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에 인용문을 입력하세요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또한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 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긋나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쌓아놓는, 이른바 순환의 톱니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가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며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크기는 오로지 그가 품고 있는 슬픔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크기에 다름 아닙니다. 슬픔이 정신 속에서만 자기를 발견하고 반추할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정신도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깊어지고 넓어지며 또한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p44

무릇 모든 것의 크기는 한계에 의해 규정됩니다. 어떤 것의 한계가 곧 그것의 테두리이며 이 테두리가 바로 어떤 것의 크기를 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체 없는 정신이 어떤 테두리가 있어서 그것의 크기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한계를 통해서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장애물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끝없이 자기를 확장하려 하면 할수록 보다 더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의지가 저항에 직면할 때 왜소한 정신은 그 저항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처럼 의지가 저항에 굴복하는 지점이 정신의 테두리요 한계입니다. 그러나 강건한 정신은 저항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앞의 저항을 초월해갑니다. 그리하여 장애물을 초월하는 정신은 바로 이 초월을 통해 자기의 크기를 부정적으로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그런 정신은 자기가 어떤 장애물에 의해서도 한계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자기의 광대무변한 크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중략>

오직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만이 정신의 크기의 표짓돌이 됩니다. 의지는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 앞에 설때 시험받습니다. 굴복하느냐 아니면 넘어가느냐. 굴복한다는 것은 장애물 앞에서 자기의 욕구를 꺾고 그것의 요구와 타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정신이 추구하는 가치들 가운데에는 어떤 장애물이 앞에 선다 할지라도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강건한 정신은 이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정신은 끊임없이 장애물을 넘어감으로써 자기의 크기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p64~65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언제나 사회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는 나라의 법칙을 따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사회 내가 사는 나라의 법칙과 질서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나에게 강요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라야 한다면, 그때 나는 내 삶의 주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온전한 의미에서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나랏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와 나라의 법과 질서를 스스로 형성하고 다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사회 속에서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우리 자신이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입니다. 그리스인들의 자유는 단지 소극적인 자유로서 누구에 의해서도 억압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외적 강제로부터 멋어나 있음을 뜻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 참여를 통하여 세상을 능동적으로 형성해나가는 것에 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도 그리스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였습니다.즉 그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자유는 종교적, 학문적 수양이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p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의 일은 말하기 어렵다. 마음의 나라는 멀고멀어서 자욱하다. 마음의 나라의 노을과 바람과 시간의 질감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를 면회가면서 알았다.   -p11

철망 너머로 시가지의 불빛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다가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생각은 쉽게 그만두어지지 않았다.    -p13

누적된 과거와 거기에 서식하는 인연이 인간의 삶을 채워주고 지탱하주기보다는, 동의 없이 간섭하고 미리 조건지음으로써 삶을 무력화하고 헝클어뜨리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하다가 여고 시절에 나는 때때로 난생하는 새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p29

돈이 떨어지면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돌이켜본다'는 이 말이 도덕적으로 반성은 아니다. 돌이켜본다는 말은 돌이켜 보인다라고 써야 옳겠다. 보여야 보이는 것이고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닐 터이다. 돈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겨우 보이는 수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돈 떨어진 앞날에 대한 불안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계가 막막해진 저녁에 오래전 죽은 말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는 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돈이 들어올 전망이 없어지면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던 그 구매력이 빠져나가면서 돈의 실체는 드러나는 것인데, 돈이 떨어져야 보이게 되는 돈의 실체는 사실상 돈이 아닌 것이어서, 돈은 명료하면서도 난해하다. 돈은 아마도 기호이면서 실체인 것 같은데, 돈이 떨어져야지만 그 명료성과 난해성을 동시에 알 수가 있다. 구매력이 주는 위안은 생리적인 것이어서 자각증세가 없는데, 그 증세가 빠져나갈 때는 자각증세가 있다. 그래서 그 증세를 느낄 때가 자각인지, 느끼지 못할 때가 자각인지 구벼ㅕㄹ하기 어렵다. 돈이 떨어져봐야 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증세는 생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생리 그 자체여서 기기에 약각의 속임수가 섞여 있어도 안정을 누리는 동안 그 속임수는 자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끊어버리고 돌아설 수 없는 것들, 끊어내고 싶지만 끊어낼 수 없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존재의 탯줄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온 온갖 허섭스레기들의 정체를 명확히 들여다보려면 돈이 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돈이 떨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p46~47

냄새와 환영과 기억들은 한꺼번에 내 마음의 오지에서 피어올랐다. 냄새는 늘 비논리적이면서, 찌를 듯이 달려들었다. 그것이 실제인지 헛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헛것이라 해도 헛것의 주술력으로 실체를 눈앞으로 끌어당겨놓는 힘이 있었다.  -p62

어두워지는 시간에는 먼 것들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슴푸레한 박모의 시간보다는 아주 캄캄해진 시간이 더 편안하다.   -p94

검은색만이 흰색을 표현할 수 있었는데, 검은 수채물감을 풀어서 검은색이 사위는 자리에 흰색을 드러내는 것은 흰색 물감을 풀어서 새카만 꽃잎을 그리는 일과 같았다.

