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주변에 책 이야기를 할 사람은 몇 없다. 고등학교 때 친구 한 명, 아이 친구 엄마 한 명. 그래서 어제 친구가 네루다의 시를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다는 낭만적인 이야기에 살짝 뭉클해졌다. 사실 이제 아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들 학습 진도, 영어, 학원 등으로 화제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그림을 참 잘 그렸던 친구의 이야기에 나는 당장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어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그러지 말고 내가 깜짝 선물을 해 주면 어떨까, 싶어 당일배송으로 주문했다.
물론 칠레의 유명한 시인 네루다에게 정말 편지를 전해 준 배달부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픽션이니 만큼 네루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과 네루다의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네루다의 말년과 죽음은 픽션의 체를 거르고 핍진성 있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의 삶을 어렵게 하나 하나 있었던 팩트 중심으로만 요약하여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은 아닐 것이다. 따뜻하고 대의를 저버리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의 슬픈 말년은 그 어떤 발언보다 작가가 어떻게 사회적 책무를 져야 하나에 대한 유효한 대답이 될 것이다.
더불어 미술 선생님한테 종종 야단까지 맞았던 나의 형편없는 실력 앞에서 그저 감탄과 경탄만을 자아내던 친구의 그림과 그림에 대한 열정이 언젠가 다시 부활하기를 소망하며 나도 즐겁게 보았던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도. 일러스트가 참 사랑스러웠다.
솔직히 나는 고등학교 때 그 친구와 아주 많이 친하지는 않았다. 나는 좀 제멋대로 구는 경향이 있었고 그러한 구석이 친구한테 부담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드문 드문 연락이 닿고 만나기도 하면서 더욱 친해졌다. 그러고 보면 인연이란 남녀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때 찹쌀떡처럼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와는 오히려 소원해져서 소식도 모른다. 사람은 지금 당장 여기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변화와 변전을 겪을 지 모르면서 시간의 풍화를 겪는다. 얼마 전 읽은 박완서 님의 수필집도 그랬다. 나는 박완서의 열렬한 팬이고 그 분의 소설과 에세이를 완독하고자 했었다. 돌아가셨을 때는 참으로 슬펐다. 그런데 사십 대에 쓰셨을 에세이들은 노년의 그 분의 모습과 많이 달라 있어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오늘 읽은 서재분의 글에 너무 공감이 갔다. 속된 말로 까칠한 모습이기도 했고 대단히 솔직한 내면의 어떤 어두운 곳에 대한 모습에 대한 고백도 놀라웠다. 일본의 어느 서점 바닥에서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며 칭찬하는 관용적이고 열린 할머니의 모습이 사실 잘 상상이 안 갈 정도였다.
그래서 글이 가식으로 흐를 위험에 대하여 어느 정도 공감은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글에는 삶이 그 사람의 기질이 생각이 욕망이 감정의 잔재가 비어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오늘의 글이 그 사람의 전부이거나 고정된 그 사람에 대한 결론의 기반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글도 사람도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한다. 핵심은 끊임없이 그 사람의 삶처럼 변화하고 진화하고 때로는 졸아들기도 한다는 것.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고 있는데 주인공 필립은 이제 겨우 스물 언저리다. 그의 좁은 소견, 세상에 대한 판단, 오독, 오해들이 몸의 다른 작품의 문제들과는 조금 다르게 굉장히 투박하게 그려진다. 조금이라도 나이들거나 보이는 기준에서 초라한 사람들에 대하여 한창의 나이인 사람이 느끼는 경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에 대한 회한이 군데군데 묻어난다. 이 소설은 서머싯 몸의 성장과 삶이 투영되어 있다고 하니 주인공의 성장과 성숙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기대되면서 나의 젊음들과 어리석음, 실수들을 부끄럽게 회고한다. 어렸을 때 안타깝게 생각했던 나이와 현실에의 발디딤이 지금은 나의 것이 되었다. 지금 전부라고 여기는 것들도 결국은 그렇게 되겠지. 지금 가차없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도리질하는 것들도 어쩌면 나의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