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주목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3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영화 <시>에서 시창작수업을 듣는 중년의 남녀들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저마다 독백으로 고백하는 장면은연기가 아니었다. 그 중 아름다운 꽃을 볼 때 느끼는 그 절절한 아름다움과 그것을 영원히 향유할 수 없는 아쉬움을 이야기했던 부분이 기억해 남는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이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내'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나이를 넘어서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장면에 감정 이입이 되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 느낌.

 

인식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내'가 사라지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각오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이듦이 가지는 무게가 때로 두렵다.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는 지점은 분명 그곳인데...그 지점으로의 응시가 떨린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이러한 인간들의 소멸에 대한 본원적 두려움에 어떤 담담한 위무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죽음을 유난히 두려워했던 한 여성이 어떻게 그것을 넘어서는 지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게 명명된 <장미와 주목>은 T.S.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 중 "장미의 순간과 주목의 순간은 같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순간 순간 지고 피는 찰나의 장미와 굳건이 그 장미를 이고 있는 주목의 순간이 같다는 것은 삶의 그 유한성이 가지는 그 의미와 무게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야기의 화자는 어느 날 찾아온 한  비열하고 이기적이라 생각했던 사내의 죽음을 목격하며 자신이 배경으로 때로는 주인공이었던 삶의 에피소드들을 차근 차근 펼쳐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교통 사고로 인한 하반신 마비는 그를 편안한 청자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사람들은 그를 찾아오고 자신의 이야기들을 고백한다. 화자가 형부부와 함께 이주한 지역에서의 선거전에 참전 경력과 그럴듯한 말솜씨에 기대어 보수당 대표로 졸속으로 출마하게 된 게이브리얼이라는 사내와 유폐된 성 같은 곳에 노부인들과 함께 언젠가 돌아올 성의 주인인 사촌오빠를 기다리는 이사벨라라는 여인의 이야기. '나'는 그 둘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저열한 패배의식과 신분이 가지는 열등감에 함몰되어 있는 게이브리얼이 귀족 아가씨인 이사벨라와 도주하자 경악한다. 게이브리얼은 선거전의 승리를 앞두고 있었고 이사벨라에게는 정혼자가 돌아와 있었는데도 이 둘은 이 안온한 선택을 뒤로 하고 위험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곳으로 달려간다.

 

'나'는 우연히 이 둘과 재회하게 되고 예상대로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남녀 앞에서 절망한다. 하지만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했던 이사벨라가 정식 결혼도 하지 않고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막 살고 있는 게이브리얼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모습에 나는 큰 혼란을 느낀다.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약속된 모든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이런 저열한 사내와의 비참한 삶을 택하고 마침내 그를 위해 죽음까지 마다않는 모습에서 '나'는 게이브리얼이 한 아름다운 여인의 삶을 송두리째 망쳤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나'에게 미스 마플처럼 현명한 직언과 조언을 서슴지 않았던 형수 테리사의 이야기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우리들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근사한 조언이다.

 

"도련님은 시간을 가지고 판단하는군요. 하지만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 분이나 천 년이나 의미는 똑같아요."

 

"도련님은 이사벨라의 인생이 짧게 끝나버렸다고, 일그러지고 부서져버렸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난 그것 자체로 완전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장미의 순간. 눈으로 보는 것만이 그 사람의 본질은 아니다. 길게 안전하게 평안하게 사는 것만이 그 사람의 삶의 그럴듯한 완성은 아니다. 찰나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부수적인 것들에 끄달리며 우리는 주목의 순간에 삶을 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장 우리답게 사는 것은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들을 느끼고 응시하며  유한함 안에 모든 것들을 응축하려는 시도 그 자체에 찰나에 피고 지는 장미의 아름다움이 발산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한 시도와 삶을 변호하려 하는 것에 앞서 그저 여기 이렇게 지고 피어나는 저마다의 모든 삶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지지를 해주고 싶어하는 작가의 시도가 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 같다.

 

고마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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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9-3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 영화를 차마 못 보겠어요

blanca 2014-09-30 19:20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저 이 영화 티비에서 하는 것 새벽까지 보고 잠 못 이루었던 기억이 나요. 다 보고 나면 가슴이 너무 스산해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