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로 가는 차 안, 오래 된 차의 에어콘에서는 정말로 뜨거운 바람이 히터처럼 계속 나왔다. 길은 막히고 볼이 빨갛게 익은 딸 아이와 말다툼이 시작됐다. 정작 오랜만에 만화책도 사주고 좋아하는 스티커도 사 주려고 힘들게 나선 길은 거꾸로 가동된 에어콘 덕분에 둘 다 땀을 거의 눈물 수준으로 흘리며 서른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한 유치한 힘 겨루기가 되었다. 게다가 길도 막힌다.이쯤 되면 대체 이 길은 누굴 위한 길인가, 왜 나선 길인가 싶다.
그러나 역시 에어콘 바람에 땀이 씻기고 저마다 좋아하는 구역에 서로 사이좋게 헤어져 문구 탐험 및 책 들추기가 시작되니 자연스러운 화해와 해빙의 분위기다. 저만치서 나이 든 할아버지가 바삐 책을 옮기는 북 마스터에게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북 마스터는 급해 보인다. 다급하게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추천한다. 할아버지는 <종의 기원>을 찾아 떠난다.
음, 할아버지에게 왠지 좀 언질을 드려야 할 것 같은 마음은. 나도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척 힘들고 때로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언어가 영상으로 덤벼들고 그 언어가 만드는 이야기의 심연이 무척 깊고 적나라해 내가 인간인 게 때로 미안하고 당황스러워지게 한다. 그녀는 책임없는 환상이나 불가능한 행복으로 위장하지 않는다.
이 날은 아주 오랜만에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았던 아버지와 만난 날이기도 했다. 누구에게 과연 완벽하게 존경스럽고 너그러운 아버지가 주어지겠느냐 만은 나의 아버지도 역시 한때 나와 몹시 힘겨루기를 했고 치기 어리고 미성숙한 나와 서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중년의 나에게 이제 아버지는 함께 할 남은 시간들이 한없이 아깝고 지나온 추억이 닳을까 두려운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웃으며 고장난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내려가는 아버지와 헤어지는 여운이 길었다.
공교롭게 이 날 그 교보문고에서 산 <Axt>에서의 정유정 작가의 아버지가 <종의 기원>을 끝낸 다음 날 새벽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대목에서 눈물이 차 올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차게 아버지와 육사시미(그녀답다. ㅋㅋ)를 나누었던 어린 시절을 추억했고 그녀의 '살아남기'에 대한 애착과 자신의 인생을 꿈꿀 처지가 아니었던 이십 대를 보내고 난 후의 지금의 시간에 대한 경탄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이 써 낸 그 이야기처럼 열정적이었고 간결했고 사족이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의 파고 만큼 그녀의 말도 참으로 강렬해서 자꾸 듣고 싶게 했다. 사람과 말과 글이 어긋나지 않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종의 기원>을 사 가지고 돌아갔을 지도 모를 할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러한 지점을 내가 감히 판단하고 조언하려 하다니... 역시 나는 또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