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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일상다반사와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에서 우연히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너무 슬프고 절망적이라는 이야기에 끌려 유진 오닐이 아내 칼로타에게 쓴 눈물 어린 헌사를 시작으로 티론 가족 네 사람이 각자의 절망이 소통하지 못하고 한없이 반목하고 빗겨가는 그 자리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열두 번째 결혼 기념일에 유진 오닐은 차마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표현해 내기 어려울 만큼 슬프고 비참했던 가족사를 자신이 가장 잘 형상화할 수 있었던 희곡의 형태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선물로 바친다. 실제 유명한 연극배우였고 극단을 따라 호텔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던 유진 오닐 아버지의 이야기가 극중 티론에게 그대로 투영되어 티론의 여름별장의 거실에 모인 부부와 두 아들의 4막으로 이어진 대화로 슬픈 가족사와 서로 간의 갈등, 상처를 짐작할 수 있다.
1912년 8월, 제임스 티론의 여름 별장의 거실에 나타난 어머니 메리는 진통제 처방이 우연히 마약 중독으로 이어진 상태로 마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가족에게 다시 돌아온 그녀의 모습에는 여전히 마약에 오염되어 있는 모습이다. 선병질적인 모습과 연극적인 자기 고백, 과거로의 끊임없는 귀환은 그녀가 방탕한 큰 아들과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둘째 아들, 가족들에게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남편이 만들어 내는 건조하고 차가운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아내는 현실을 부정하고 아버지는 절망과 삶에 대한 탐욕스러운 애착을 묘하게 섞어 아들들을 괴롭힌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그 사람과 아이를 낳았을 때에 이러한 미래를 감안하거나 꿈꾸는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보다 앞질러 정거장에 당도해 있는 미래는 얼마쯤 우리가 삶에 기대했던 그 자비와 관용, 환상을 여지없이 박살내어 버린다. 유진 오닐은 먼저 이 정거장에 도착해 자신의 원가족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반목하는 아들들. 어쩌면 내일이면 완전히 헤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이 위태위태한 가족의 모습에는 인간이 삶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한 어쩌지 못하는 그 필멸의 명제가 살아 있다.
인간이 되는 바람에 항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진정으로 누구를 원하지도, 누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어디 속하지도 못하고, 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유진은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 이 작품이 발표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혼기념일에 이 희곡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받은 아내 칼로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 상을 받게 한다.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라 칭했던 그녀와의 결혼 생활도 결국은 '밤으로의 긴 여로'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모든 삶의 보편적인 은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