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한국사' 시리즈 3권.  재물과 권력을 향한 욕망의 인물사 '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

책에 등장하는 아홉 명(송유인, 충혜왕, <이인임,염흥방,지윤>, 조말생, 박원종, 장현, 박종신, 민영휘, 이지용)의 공통점은?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다른 누구보다 강했던 인물들이다.   

부정부패에는 홍길동의 몽둥이 찜질이 제일인데...ㅋㅋ

이들 중에는 권력을 위해 아내를 바꾼 자(송유인)도 있으며, 어떤 이는 자신의 주군을 몰아낸 이(박원종)도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료에 나타난 이들의 면면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고려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시대상을 투영한다.  

빨리 읽고 싶다..맘껏 썩을것들이라고 ....떠들어 볼 예정~

 

 책 소개를 보자~

망국에 이르는 병, 부정과 부패
권력의 획득과 부의 축적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국가가 국가다운 체제를 유지하지 못할 때 자연히 각종 비리와 불법이 판을 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려의 송유인은 무신정권기의 혼란함을 설명하는 수단이 되며, 권세가 이인임과 염흥방, 환관 지윤은 원나라에 의해 국왕의 거취까지 결정되던 고려 말 암흑기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전형이 된다. 또한 조선의 시골 수령 박종신은 세도정권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던 구한말 모습의 여러 단면들 중 하나다.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부정한 재물과 권력의 추구는 시대와 사회의 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사회현상이자 그 시대의 자화상이며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하나의 지표로 이야기한다.

돈과 권력의 결합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책은 숙종 대 역관가문으로 조선에서 이름난 부자였던 인동 장씨가 자신들의 재물을 이용해 남인 세력의 권력과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동 장씨의 재물을 통한 '로비'의 결과 그들 가문의 여식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왕비가 되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획득한 권력은 그 뿌리가 단단하지 않은 법이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 인동 장씨 가문은 "역관 활동으로 모은 재물로 대저택과 호화로운 의복 등 사치가 극에 달했으며 정계의 정승, 판서들과 서로 결탁해 음흉한 모의를 기도"한 죄목으로 정계에서 축출을 당한다.

나라를 팔아 얻은 재물과 권세
저자는 이 책에서 민영휘와 이지용을 통해, 구한말 일제 초 재물 축적을 위한 경제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전현직 고위 관료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한일병합 이전 이미 백성들의 토지와 금전 등을 수탈하고 매관매직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이들이 그렇게 모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일제에 봉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지킨 재산이 온전히 보존되지는 않았다. 왕실 종친이기도 한 이지용은 한일병합 후 한동안 도박에 빠져 일제에 의해 받은 귀족 작위가 몰수되기도 한 사실이나, 민영휘에게 토지와 재산을 수탈당한 이들이 제기한 소송의 사례를 확인하는 것은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재미다. 
  

여기에 나온 재물과 권력의 똥개들을.. 대략 알려진 걸로만 한번보자...가관일세~~   

송유인(宋有仁  언제태어났는지도 모름 ~ 1179)  

고려시대의 무신 수없이 많은 권력 중심의 자리에 있었음.얘기하기도 입아퍼~  정중부(고려시대의 무신. 왕이 무신을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왕의 보현원 거둥 때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의 사위,
송나라의 거상 서덕언의 처와 결혼했으나 무신의 난으로 정중부가 권력을 쥐자 아내를 내쫓고, 정중부의 딸과 결혼..정중부를 등에 없고 인사권을 장악하고, 왕 못지않은 호화생활을 하며 그 위세를 더럽게 떨쳤음.. 경대승(1154~1183)고려의 무신으로 1179년 정중부(鄭仲夫)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도방(都房)을 설치하고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고루 등용하여 무신정변으로 와해된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1183년 30살의 나이로 병사)에 의해 정중부의 일족과 송유인도 살해되었다.  

 

충혜왕 [忠惠王, 1315 ~ 1344]  

고려 제 28대 왕. 충숙왕의 아들, 1330년 왕위에 올랐으나 방탕하고 주색을 일삼아 왕위를 다시 부왕 충숙왕에게 넘긴 뒤, 원나라로 돌아가야 했다.돌아가서도 황음광포한 짓을 계속하였다. 1339년 복위하였으나 방탕한 짓을 일삼았다. 1343년에는 총애하는 은천옹주를 위해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이인임(李仁任, ?~1388)  그의 졸개들 지윤,염흥방..

고려시대의 문신, 공민왕의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으 동녕부를 정벌로 광평부원군에 책봉.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자 우왕을 추대하여 정권을 잡고, 친원외교정책을 행하며 친명파를 제거했다.그후 충복인 지윤, 염흥방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매관매직,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을 일삼았다. 이들은 흉악한 종들을 전국으로 보내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덮어놓고 물푸레나무로 곤장을 쳐서 강탈하였는데, 그 임자가 국가에서 발행한 토지 문서를 가지고 있어도 감히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때 사람들이 이것을 '물푸레나무 공문'이라했다. 그후  최영,이성계에 의해 안치되었다가 죽었다.

