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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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일은 말하기 어렵다. 마음의 나라는 멀고멀어서 자욱하다. 마음의 나라의 노을과 바람과 시간의 질감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를 면회가면서 알았다.   -p11

철망 너머로 시가지의 불빛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다가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생각은 쉽게 그만두어지지 않았다.    -p13

누적된 과거와 거기에 서식하는 인연이 인간의 삶을 채워주고 지탱하주기보다는, 동의 없이 간섭하고 미리 조건지음으로써 삶을 무력화하고 헝클어뜨리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하다가 여고 시절에 나는 때때로 난생하는 새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p29

돈이 떨어지면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돌이켜본다'는 이 말이 도덕적으로 반성은 아니다. 돌이켜본다는 말은 돌이켜 보인다라고 써야 옳겠다. 보여야 보이는 것이고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닐 터이다. 돈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겨우 보이는 수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돈 떨어진 앞날에 대한 불안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계가 막막해진 저녁에 오래전 죽은 말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는 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돈이 들어올 전망이 없어지면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던 그 구매력이 빠져나가면서 돈의 실체는 드러나는 것인데, 돈이 떨어져야 보이게 되는 돈의 실체는 사실상 돈이 아닌 것이어서, 돈은 명료하면서도 난해하다. 돈은 아마도 기호이면서 실체인 것 같은데, 돈이 떨어져야지만 그 명료성과 난해성을 동시에 알 수가 있다. 구매력이 주는 위안은 생리적인 것이어서 자각증세가 없는데, 그 증세가 빠져나갈 때는 자각증세가 있다. 그래서 그 증세를 느낄 때가 자각인지, 느끼지 못할 때가 자각인지 구벼ㅕㄹ하기 어렵다. 돈이 떨어져봐야 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증세는 생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생리 그 자체여서 기기에 약각의 속임수가 섞여 있어도 안정을 누리는 동안 그 속임수는 자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끊어버리고 돌아설 수 없는 것들, 끊어내고 싶지만 끊어낼 수 없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존재의 탯줄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온 온갖 허섭스레기들의 정체를 명확히 들여다보려면 돈이 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돈이 떨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p46~47

냄새와 환영과 기억들은 한꺼번에 내 마음의 오지에서 피어올랐다. 냄새는 늘 비논리적이면서, 찌를 듯이 달려들었다. 그것이 실제인지 헛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헛것이라 해도 헛것의 주술력으로 실체를 눈앞으로 끌어당겨놓는 힘이 있었다.  -p62

어두워지는 시간에는 먼 것들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슴푸레한 박모의 시간보다는 아주 캄캄해진 시간이 더 편안하다.   -p94

검은색만이 흰색을 표현할 수 있었는데, 검은 수채물감을 풀어서 검은색이 사위는 자리에 흰색을 드러내는 것은 흰색 물감을 풀어서 새카만 꽃잎을 그리는 일과 같았다.

<중략>

검은색을 이끌고 흰색으로 가는 어느 여정에서 내가 작약 꽃잎 색깔의 언저리에 닿을 수는 있을테지만, 기름진 꽃잎이 열리면서 바로 떨어져버리는 그 동시성, 말하자면 절정 안에 이미 추락을 간직하고 있는 그 마주 당기는 무게의 균형과 그 운동테의 긴장을 데생으로 표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지를 머뭇거리는 동안에 5월은 거의 다 지나갔고, 숲은 푸르고 깊었다.  -p142~143

병법은 이쪽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싸움의 원리는 병법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고 병법 밖의 어디엔가에 있는 것이라고 그 부사관은 말했다.   -p167

노부부는 아주 오래 살아서, 지나간 삶의 그림자처럼 얇고 가벼웠다. 오래 살면 가벼워지는 모양이다.   -p212


안쪽 룸에서, 술취한 병사들이 합창으로 노래했다. 병사들의 노랫소리는 유흥이라기보다는 악다구니였다. 군가와 음가를 번갈아가며 불렀다. 삶을 견디는 것은 저렇게 힘들고 쓸쓸한 일이었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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