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한국사> 시리즈가 출간되는 의미는?
역사가 외면한 과거, 새로운 의미 찾기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의 즐거움!
지금의 우리가 읽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임과 동시에 누군가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흔적이다. 그렇게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사실은 단지 ‘기록’으로만 남아 후세에 전한다.
이에 <틈새 한국사>는 그 동안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기록들을 찾고자 한다. 그 기록들은 ‘인물’일 수 있으며, ‘문화’나 ‘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간과한 과거의 기록들이 이 시리즈에서 의미를 가진 또 하나의 역사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역사는 의식적으로 외면했거나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있었나?
역사의아침 '나는 불온한 선비다' 에서는 조선을 지배한 사상적, 정치적 경향과 다소 거리가 있는 그래서 그들과는 다른 꿈을 꾸며, 다른 삶을 살고자하는 9명의 사상가를 이야기 한다.
이들을 통해서 그들의 남다른 일생, 그들의 사상과 사회인식을 엿보고,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조선을 살펴본다. 더불어 그들에게 배울점, 그들의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어떤 의미를 줄지도 한번쯤 생각해 봄도 바람직할것같다.
광인 김시습, 비범한 보통인 서경덕, 반주자학자 박세당, 양명학자 정제두, 시골 서생 이익, 과학사상가 홍대용, 천주교인 이벽, 역사에서 사라진 유수원, 경험주의자 최한기가 바로 그들이다.
그때의 역사속에서 그들을 보면 사상이나 태도가 체제와 통치권력에 맞서는 불온한 사람들로 보이지만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 ...그들의 사상에서 난 희망을 느낀다.
자세한 그들의 모습은 책으로 보고 그분들을 한번 가벼이 살펴보자..
1장 공명과 지조 사이에서 고뇌한 ‘광인’ _ 김시습
당대의 권력자의 글에 사정없이 비판과 조롱을 서슴지 않았던 매월당 김시습 . 조선 최고의 지식인, 문학가, 사상가였으면서도 평생을 떠돌아다녔던 매월당. 당대의 천재였지만 그는 추악한 세태를 증오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소설들을 썼다. 그가 남긴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으로 남았고, 그의 독특한 이미지는 전설이 됐다.
세살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는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1493(성종 24))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5세에 이미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장래에 자못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한다. 그러나모친의 사망, 부친의 무능, 계모의 등장, 결혼생활의 불행등 가정사도 불행했고,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고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굳게 지키며 불교와 유교의 사상을 아울러 포용한 사상과 탁월히 뛰어난 문장으로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존경하며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려 하였다. 그뿐 아니라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들도 그의 전반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493년 (성종 24년) 59세에 부여 무량사에서 운명했다.
2장 자연에 자신의 삶을 맡긴 ‘비범한 보통인’ _ 서경덕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년(성종 20)∼1546년(명종 1)은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하며,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였다.집안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낙으로 평생을 살았다. 박연폭포(朴淵瀑布)·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격물(格物)을 통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독창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을 제창하였다.주요저서로는 화담집이있다.
3장 반주자학의 길을 간 ‘타고난 반항아’ _ 박세당
서계 박세당(1629(인조 7)∼1703(숙종 29))은 조선 후기의 학자. 당시의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계의 반대입장에 선 반주자학자였다.소론(少論) 계열로서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과 개인적·정치적 대립관계에 있었던 그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친청(親淸)정책으로 실리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론자들에게 '오사(五邪)'의 하나로 지탄받았다. 학풍과 사상 연구에서 벗어난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를 강조하였다.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少論系)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 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사서(四書)와 서경·시경을 주해한 책≪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함으로써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그 직후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다.
서계 박세당은 만년에 자손들에게 남긴 '계자손문(戒子孫文)'에서 "늘 근신하고 천사람의 뒤에 종적을 감추라"며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 자신이 죽은 후에는 상례를 간소화해 무늬가 있는 비단을 쓰지 말고,3년 상식(上食)은 예가 아니므로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의 제사) 후에는 그칠 것 등을 강조했다. 또한 독서와 학문,교제를 충(忠)과 신(信)에 근본할 것을 강조하고 혹시 재물이나 아내가 꾸민 말로 형제 간에 다투는 일이 없도록 경계했다
4장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찬 ‘행복한 이단자’ _ 정제두
하곡 정제두鄭齊斗 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는 조선 후기 유학자,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연구,발전시킨 양명학자이다.20여 세 때부터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하였고,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가학으로 강화학파를 형성했다.정제두가 후학에게 남긴 말 중의 하나가 의연후취(義然後取)다. ‘욕을 버리고 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을 안 후에 취하라’는 것이다.
