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에릭 포토리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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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1일 날이 저물 무렵, 라 로셸 북쪽 어느 구역에서 아버지는 엽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p.7

 

이 책의 첫문장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저자 에릭 포토리노의 체험이다.  평생 남을 돕는 일에서 보람을 찾던 물리치료사 일마저 뇌경색 휴유증에 의하여 그만둬야 했던, 그리고 마침내 개인파산까지 했던 늙은 아버지는 아들 셋에게 나란히 유서를 남긴다. 그 유서를 전해주는 책임은 자신의 성을 주었던 큰 아들 에릭에게 남긴다.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왜 '은밀하게'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러한 표현은 부모와 자식 간에 상용되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세상에 가장 드러내 놓고 천명할 수 있는 애정이 아니었던가. 비교적 성공한 언론인이자 작가의 아버지였음에도 끝내 스스로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 사내에 대한 복기는 왜 작가가 그러한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었는 지를 고백한다. 그의 아버지는 생부가 아니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에릭은 아홉 살이 넘어서야 수줍게 들어서는 새아버지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 끊임없이 언론에서 회자되는 가혹하거나 파렴치한 계부와 계모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오연하게 서서 생명을 준 아버지보다 더 아들의 인생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보호하다 때 맞추어 망설이지 않고 독립시켜 보낸 훌륭한 아버지가, 심지어 배 안으로 열 달을 품어 낳은 나의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럽게 작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모가 서 있다. 자전거로 인생을 가르쳐 준 아버지. 운동을 마친 아들의 근육을 손수 다 마사지하며 부드럽게 풀어주는 아버지. 생부를 찾아 만나겠다는 아들을 운전해서 데려다 주는 아버지.

 

당신은 마음속으로 나를 사랑했다. 마치 사물들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낮게 속삭이는 것처럼, 애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 사랑은 너무 강해서-명명백백한 사실의 힘-당신은 그걸 동네방네 떠들어대지 않았을 것이다.

-p.123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뒤에 든든하게 지켜서서 그를 응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서서히 홀로 죽음을 준비했던 것같다. 아들은 점점 약해져 가는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지는 죽는다. 그와 쌓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들, 애정, 신뢰는 시간에 허물어져 간다. 견딜 수 없는 망각에서 작가의 언어로 구원 받은 젊고 정력적이고 가장 아버지다웠던 모습들은 주춤 주춤 눈물겹게 아련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때로 짓이기고 묻어버린다. 거기에 대항하려는 글쓰는 이들의 언어들이 뭉클하면서도 때로 무력하게 느껴지며 가슴에 스민다. 대체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빛나게 생동하던 젊은 아빠의 눈망울은 움푹 패이고 아들의 자전거를 밀던 든든한 뒷배는 정작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스러져 버렸다. 어쩌면 작가가 미처 하지 못한 그 수많은 눈물 스민 감정의 편린들은 아버지를 둔 그래서 언제나 불효를 했고 불효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식들 모두에게 이미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도저히 눈물 없이는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다.

 

아버지를 '그'라 칭하며 객관화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다. 이미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려고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 둘의 삶은 혼재되고 우리 둘의 이야기는 섞인다. 아무리 자식이 성인이 되어 독립하여 우뚝 선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그들과의 연결은 숨을 다하는 날까지 우리의 삶 속에 스민다. 그러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시간, 노화, 병마, 죽음, 앞에서 점점 종말로 다가가는 그 삶의 경로에 동행하며 내 자신의 이야기를 미리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 들어도 자꾸 가슴이 먹먹해진다. 삶에서 사랑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덧대어질 때 비장해진다. 끝이 있는 이야기에 영원을 꿈꾸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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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0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버렸어요.ㅠㅠ 블랑카님의 명품리뷰ㅠㅠ;; 어제 책을(다이어리를-_-;) 주문하면서 넣었다 뺏거든요. 다시 주문해야겠어요. 눈물없이는 열수도 닫을 수도 없다니. 두렵습니다ㅠㅠ;

blanca 2015-12-05 13:01   좋아요 0 | URL
달밤님, 저 공교롭게 요새 읽는 책마다 그렇게 눈물 쏙 빼는 내용이라 자꾸 가라앉아 고민입니다. 다이어리. 이미 새 다이어리 증정 받은 거 사용중인데 알라딘 거 보고 흑심이 들어 그것 또한 고민이에요.

2015-12-06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