 
조말생(趙末生, 1370년 ~ 1447년)  

조선의 문신이다.태종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무수히 많은 벼슬을 했다.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그러나  세종 8년(1426년)에 우의정 조연, 곡산부원군 연사종과 함께 병조판서 조말생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죄목은 장오죄(贓汚罪). 관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정하게 이익을 취하는 범죄, 오늘날의 뇌물수수죄에 해당한다. 민간의 노비소송을 몰래 거들어주고 노비를 뇌물로 받은 혐의였다. 결국 이들은 귀양을 떠나야 했다.  병조판서로서 파저강을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조말생.. 세종은 그를 사사시키라는 언관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충청도에 유배를 보냈다가 곧 복귀시킵니다. 그리고 조말생으로 하여금 여연군 침략에 대비하게 합니다. 이후 조말생은 파저강 토벌과 여진족 재침략 대비와 변방수비, 사민정책 등을 추진하며 세종의 신임에 부응하게 됩니다. 

 

박원종(朴元宗, 1467년 ~ 1510년) 

조선전기 무신, 무술이 뛰어나 음보로 무관직에 기용되었다. 중종을 옹립하는 반정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정국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진다.중종초 박원종의 의정진출로 의정부의권한이 강화되기도 했다.중종반정의 주모자인 박원종 등 1등 8명에게는 토지 150결과 노비30명을 주었는데 여기서 결이란 조선시대 토지면적을 말하는 단위로 1결이 2,700여평으로 150결은 41만평이다. 와~ 대지주다.중종반정의 일등공신 박원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호사스런 주택을 소유한 사람으로 꼽힌다. 박원종의 집을 찾은 사람이 그의 처소에 이르려면 안대문만 다섯을 지나야 할정도였다니 그 규모와 사치가 가히 짐작이 간다..후 와~~ ,1613년~?)  

 

장현( 張炫

조선 인조~숙종때의 역관으로 희빈 장씨의 아버지 장형의 사촌형제이다. 인조17년에 역과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고, 역관의 수장이며 당대의 갑부로  역관장현 국중거부라는 별칭도 있었다니 ....돈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거야?  당시 청나라는 일본과 교류를 단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교역대신 조선의 왜관을 통해 중국문물을 구해서 이 중계무역으로 당시 역관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현역시 중계무역을 통해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그는 병자호란후 왕자들을 수행하여 중국에가서 6년을 머무는 동안 왕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덕분에 특권무역을 하며 부를쌓지 않았을까?  숙종 대 역관가문으로 조선에서 이름난 부자였던 인동 장씨가 자신들의 재물을 이용해 남인 세력의 권력과 결합 인동 장씨의 재물을 통한 '로비'의 결과 그들 가문의 여식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왕비가되었지..훗`  아~ 책 읽어보자!! 

 

박종신(臣 )  

 순조11년 황해도 곡산부의 농민이 환곡운영의 폐단과 수령의 수탈에 반발하여 관에 저항한 사건을 곡산민란이라고 하는데..그 때 곡산부사가 박종신이다. 박종신은 읍폐를 고친다는 명분으로 아전과 향임의 환곡운영권을 탈취하였고, 부민의 곡식을 침탈했다. 이에 곡산농민들은 관에 저항했고 부정한 관리를 내쫓은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 이 난으로 박종신은 유배되었다. 19세기 초 농민항쟁으로 농민의 패배로 끝났지만, 몇개월뒤 홍경래의 난이라는평안도 농민항쟁으로 비화되었다. 아~ 이것도 책 읽어보자! 

   

민영휘 (閔泳徽, 1852 ~ 1935) 

명성황후의 척족의 세력을 배경으로 정계에 진출,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동학농민운동때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임오군란때 탐관오리로 유배되었다. 일본의 강제병합후 화려한 친일행각의  공로로 일본정부의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거액을 투자해서 천일은행과 휘문학교를 설립하였다. 민영휘는 관직에 있을때 수탈한 재물을 이후에 잘불려, 일제강점기동안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사람이다.

 이지용(李址鎔, 1870~1928 ) 

친일파 , 민족반역자. 19014년 외부대신서리로 한일의정서를 협정 조인하고,내부대신으로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의 한 사람..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다. 일본이 주는 백작의 칭호도 받고 일본천황의 생일에 초대도 받고.....1912년 도박죄로 태형을 선고받으며 작위도 몰수되었다. 썩을것들...
 

* 함께 읽으면 더 재밌고 도움되는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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