5장 시대의 모순을 이야기한 ‘시골 서생’ _ 이익
이익 (李瀷, 1681~1763) 조선 후기 실학자로 사회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학문과 양반도 생업에 종사하라느 사농합일(士農合一) 이론을 주장하였다 .농사를 짓던 경험에서 토지와 농경생산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익은 이를 중심으로 한 경제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그 근간이 토지제도의 개혁이었다. 그는 한전론을 통해 개인의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한정하여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빈부의 양극화를 막는 길이라고 하였고, 농민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여론과 평판에의해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서 채용하는 공거제(貢擧制)를 함께 실시할 것과 병역문제는 향병제(鄕兵制)를 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기의 개발과 군마(軍馬) 양성, 성지수축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등 여려 방면에 걸친 일대 혁신을 주장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을 꿈 꾼 이익은 많은 제자를 두고 자신의 호를 딴 성호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주요저서로는 자신의 개혁사상을 풀어 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과 그 외 다수가 있다.
6장 세계로 향한 창을 연 ‘과학사상가’ _ 홍대용
홍대용 (洪大容, 1731 ~ 1783)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조선최고의 과학사상가이다.서장관으로 북경 사행에 참여한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군관, 즉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그의 중국 여행은 세계관을 변화시킨 큰 경험이었다. 중국을 다녀 온 뒤 을병연행록도 남겼다. 그가 지은 과학사상에 관한 저술[의산문답]은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비견되는 글이다. <의산문답>은 가상 인물인 실옹(實翁)과 허자(虛子)가 펼치는 대담 형식으로 되어있고,30년간 성리학을 익힌 허자가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다가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 자신이 그 동안 배운 학문이 헛된 것이었음을 풍자한 놀라운 작품이다.
7장 시대와 가족이 외면한 ‘조선 천주교의 선구자’ _ 이벽
이벽 李檗, 1754~1786 한국천주교 창립의 주역이었던 광암 이벽(李檗),이벽이 추구한 것은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변혁. 때문에 이벽은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외에 다양한 학문을 공부한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학문을 공부하던 그는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깨우친다. 그리고 천주교를 종교로서 받아들이고 정약용, 정약전, 권철신 등 당대 선비들에게 천주교라는 사상을 전한다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과 교유하였다. 이벽은, 그를 형제들처럼 무관으로서 출세시키려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결국은 서른둘의 나이로 병사했다고 전해지는 이벽. 그간 천주교에서는 이벽을 배교자로 보는 시각이 팽배했다. 그가 배교자로 지목된 이유는 단하나, 아버지의 자결앞에서 신앙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는 의견이 부각되고 있다. 이벽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또한 그의집안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계속된느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박해로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라는 것이다.
8장 역사에서 사라진 ‘비운의 사상가’ _ 유수원
유수원 1694년(숙종20)~ 1755(영조3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이다. 소론이었던 유수원은 같은 소론계 영의정 조태구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받아 파직되었다.숙종-경종-영조로 이어지는 이 시대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시대’였고 또한 정치적, 사회적인 격동기였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에 달한 것은 경종 때였다 숙종 말 경종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던 소론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지지한 노론 사이에 나타난 정쟁.. 경종때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고 다시 노론의 시대가 왔다. 그의 삶은 당쟁의 여파로 힘들었지만 학문과 경륜이 뛰어나며, 유형원, 이익,정약용과 함께 실학자의 한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저서로 사회개혁안을 제시한 책, 중상주의 경제학의 고전인 우서(迂書)가 있다.그는 18~19세기 수많은 실학자들을 매료시킨 중상주의 경제학 이론을 개척하다시피 한 선구자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조선의 부국과 백성의 안민을 위한 정책개혁을 .즉, 사농공사의 신분질서 및 차별철폐, 상업적 농업,상공업의 발전 그러니까 사회개혁+경제개혁에서 찾고 있다. 영조때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소론의 숙청작업에 희생양?
9장 인간 본성의 선천성을 부인한 ‘경험주의자’ _ 최한기
혜강 최한기 崔漢綺 1803(순조3)~1877(고종16), 기존의 동서양의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한 수많은 연구 저서를 내고 한국의 근대사상이 성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평생 학문에 정진하여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와 교분이 두터웠다. 최한기는문(文)·사(史)·철(哲)의 종합적 동양학의 틀에서 머물지 않고 물리·천문·지리에서 의학 등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기학(氣學)’ 즉 개인과 사회와 자연이 질서있고 조화롭게 순환과 변화를 통해 발전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 각국인을 가르치고 잘 인도하여 전인류가 화합하는 이른바 “兆民有和”의 세계를 목표로 하는 사상을 가졌다. 수많은 저작을 통해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고, 사물을 수학적,실증적으로 파악할것을 주장해 한국 사상사에 근대적 합리주의를 싹트게 했다.그의 학문적 관심은 세계 인문·지리·천문·의학 등 실로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