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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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자신이 여상을 나와서 겪어야 했던 설움을 잘 안다. 소위 '교양'이 없다는 것,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상급 학교라 하더라도 실업계 학교를 졸업한 어머니 같은 사람들은 졸업을 하고 직장에 취직해서는 퇴사할 때까지 말단직을 지키게 되는데,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급이 막혀 있는 데다가 교양이 없다는 수근거림을 자꾸 받게 되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양이란 게 꼭 필요하며, 교양이 모자란 것은 진짜 나쁜 일이라고 믿게 된다. 고등학교 적의 존경하는 국사 선생님이 말하지 않았던가.
"주변인들은 자신이 선망하는 주류의 기준이나 가치를 고스란히 내면화해. 그 결과, 주변인들을 누구보다 더 멸시하게 되지."  -p77  

구월의 이틀
-류시화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 부셔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갇하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시 속의 이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비의를 가르쳐줍니다. 구월은 30일이나 되지만 시인이 이 시를 쓰는 데는 단지 이틀만 필요했다는 것, 나는 이 대목이 문학에 관한 어떤 비밀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많은 어른들은 '내가 살았던 것을 그대로 적으면 소설 몇 권 분량이 된다'고 말하는데, 육십 평생의 행적이 몇 권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소설'로 화하지는 않습니다. 예술은 우리의 원체험, 각성의 순간 혹은 내면에 억압된 정신적 상처와 같은 숨어 있는 이틀을 끄집어내는 것이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나열하는 게 아닙니다. 이게 '현대문학의 이해'를 여러분에게 가르쳐야 하는 내가, 이 시로부터 찾아낸 문학의 비밀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문학은 내 삶을 구구절절이 받아 적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내 삶이 망각해버린 이틀, 혹은 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2인치를 찾아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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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또 하나의 비의는 인생 혹은 청춘에 관한 것입니다. 그걸 말하기 전에,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을 또 다른 시의 한 구절을, 구월의 이틀과 겹쳐 읽어보겠습니다. 전문을 다 쓸 수는 없고 몇 구절만 써보지요."
교수는 화이트보드에 검은 매직으로 썼다.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모란이 지고 나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마냥 섭섭해 우옵니다.

"이 시의 제목과 시인을 모두들 알고 있겠죠?"
학생들이 시인의 이름과 제목을 말했다.
"맞아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죠. 그런데 이 시를 쓴 시인에게는 모란이 져버린 5월 어느 날, 그 '하루'만 살아 있는 날일 뿐 나머지 삼백예순 날은 아무런 뜻도 없는 날입니다. 단순히 모란이 져버린 것만아 아닌 게 분명한 그 하루만이 이 시의 시적 화자에게 의미가 있을 뿐, 나머지 삼백예순 날은 아무런 뜻도 없는 날입니다. 단순히 모란이 져버린 것만이 아닌 게 분명한 그 하루만이 이 시의 시적 화자에게 의미가 있을 뿐, 나머지 삼백예순 날은 구월의 이틀을 썼던 시인이 말한 것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빙하시대, 짐승들이 춤추며 몰려오는 야만적 시간에 불과합니다. 구월의 이틀에 나오는 이틀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하루는 같은 겁니다."
교수의 말은 현란한 묘기 같았다. 그래서? 은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말의 힘'에 매혹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의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할 뿐, 일평생이 인생은 아니다.' 다시 말해 나의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인생이란 20대의 어느 한 때를 가리킬 뿐'이랍니다. 나머지는 인생이 아니라 '그냥 어영부영','쓰게다시','덤','부록','죽지 못해','타성'일 뿐이랍니다. 무슨 말인 줄 알겠죠? 지금 막 여러분을 찾아온 청춘, 열여덟이거나 열아홉 혹은 스무 살일 나이인 바로 이때가, 저 두 시에 나오는 하루이거나 이틀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막 대학교에 입학한 여러분, 빙하시대를 불태워버릴 열정으로 이틀 혹은 하루뿐인 당신의 인생을 사십시오. 이 짧은 청춘의 날이 지나가고 나면, 여러분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게 됩니다."  -p127~134

도덕적 행동이란 각 개인의 자각이 전제된 끝에 나오는 것이고, 그런 자각에 이른 사람이 도덕적 군자다. 그런데 좌파들은 도덕적 행동이나 자각조차도 국가가 함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요하기까지 해야 한다고 여긴다. 국가가 강제적으로 길러준 도덕은 그 도덕을 지탱해왔던 국가가 흔들리면 모래성처럼 흩어져버린다. 고등학교 시절을 통틀어 은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마지막 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이 망해도 한국인들에게 유교적 겸양이나 염치 같은 도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소련이 망하면서 그 많던 사회주의 인간형이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린 걸 비교해보면, 왜 틀에 박힌 도덕을 국가가 강요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거다."  -p160

반복은 지옥이다. 지옥은 반복이다. 반복과 지옥은 이음동의어다. 동서양의 지옥도는 하나같이 현란하고 그래서 매혹적인 풍경으로 덧칠되어 있지만, 실제 지옥이란 끓는 기름물이 튀고, 불로 달군 쇠꼬챙이가 난무하는 풍경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옥에 빠진다는 말은, 다름 아닌 반복의 지옥에 빠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생에서 도둑질을 한 사람은 지옥에서도 계속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을 견디며 도둑질을 반복해야 하고, 살인을 했던 사람은 계속 그날의 처참했던 도끼질을 반복해야 하며, 근친상간을 했던 사람은 계속 자기 두 눈이 제 두 눈두덩이 속에서 섞여버릴 것만 같았던 부끄러운 육정을 반복해야 한다. 그게 지옥이다. 다시 말해 벌겋게 단 쇠꼬챙이로 혀를 뽑고, 귀 속에 뜨거운 쇳물을 붓고, 불에 달군 쇠말뚝을 당신 항문에 쑤셔 넣는 형벌장이 곧 지옥은 아니란 말씀.

