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너는 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허술한 기억이 무엇을 간직하게 할지 너는 안다.

 

 

 

여든한 살에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많이 늙어도 참 괜찮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절필을 선언해버린 나이 든 필립 로스의 결심이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트레버가 늙고 또 나이 들어 다시 한번 젊은 남녀의 사랑에 충분히 이입하며 그 안에서 유장한 삶들을 담을 수 있다,는 예시는 그의 결심을 아쉬운 것으로 만든다.

 

6월의 초저녁, 아일랜드의 라스모이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는 설명만으로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이 소박한 작은 마을의 코널티 부인의 장례식으로 이야기는 풀려 나간다. 장례식은 물론 망자의 것이기에 어느 정도 아쉽고 슬프지만 그 장례식으로 인해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었고 끝났으니 존중받을 만하다. 남은 남매는 이미 충분히 나이든 중년의 코널티 남매다. 누이는 젊은 시절 사랑을 잃었고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라스모이 마을의 '광장 4번지'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고 남동생 조지프는 이런 저런 코널티 가가 남긴 저탄장 등 마을의 시설들을 관리하게 된다. 사랑은 우연히 장례식 날 출사를 나온 청년 플로리언이 수녀원에서 지내다 가정부로 왔다 주인의 아내가 된 엘리에게 길을 묻다 피어난다. 나이 든 코널티 양은 이 은밀한 여름의 우정, 사랑을 자신의 그것에 빗대어 목격한다. 신분 차에서 시작된 결혼 반대로 사랑의 도피를 한 부모의 유산인 저택을 처분하며 이미 떠나기로 예정된 플로리언과 유부녀이자 아내와 아이를 실수로 죽게 한 나이 든 남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엘리의 교감은 이미 해피엔딩을 가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랑을 둘러싸고 흐르는 라스모이 마을 사람들의 삶의 정경은 단조롭지만 평화롭고 아름답다. 저마다 잃어버린 것들이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그들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양을 치고 농사를 짓고 밥을 짓고 서명을 하는 등의 생업, 일상을 영위하며 그 틈새를 흐르는 생의 저류는 어쩐지 눈부시다. 트레버의 언어는 간명하고 절제하고 빛난다. 그의 언어를 통과해 나온 삶은 어떤 것이라도 충분히 위대해 보여서 눈물이 난다. 사랑도 고통도 이별도 중언부언하거나 과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깔끔하게 떨어진다. 언어가 이 삶의 난삽함을 이겨낸 듯하다. 그것이 착각일 지라도 그가 정리한 삶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어서 삶을 살 만한 것이라 믿게 만든다.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정말 그렇다. 마침내 사랑의 도피를 포기하고 남게 되는 엘리와 그런 엘리를 떠나며 자신이 기억할 것들을 그러모으는 그의 남자와 이미 한참 전에 잃어버린 사랑을 추억하며 엘리의 이별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리하는 코널티 양에게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치유하는 시간의 양이 있을 테니 말이다. 기억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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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1-1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리뷰가 참 좋네요, 블랑카님. 언제나처럼요. 안그래도 이 책 읽어보고 싶었는데, 블랑카님 빨리 읽으셨네요. 제목도 좋아요. 여름의 끝, 이라는.

사랑의 도피를 포기하고 남게 되는 이야기라니,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6-11-16 11:37   좋아요 1 | URL
아, 정말이지, 최고였어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트레버를 읽는다‘, 이런 표현을 많이 써서 트레버가 대체 누구야? 그랬거든요. 다 읽고는 너무 좋아서 일어났다니까요. ㅋㅋ 제인에게 헌정되어 있어 찾아보니 제인은 트레버가 사십 년 넘게 함께 한 아내 이름이더라고요. 다락방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시이소오 2016-11-1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고 절제되어 빛나는 리뷰. 언제나 좋군요. ^^

blanca 2016-11-16 11:37   좋아요 1 | URL
책이 너무 좋으니 리뷰는 그 감동의 반도 못 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