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mony : A True Story (Paperback)
Roth, Philip / Vintage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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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에서 필립 로스가 "노년은 대학살"이라 했던 연원은 그 자신이 여든 일곱 살에 죽어가는 아버지의 여정에 통절하게 동참했던 체험에 있었다. 삼백 페이지가 안 되는 이 이야기는  장황하게 늘어놓는 기억의 복기가 일상에  괴팍하고 독선적이면서도 열 살도 더 차이 나는 이웃의 할머니와 연애를 하는 정력적인 그의 아버지의 그 대학살의 전장에서의 투쟁, 그리고 그것에 함께 동참하여 그 지난하고 참혹한 노쇠와 소멸의 과정을 절절하게 체험하며 삶에 내재되어 있는 그 근원적 비극성을 생생하게 하나 하나 형상화하는 작가 자신의 고백이다.

 

여기에서 미국의 생존 작가 중 유일하게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에서 결정판을 출간하게 되는 작가적 성과는 그의 본질이 아니다. 뇌 속에 종양을 가지고도 적극적인 치료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아버지는 유대인으로서 미국에 자리잡기 위해 평생을 분투했던 기억을 무한히 반복 재생한다. 그의 삶은 차라리 기억 그 자체였다. 성장기에 필립 로스는 이러한 아버지에게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종양 생검을 앞두고 탄 택시에서 만난 기사가 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을 때 필립 로스 또한 그를 전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찬찬히 그 감정의 뿌리를 탐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선적이었고 그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타인의 실수에 때로 가혹해서 필립을 숨막히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면면의 반대편에는 또 여느 서구적인 자식과 부모와의 다소 건조한 관계와는 다른 끈끈함이 있었다. 아버지의 투병은 필립 로스가 읽지도 쓰지도 못하게 할 만큼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저편에서 커져가는 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두고 홀로 여기에 있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의 아버지가 생의 투지를 불태웠던 만큼 급격히 소멸로 가는 과정의 가혹함은 그를 어리둥절케 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허덕이다 그와 통화한 여자 친구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그를 위로한다. "나는 모든 걸 이해할 필요는 없어." 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비로소 그는 잠을 청할 수 있게 된다. 살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질서나 명확한 인과 관계를 요구하는 일은 그것을 이겨내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번 "왜?"가 시작되고 나면 모든 것은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해 보이고 나는 그러한 것들을 견뎌나갈 도리가 없게 되기도 한다.

 

너무 늙어버린 아버지를 그대로 두어도 공격적인 치료를 해도 그 어느 지점에서도 갈등하고 회한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식의 번민은 너무나 보편적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 이러한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는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버석거렸다. 그는 몇 번에 걸친 의사들과의 상담으로 아버지에게 장시간의 무리가 가는 뇌수술을 권하는 대신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과 처분에 경과를 맡기게 되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하게 된다. 뇌의 종양 조직 검사에서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해 힘들어하던 아버지가 참던 대변을 아들의 잘 꾸며진 집에서 실수하게 되는 장면에서 그는 삶의 정면을 맞닥뜨린다. 그게 바로 삶의 실재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 준 유산은 돈도 아니고 소중히 여기던 유물들도 아니다. 아들은 어떻게든 보이지 않는 눈과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수습해 보려던 아버지의 똥을 대신 닦고 청소하며 이게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유대의 정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별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아들을 들어올리고 평생 강건할 것처럼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와 몸은 졸아들고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그 자신이 이제는 자신의 용변마저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서 아들 앞에 서는 순간 비로소 아들은 생이 가지는 그 처절한 비극성과 부자의 긴밀한 유대를 응시하게 된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면 그냥 무릎을 굽히는 것도 때로 답이 되기도 한다.

 

필립 로스는 대단히 솔직하다.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했던 데에 대한 회한, 연명장치 중단 서류를 은근히 아버지엑 종용하는 모습의 고백 등은 그가 언어 뒤에 실체를 숨기려는 본능을 이겨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이야기가 언어의 장막을 뚫고 호흡하는 지점에는 이러한 솔직한 과단, 진정성이 있다. 한편 때때로 계속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천착은 좀 아쉽기도 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이러한 정체성이 가지는 무게를 감히 쉽게 이해하거나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그를 가두는 데에도 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그 일을 지키며 필립은 아버지가 죽어도 영원히 자신의 내부에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로맹 가리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우리의 내면의 증인이 된다. 어떤 판단, 느낌의 준거점으로 기억의 거점으로 눈물로 남는 것이다.

 

표지 안쪽에는 세 부자가 수영복을 입고 일렬로 서 있는 아름다운 사진이 실려 있다. 서른 여섯의 젊은 아버지, 아홉 살의 필립, 네 살의 남동생의 아름다운 찰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빛난다. 아, 사는 일은 어찌 이다지도 대조적이고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또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한 생을 꾸려가는 일은 어찌 이다지도 끝나지 않는 것인지... 이 모든 이상스럽고 신비한 것들의 원리를 모두 알고 이해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생을 계속 꾸려가고 계속 읽고 쓰고 사랑하고 표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게 삶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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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12-13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서 다시 아기로 돌아가니,
아기가 된 어버이(아버지 어머니)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오늘 이곳에서 선 내 모습도
앞으로 내가 아이들과 나아갈 모습도
함께 되새길 수 있을 테지요.
아기가 된 어버이를 마주하고 껴안으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는구나 싶어요

blanca 2015-12-14 14:44   좋아요 0 | URL
어른이 되는 길은 아마 죽을 때까지 또 배우고 돌아보는 과정인 듯해요. 거진 다 배웠다고 생각해도 또 튀어나오고 또 나오고 그러네요.

2015-12-14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4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5-12-1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 작가는 굉장히 솔직하구나하고 깜짝 놀라곤 했는데 역시@_@; 읽고싶은데 번역되어있지 않은가봐요. 블랑카님 존경합니다♡

blanca 2015-12-14 14:47   좋아요 0 | URL
아, 필립 로스의 솔직함이라니, 정말 놀라고 또 놀라요. 어느 인터뷰를 보니 `~척` 안 하고 산다고 얘기한 게 빈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또 일견 자신감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