<중략>

검은색을 이끌고 흰색으로 가는 어느 여정에서 내가 작약 꽃잎 색깔의 언저리에 닿을 수는 있을테지만, 기름진 꽃잎이 열리면서 바로 떨어져버리는 그 동시성, 말하자면 절정 안에 이미 추락을 간직하고 있는 그 마주 당기는 무게의 균형과 그 운동테의 긴장을 데생으로 표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지를 머뭇거리는 동안에 5월은 거의 다 지나갔고, 숲은 푸르고 깊었다.  -p142~143

병법은 이쪽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싸움의 원리는 병법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고 병법 밖의 어디엔가에 있는 것이라고 그 부사관은 말했다.   -p167

노부부는 아주 오래 살아서, 지나간 삶의 그림자처럼 얇고 가벼웠다. 오래 살면 가벼워지는 모양이다.   -p212


안쪽 룸에서, 술취한 병사들이 합창으로 노래했다. 병사들의 노랫소리는 유흥이라기보다는 악다구니였다. 군가와 음가를 번갈아가며 불렀다. 삶을 견디는 것은 저렇게 힘들고 쓸쓸한 일이었다.  -p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내 앞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운좋게 피해갈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p286~287

 
   

천명관의 새로운 장편 소설. 도서관에 갔다가 빌려왔다. 별 기대 안했는데 책을 펴고는 손에서 놓질 못해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고래'만큼의 충격은 아니지만 솔직하고 노골적이며 재미난 입담은 여전한 듯하다. 소설 속의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려는 그의 생각은 마지막 장에 적혀있는 윗 글에 다 들어있는 듯 하다. 남들 보기에 뭣하고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지질한 인생일지라도 그 인생 또한 그만의 삶이고 역사이기에 의미 있다는 것.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무기력하고 지질한 날들이었는데 간만에 재미난 책 한 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방의 사색 - 시골교사 이계삼의 교실과 세상이야기
이계삼 지음 / 꾸리에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이계삼 선생님께.  

선생님께서 새롭게 책을 내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더불어 선생님께서 해제를 쓰신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도 같이 구입을 하였지요. 하지만 책을 바로 읽지는 못했습니다. 읽고는 싶었으나 왠지 책을 펼지기 망설여지더군요. 선생님의 전작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 '삶을 위한 국어교육' 그리고 간간히 '녹색평론' 등에서 만난 선생님의 글들은 같은 교사 생활을 하는 저에게 정말 큰 충격을 주었고, 또 반성하게 했으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게 하는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암담한 교육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를 날것으로 묘사하면서 제가 느끼고 있던 그 무기력함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여 선생님의 책은 읽고 싶으면서도 쉽게 손에 쥐고 넘길 수 있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책을 구입하고 며칠을 바라보고 고민했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다가 휴직을 하게 되었고, 쉬는 동안은 학교나 교육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온전한 저를 찾고 싶었습니다. 제가 읽고 싶었던 책도 좀 읽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싶어 소설책 몇 권 읽고, 사회과학 책들도 몇 권 읽고 그렇게 학교와는 거리를 두었지요. 하지만 결국 제가 관심을 갖고 읽게 되는 것, 그리고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저를 다독이던 것은 교육현장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사회과학 책을 읽다 내가 글자만 읽고 있구나 싶은 생각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현장에서 느낀 저의 무기력함과 좌절감의 원인들, 그리고 그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이 담긴 메시지들이 문자로서의 글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글로써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책 뒤의 선생님의 해제를 보면서 더더욱 감동을 했더랬지요. '일개 한 명의 교사에 불과한 내가 과연 무얼할 수 있을까' 하는 한탄과 그에 따른 무기력과 좌절을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한탄은 무의미하다'라고 일갈하셨지요. 선생님의 그 말에 저는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그냥 그 자리에서 한탄만 하고 있었구나 하고 반성을 했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 여러군데에 실으셨던 글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이미 읽은 글도 있고, 새로운 글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그 뜨거운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시골학교라도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의 일과는 너무나 고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 8시까지 출근에 자습 감독, 7교시까지의 정규수업, 8교시 보충학습 9,10교시 야간 자율 학습 감독 혹은 야간 수업. 때론 11시 12시까지 계속되는 심야야자 감독까지 그 속에서 교재연구며, 공문처리며, 학생 상담, 청소지도, 생활지도, 학부모 상담 등 지치기 쉬운 그 일과 가운데서도 선생님께서는 지역 사회 운동이며, 전교조 모임, 녹색평론 모임, 원고 기고, 강연 등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고 느끼신 것을 그렇게 고스란히 글로써 표현하시고 책으로 내셨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저는 일상의 피곤에 짖눌려 무언가 하나를 제대로 한다 생각 못했던 저에게 죽비를 내려치시는 듯 했지요. 그리고 책 속에서 만난 내용들은 교사로서 혹은 시민으로서 느꼈던 저의 생각과 느낌이 더욱 심화되고 확장되어 나타나 있기에 감탄을 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에 부산에서 선생님을 만나뵙고 학교생활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을 이야기했었죠. 선생님께서는 그때 저에게 '모든 것이 헛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고, 살아가면서 또 싸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하시는 많은 일들을 그만 두더라도 끝까지 하고 싶은 일은 아이들 옆에 있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말이 참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오늘날 학교는 갈곳 없는 아이들이 억지로 모여 있는 곳, 유일한 학력 인증 및 졸업장 수여 기관, 아이들이 공부보다 잠을 자기 위해 오는 여관으로서의 기능 밖에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을 안아주고 믿어주고 싶은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나 간절히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저 곁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직시하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행동으로서 보여주심으로써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하, 그림자가 없다'의 경우 가을에 핀 벚꽃과 관련한 뉴스를 듣고 '사유하지 않는 삶'에 대한 선생님의 깊은 성찰은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평소 학교 교사의 역할이 꼭 사유하지 않는, 제 역할에 성실한 공무원이었던 '아이히만'과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사유하지 않는 삶'이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현상과 그에 대한 깊은 사유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4대강 사업, 촛불시위 등 다양한 사회 제재와 관련한 시민으로서의 선생님의 사유는 교사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오늘날 교사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사들 또한 무한 경쟁을 뚫고 힘겹게 교사라는 안정된 직함을 가지게 되었기에 사회의 주류로서 편안하게 살아가고픈 욕망이 큽니다. 안정된 직장에 적당한 월급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삶이란 취업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던가요. 그러기에 저를 포함한 많은 교사들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대로 안일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같은 분을 통해 자신의 안일한 삶을 반성하게 되고, 다시 한 번 교육 현장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선생님께서 더 많은 글을 쓰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의 현실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알려주시고,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는 용기와 힘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선생님의 건강도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부지런한 선생님 활동에 혹여 몸에 무리나 가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앞으로 종종 현장에서, 또는 지면에서 만나뵈었으면 합니다. 교사로서 또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도록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2011년 9월 가을 어느날. 김해에서 여름 드림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도덕은 근본적으로 주의집중의 문제"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 교육은 만남이며, 부딪침이라는 것, 공장의 노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달라야 한다는 것,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하루 종일 모니터를 바라보는 교육 현장에서 교육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이 모든 사실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아닐까? -p24 

