 아니라 삼밭골 사람들, 조선 사람 모두가 이 팔자라는 말이 더러는 살아가는 데 약도 되고 병도 되었다. -p186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누구 할 것 없이 얼마나 많이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겠는가. 알게 모르게 그렇게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이다. -p188

안 보고 안 들으면 잊혀지고 멀어지는 것이 사람의 정이다. 어미 자식 사이도 그렇게 잊을 건 잊고 살아야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한겨울이 지나면서 말숙이는 그렇게 옥주를 잊어갔다. -p192

결국 세상은 아무도 남의 짐을 대신 져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이순은 그래서 혼자 답답한 가슴을 오불쳐 안고 겨울을 났다. -p250  

<한티재 하늘 2권>

 
   


권정생 선생님의 <한티재 하늘>을 읽는 내내 맘이 저리고 아팠다. 불과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의 삶이 이렇게 슬프고 처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러면서도 모질게, 끈질기게 살아가는 그 삶이 눈물겹고 가슴아팠다. 너무나 흔한 말이, 너무나 일상적인 말들이 이렇게 가슴 아프게, 절절하게 다가왔던 적이 있던가...

책을 읽는 내내 인물 한 명 한 명의 모습이 마음 속에 하나씩 새겨졌다. 2권 이후에 계속 이어질 내용들은 권정생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다. 선생님이 미쳐 다 하지 못한 그들의 삶이 더 이상 고단하고 힘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그들은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결국 또 끈질기게 살아가겠지만... 


삶과 살아감에 대해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 다가올 많은 일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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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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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p112 


그.때.의.그.절.망.만.큼, 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물처럼 스며들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p157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생각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라고 생각해요. 만나고 안 만나고 상관없이 윤이와 단이는 서로 생각하는 것으로 끊어지지 않는 관계죠. -p286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291

 
   

내가 읽은 신경숙의 첫 작품은 고등학교 시절 문학 선생님이 첫 수업 때 나눠줬던 '풍금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 생각하면 따분하기 그지 없었던 문학 시간에 왜 이 작품을 선생님이 나눠줬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 작품이 인쇄된 프린트 물을 꽤나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고, 후에 책까지 산 걸 보면 참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것이 분명하다.

문득 문득 힘이 들때 마음이 아프고 힘들때는 양치질을 오래오래 한다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이 가끔 생각나 나도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가만가만 오랫동안 양치질을 하곤 했다.

그 후 '깊은 슬픔', '외딴 방' 등 그녀의 작품을 찾아 읽다가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느낌의 글에 질려, 한동안 그녀의 글을 외면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작년에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고, 이번에 '어,나,벨'을 읽었다. 
 

처음 페이지를 접했을 때, 쉽게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할 거라는 걸 짐작했다. 읽는 내내 가슴이 아릿아릿했고, 마구마구 글을 쓰고 싶었고, 사람들이 마구마구 생각났다.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우울함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우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단지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내가 장마와 이 책과 더불어 무기력에 빠져 약간의 발작 증세가 나타났다는 사실 외에는 왜 그런지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하루종일 잠에 빠졌고, 하루종일 굶었다. 가야하는 병원도 가지 않았고, 종일 우울함에 시달렸다. 겨우 일어나 책을 책꽂이에 꽂아두기 전 이렇게 정리해놓는다. 책을 꽂아두는 순간 그 우울함도 잊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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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
N.H 클라인바움 지음, 한은주 옮김 / 서교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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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 자기 스스로의 인생을 잊혀지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p60


"내가 이렇게 책상 위에 올라서 있는 이유가 있다. 즉 뭔가 또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 쓸 필요가 있음을 스스로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학생들은 어느덧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키팅의 그러한 행동에 깊이 공감하게 된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세계도 다르게 보인다는 키팅의 말에 학생들은 진심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믿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믿을 수 없다는 것 같은데, 그럼 좋다. 이번에는 너희들이 이 위로 올라오도록 직접 시험해 보는 거다. 자, 자아. 어서 순서대로 이 위로 올라와서 한 번 내려다 보도록."

제일 먼저 니일이 앞으로 나가 교탁 위로 거뜬히 올라갔다. 대신 키팅이 바닥으로 뛰어내리자 하나둘씩 교탁 위로 올라갔다. 가서 내려다 보았다. 교실 안은 잠시 그것으로 소음에 흔들렸다. 앤더슨 한 명만을 제외한 전원이 한 번씩 교탁위로 올라간 다음 높은 곳에서 교실을 휘둘러 보았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게 있다는 그것을 또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키팅은 교탁에서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향해 계속해서 설명했다.

"설령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바보스럽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 때에는 지은이의 생각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절대로 안된다.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주의해야만 되는 것이다."

키팅은 계속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표정으로였다.

학생들의 가슴 속을 꿰뚫어 깨우쳐 주려는 듯 한 분위기로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목표는, 너희들의 목표는 자신의 소리를 찾아내는 데에 있다. 찾는 일을 뒤로 물려놓으면 물려놓는 그만큼 자신의 목소리는 찾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p113~114

 
   

'죽은 시인의 사회' 톰 슐만 지음. 김미정 엮음. 도서출판 모아 1990 6월 25일 초판 발행. 값 3500원.

이 책은 아마도 큰집의 사촌 언니가 읽던 책을 내가 가져온 것인 듯 하다. 방학 때 마다 큰 집에 놀러가면 나보다 나이가 많던 언니, 오빠들이 읽던 책들, 듣던 노래들로 방학의 한가한 시간을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책이나 앨범이 있으면 가져오곤 했는데 그렇게 해서 알게된 작가가 양귀자였고, 알게된 가수가 강산애, 듀스, 노찾사 등이었다. 또래보다 조숙했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사촌 언니 오빠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새학교 오면서 일상의 피곤에 시든 아이들을 보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많은 고민들이 생겼다. 오월의 햇빛같이 밝던 아이들이 하나 둘 시든 꽃처럼 구부러지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 견기 힘들었다. 내 수업 또한 강의식에 생각할 거리 조차 던져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단편적인 참고서의 지식들을 읊어대고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 불편한 마음은 배가 되고 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책장을 바라보다 문득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던 이 책이 눈에 띄였다.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너무나 쉽고 명쾌한 말이지만 누구하나 현재를 즐기면서 살고 있지 못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오늘을 지금을 견디고 인내하며 사는 사람들,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현재를 즐겨라고 어떻게 가르쳐 줘야할까...

읽는 내내 1959년의 책 속의 현실이 내가 살고 있는 2010년의 현실과 다르지 않아서,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오늘을 억압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주인공들의 모습이 자꾸 겹쳐져서 그리고 키팅선생처럼 용감하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마음이 답답했다.

수업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 방향을 바꾸어 보아야겠다. 아이들이 제 삶을 선택하고 살면서도 자유롭게 행복할 수 있도록 미약하나마 그 생각을 흔들어 놓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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