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지음, 윤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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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를 나왔지만 교사가 되지 않았다. 아니 되지 못했다. 대학 4학년 때 나간 교생 실습, 교실에서 아이들은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기도 했고 나의 예상과 흡사한 모습이기도 했다. 가장 지척에서 가장 오랫동안 볼 수 있었던 '교사'라는 직업과는 영영 멀어져 버렸다.

 

아이를 낳았다. 우연히 가장 친하게 된 동생은 열정적인 교사였다. 아이를 함께 키우며 우리는 서로 많은 것들을 주고 받았다. 나는 그녀가 점점 부러웠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더욱더 교실에서의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된 그녀의 모습은 내가 가지 않았던, 못했던 길에서 더욱 빛났다. 교권은 무너지고 교실은 붕괴되었다,고 연일 떠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교사들은 아이들 곁에서 죽고 아이들을 껴안았다. 가장 평범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위대한 일도 이루어지는 법인 것같다.

 

1학년, 2학년, 3학년. 항상 오십 명을 넘었던 학생. 선생님들은 지쳐 있었고 아이들을 하나 하나 개별적으로 쓰다듬어 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도무지 수업 내용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칠판에 판서한 글씨들이 희미해 제대로 필기해 집에 가서 짚어 볼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나 하나로 우주 전체를 채울 것도 같은데 저기 저 높은 곳에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선생님의 눈길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종일 책상에 엎드려 울어도 누구하나 물어봐 주지 않았다.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물론 바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 열등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춥고 초라하고 가슴 아픈 일인지 너무 일찍 알아버려 후에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적을 올리고 친구들과 교감하며 즐겁게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이 들어 가며 돌아오는 기억은 전반전의 것인가 보다. 후반전을 잘 뛰어도 전반전에 벤치에서 몸을 구부리고 앉아 지명을 기다리던 서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는 '교사'는 나에게 다소 음울하고 차갑고 슬픈 울림을 가진다.

 

백 세를 바라보는 엄마 앞에서 교사로 수십 년을 재직하고 베스트셀러를 펴 낸 유명 작가는 아직 여전히 열등생이다. 세 명의 형과는 달리 연산, 철자법에서 헤매고 꼴찌와 가까웠던 아이의 기억은 인생 중후반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교란 속에서 흔들리는 노모 앞에서 혼자 자립할 능력도 없어 보이는 걱정거리다. 다니엘 페낙,은 '학교의 슬픔' 그 자체다. 집안에서 말썽을 일으켜 간 기숙학교에서 그는 진짜 교사를 만난다. 그는 젊고 열정적인 교사가 아니라 교직 말년을 아이들에게 바친 노교사였다. 그는 다니엘의 내면의 이야기꾼 기질을 알아본다. 일주일에 한장씩 소설을 써서 한 학기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하게 한 국어 선생님은 다니엘을 누군가의 앞에서 진짜 학생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이는 열심히 글을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성장하여 자신과 같은 열등생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뭐라도 해야지 '결코 아무것도'라는 말은 '결코' 없다는 것, 나와 내 동료들은 절대 그들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이를 수 있게 하려면 노력이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가르쳐주고, 결과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맛을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시간을, 즉 권태를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p.206

 

다니엘 페낙이 직접 아이들에게 텍스트를 암송하게 하고 아이들이 직접 만든 재미있는 내용으로 받아쓰기를 정기적으로 테스트하며 한 명씩 한 명씩 손을 잡고 언어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재미를 알게 하는 이야기는 무척 유쾌하고 역동적이다. 반항하는 아이, 비아냥거리는 아이들 모두를 뒷전으로 밀어내지 않고 함께 부둥켜 안고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조금씩 나아가려는 글 쓰는 선생님의 모습은 지나친 이상화라는 비난을 염두에 둔 듯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솔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그'는 현대에서 학생의 모습을 부모의 부에 기생하는 자본주의 소비의 도구로 전락시킨 것에 분노한다. 오늘날의 젊은 교사들이 이러한 고객들로 이루어진 학급을 대면하는 일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그의 지적은 날카로운 것이다. 익명으로 떠오른 아이들을 지칭한 것도 아이들이 입은 옷과 신발의 메이커였던 슬픈 현실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상품을 만들어 순진한 열망을 소비욕으로 치환시킨 어른들에게 의당 가해져야 하는 비난의 몫이기도 하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 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그리고 지하철 광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

-p.348

 

우리는 '아이였을 때'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이들을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도구화한다. 성장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아이들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어른의 말에 반항한다고 하면서 정작 나름의 방법으로 순종하고 이 시간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다니엘 페낙이 부끄럽게 덧붙인 사랑. 너무나 진부하지만 그래서 투박한 진실인 사랑. 그리고 언제나 내민 손을 잡아주는 일. 심지어 우리의 손을 뿌리쳐도 포기하지 않는 일. 왜냐하면 주머니에 넣은 그 아이의 손은 사실 잡아 줄 누군가만을 기다리는 중이므로. 이것은 바로 나에게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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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6-26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토닥토닥...그랬었구나....교사가 되셨어도 아이들을 참 따뜻하게 보듬어 안았을텐데.....
가끔 학창시절로 돌아가보면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혼난 기억, 친구들과 싸웠던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나더라구요. 나름 그 당시에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가? ㅎㅎ
다섯 종류의 아이들....맘 아픈 현실입니다.

blanca 2014-06-26 18:5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는 교사가 되지 않았던 게 아이들 입장에서 다행이었을 거라고 ^^;; 생각했었는데 요새는 다시 생각이 바뀌어 노력하는 좋은 교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도 가져 봅니다. 저는 사실 가장 자주 떠오르는 기억은 중2 언저리인 것 같아요. 그 때 친구들이 제일 강렬하게 남아서요.

transient-guest 2014-07-09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가 무척 싫었어요. 국민학교도 중학교도 청소하고 매맞고 시달린 기억, 그리고 집-학교를 오가는데 하루에 평균 2-3시간을 쓴 기억밖에 없어요. 그나마 고등학교부터는 미국에서 다녔는데, 일단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리지 않는것, 그리고 3시면 학교수업이 모두 끝난다는게 초기의 어려움을 잊게 했지요. 그리고 처음에 와서는 토-일 쉬는게 그냥 매우 연휴 같더라구요.ㅎㅎ

blanca 2014-07-09 14:01   좋아요 0 | URL
rransient님 댓글 읽다 웃음이 나왔어요^^;; 청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고 여러가지로 아직 '학교'가 가지는 문제는 항상 불거지고 결핍은 따라오고. 그래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또 내일이 나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요. 저는 수업 시간에 많이 졸았던 기억, 그리고 여중, 여고를 다녀 아이들이랑 연예인 이야기로 꽃피웠던 기억, 학교 앞 매점에서 열심히 군것질하던 기억 같은 게 많이 남아요.

transient-guest 2014-07-10 01:30   좋아요 0 | URL
지인들 중에 새로 설립된 사립학교에 1기생으로 들어간 이는 학교를 지어가면서 다녔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1학년 교사만 짓고 학생을 받아서 나머지 공사를 그해에 진행하고, 2학년으로 가면, 다시 3학년 교사를 짓는 식으로 부실하게 운영한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