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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어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전부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책은 당신을 깨운다. 그것만으로도 그 책은 전부가 아니어도 된다. 이 책은 나에게 그랬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고 거기에 대한 해석, 자신의 개인적 감상, 경험을 덧붙인 부드러운 책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한 면이라면 이 책은 닮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토머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자주 그런 류의 책들에서 회자되는 대목들이 언급된다. 하지만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덧붙여진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실제 영문학과 교수다. 그리고 이 책은 숱한 문학에 덧씌워져 있는 거대한 환상의 장막을 가차없이 벗긴다.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로 이야기되지만 그 어떤 '~주의'도 문학을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데에 이용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주의도 낭만주의도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도 한계는 명료하다. 문학 자체가 아이러니다. 그것은 객관적이거나 공정하거나 거대한 진실이 아니다. 애초에 그러한 기대를 버리고 독자는 자신의 한계 안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지만 읽는 이가 다가와야만 부활하는 이야기에 발을 들여 놓는다.
스토리는 타래처럼 뒤얽힌 이 세계에 억지로 일종의 도안을 새겨 넣으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세계를 단순화하고 빈약하게 만들 뿐입니다. 서술한다는 것은 변조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 말은 곧 모든 서사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서사는 그 자체의 한계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합니다.
-p.202~203
"하나의 총체적 서사는 없다"는 그의 이야기는 일견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시선과도 연결되어 있는 깊이 있는 자인이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은 그 앞에서 어불성설이다. 그에게 인생은 목적이 없더라도 꼭 이야기가 아니어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이 깊이 와닿았다. 삶은 통합된 잘 직조된 패턴으로 설명 가능한 서사가 아니라는 것을 나이 들며 느끼게 된다. 중구난방으로 일어나는 일들, 맥락에 닿지 않는 반응들도 삶의 통로로 예고없이 기어 들어온다. 거기에서 혼란을 느끼기 시작하면 어지러워진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왜 이런 이야기를? 질문은 난무하고 그것은 마치 원래 그래야 하는 경로를 벗어나 소외된 고독한 이방인이 암흑을 대변해야 할 때 느끼는 심정과도 닿아있다. 하지만 원래 서사란 환상이고 심지어 그 환상을 토대로 쌓아올리는 문학마저 스스로 그것을 배반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것을 수긍하게 되면 당연히 살아 숨쉬는 인간의 삶이 잘 짜여진 이야기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는 한 문학 작품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p.308
문학에 대한 한계와 아이러니는 그것이 바탕으로 하는 삶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서도 연유하지만 그것을 언어로 옮길 때 따라오는 그 공백과도 겹친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절망이나 무용함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지점에서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할 수 없기에 그것을 향해 끊임없는 언어의 순례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