교육은 애초부터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아이들에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 '몸과 시간'을 구속함으로써 성립하는 근대 교육의 본원적인 한계가 작동하고 있다. 거기에 '인적 자원'의 등급 감별에만 골몰하는 한국 교육의 극악한 현실이 엎어져 있다. 너무 힘이 들어 학교 바깥으로의 탈주를 여러 차례 꿈꾸기도 헀지만, 나 또한 이 바닥에 머물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안락에 어느 순간 나도 물들어버렸기 때문에,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리라.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보라"고 카를 마르크스가 인용했던 이솝우화의 한 대목,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라는, '지금 여기'를 버리고서는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다는 진리의 무게를 조금씩 가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p29 

사랑한 만큼 사랑받고, 이해한 만큼 이해받는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과 성실성만큼 스스로의 삶이 자유와 행복으로 충만한다. 삶에 대한 책임과 성실성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자존감이라고 나는 믿는다. -p90 

아이들 본연의 모습은 유희의 공간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충분히 놀아야 한다. 그리고 충분히 인격적으로 대우받아야 하며, 자신에게 찍힌 '낙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히 '섞여 있는' 환경 속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p105 

그러나 나는 믿는다. 시인 김수영이 노래했듯, "바람은 딴 데서 불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데서" 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믿는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성찰의 힘이, 그리고 흙 속에서 노동하며 흘리는 땀방울이 이 모든 참담한 왜곡과 파행을 바로 잡아 주리라는 것을. -p109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것이 가장 위험하다. 하나의 '대세'에 편승하여 "난들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식으로 스스로의 공모를 합리화하면서 일구어온 전체주의적 질서는 근본적으로 자기 행동의 도덕적 윤리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지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으려는' 데에 기인한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 모습 바로 그 자체가 악이다. 이게 악의 진부함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었다. -p335 

일상의 마디마디, 매듭마다 꿈틀거리는 본절직인 것과의 연관을 끊임없이 스스로 잘라냄으로써 의식의 진공상태가 조성한 평화로움에 젖어 있고자 하는 것, 그리하여 생활은 껍데기로만 존재하며 자기 존재를 건 의식의 모험은 가급적 회피되고, 그 속에서 미디어와 시스템이 마련한 침대에 자발적으로 결박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망각'이 아닐까? -p3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