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마프>가 끝났다. 젊은 남녀의 빈부차를 뛰어 넘은 사랑도 불륜과 출생의 비밀이 없어도 재벌가의 그들만의 리그가 없어도 통하였다. 청춘에는 환상이 개입하지만 노년에는 착각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젊음은 찰나이고 나이듦은 태반인데 우리는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시선을 돌리곤 했다. 우리가 아이를 낳을 때 사춘기의 반항아를 연상하지 않듯 '삶'을 이야기할 때 거동의 자유를 잃고 소통의 기회를 박탈 당한 독거 노인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은 흔히 이야기되지 않는 곳에 묻어 있는 경우가 많다. 노년을 온전히 동행하는 우정에 대한 환상, 경제력 등이 현실을 닮지 않았다 비판할 지점이 있다 하더라고 이야기가 온전히 현실을 복제할 필요는 없다는 데에 변명을 보탠다. 노년도 얼마쯤 해피엔딩을 가질 자유가 있지 않은가. 가난하고 고독하고 비참하게 확대한 이야기를 모두가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얼마쯤 판타지가 덧대어진 그들의 노년의 풍경에 안심이 된다. 그러한 이야기조차 노년에는 허락되지 않았었다.

을씨년스러운 늙음의 풍경은 난무한다.
여기, 사람들이 앉아 서로 토해내는 신음을 듣는 곳,
중풍 환자가 몇 가닥 남지 않은 마지막 을씨년스런 머리카락을 흔드는 곳,
젊은이가 창백해지고 유령처럼 마르다가 이내 죽는 곳,
무슨 생각만 해도 곧 그득한 슬픔이 밀려오는 곳......
존 키츠 , <나이팅게일>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중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러한 쓸쓸하고 고적하고 황량한 노년의 풍경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풍경은 특이한 소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에브리맨'의 것이다. 장 아메리는 시간의 무게를 감지하고 이제 자신 앞에 남은 삶을 더 이상 삶이 펼쳐지는 공간이 아닌 죽음이 유예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노년의 그 비참한 인식을 강조한다. 노화는 불치의 병이라 역설한다.
모든 삶의 당연한 명제를 비관을 냉철한 인식으로 변주하는 것에 저항감이 느껴진다. 당연하다. 태어나고 죽는 그 공간 안에 담긴 삶의 풍경과 무게는 엄혹하고 지난하다. 그렇다고 매일 울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항상 젊음만 칭송하고 그들의 이야기만 말하고 들으며 어제보다 분명 늙어가고 있는 우리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분명 나의 다크서클은 나날이 짙어지고 그 면적을 확대하며 내가 늙어가고 있음을 몸에 아로새기고 있다. 거꾸로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나친 동안 열풍도 그래서 때로 불편하다. 그 안의 몸은 온전히 시간을 품고 있다.
따뜻하고 견딜 만한 노인의 삶들이 비록 환상일지라도 그러한 환상을 보여주는 것에 그래서 속고 만다. 그게 더 견디기 낫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