다시 쓴다. 반복은 지옥이다. 지옥은 반복이다. 이때 지옥과 반복은 이음동의어다. 지옥은 결코 바로크적인 현란함으로 우리를 현혹하지 않는다. 동서양의 지옥도는 하나같이 끔찍하고 외면하고 싶은 형벌을 세세히 묘사했지만, 그런 형벌을 거듭해서 몇 번 당하고 나면 그 정도쯤이야 간지럼처럼 받아넘길 수 있는 내성이 생긴다. 자꾸 하다 보면 불로 내 살갗을 지지는 형벌 따위도, 쑥뜸을 뜨는 일과 같아진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런 벌도 코딱지를 후비는 것만큼 시원한 일로 바뀐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지옥을 혹형의 세기로 오해하고, 그걸 묘사한게 바로 동서양의 지옥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옥을 좀 더 단순하게 이해해야 한다. 지옥이란 그냥 반복을 가리킬 뿐, 혹형의 강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게 될 때, 우리가 간구하게 될 사항은 뻔하다. 지옥에 던져진 우리가 바라는 희망은 단순하다. 이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달라는 것! 그럴 때,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크게 구해내는 건 사랑이다. 사랑만이 우리를 반복의 지옥으로부터 구해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랑은 바복의 지옥에 빠진 우리를 번쩍 들어 단숨에 변화의 신세계에 올려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은 것을 영원히 반복하고 싶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희망이다. 그것은 반복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반복 가운데서 쉬게 하고, 반복 가운데 힘을 얻게 하며, 반복 가운데서 자유를 얻게 한다. 우리가 죽지 않고도 겪게 되는 지옥, 바로 반복으로 점철된 '지금-여기'라는 삶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반복이라는 무의미한 형벌로 가득한 삶을, 반복이란 행위로 감싸고 돌파하는 양식이다.   -p179~181

"은, 내 말 들려?"
"응, 들려."
"「구월의 이틀」이란 시 기억나?"
"응, 나지. '현대 문화의 이해' 시간에 들었잖아."
"그래, 요즘 자꾸, 그 교수의 말이 생각나."
"뭐가?"
"지난 1년간이 우리들의 '이틀'은 아니었을까? 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러면 우리 청춘이 끝난 거네."
"그래, 우리들의 '이틀'은 끝났어."  -p303~304

 
   


장정일이 10년만에 내놓은 신작 소설.
그가 '생각'이라는 책에서 '20대 80'의 사회란 소설을 구상한 것에 대한 언급 이후로 소설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세상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독서를 통한 생각들을 정리한 '공부','생각' 그리고 '독서일기'를 제외하곤 작품활동이 뜸했는데 10년만에 '우익청년 탄생기'라는 주제로 '구월의 이틀'을 썼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쿡쿡거리거나 '그렇군!'이라고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작품엔 자신의 앞선 작품들이 패러디되어 녹아 있다. 보트하우스, 아담이 눈 뜰때, 중국에서 온 편지 등에서 보았던 기존의 표현들, 생각들이 그의 작품을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금새 눈치챌 수 있도록 녹아 있는데다가 현실 정치에 대한 풍자적 표현들이 기발하게 표현되어 읽는 재미를 더하게 만든다. 
 

재미난 반어적 표현 하나(참고로 이 소설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 배경이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들어선 교회에서 은은 별안간 가슴이 뛰게 하는 것을 목격했다. 수많은 신도들 가운데 유난히 귀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온화하고 사려 깊으며 인내심이 있어 보이는 그의 얼굴로부터 은은한 후광이 발했다. 3류 국가로 곤두박질하는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리신 분!
'바로 저 분이야! 나는 저 분을 위해 내 온몸을 바쳐야지!'
바로 서울시장이었다. 그 귀하신 분을 먼발치에서 본 이후로 은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은은 생각했다.

'누구나 자신의 누추한 심신이나 죄의식을 가려줄 위장이 필요하다. 종교는 그러기 위해 남녀노소 누구든 빌려 입을 수 있는 외투지, 바바리맨의 바바리코트 같은 것이지.'    -p311~312

책의 띠지를 왠만하면 버리는 내가 이 책의 띠지는 버리지 못했다. 장정일의 번뜩이는 눈빛이 살아있는 사진과
'내가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건, 한평생이 아니라 생의 어느 한 순간' 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매끈하고, 거친 듯하면서도 날렵하며, 무딘듯 하면서도 날카로운 장정일의 글.
이 책 이후로도 더 많은 작품이 쓰여졌으면 한다. 
 

사족 : 장정일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저질작가라고 말하는 사람들. 제발 책 좀 읽고 이야기하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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