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는 단순한 장르소설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그녀의 범인은 무자비한 소시오패스들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 외적 동기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항상 그녀의 이야기는 슬프다. 소름끼치고 잔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범인이 주도하지 않는 범죄는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서글펐다. 이러한 범죄소설은 분명 애거사 크리스티여서 가능한, 애거사 크리스티만 가능한 이야기 같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들을 읽는 일은 단순히 킬링타임용이 아니었다. 인간과 삶의 내면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그 층층의 겹을 뚫고 심연에 조심스레 닿아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녀가 추리소설이 아닌 그냥 소설을 다른 필명으로 기획했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깜짝선물로 느껴진다. 게다가 딸의 이야기이다.

 

아들은 장가갈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라는 이야기가 비단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책의 제목이 A daugher's a a Daugher인 이유다. 딸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당시는 치열하고 아팠던 그 많은 소소했던 일화들을 다시 복기하는 것만 같은 엄마의 마음을 지적한 부분이 공감 갔다. 중년의 엄마 앤이 막 피어나는 열아홉 살의 세라 앞에서 느끼는 감상들. 작가는 나의 과거, 현재,미래의 그 정확한 지점에 시선을 던지고 있어 군데군데 깜짝깜짝 놀란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할머니 미스 마플은 여기에서 로라 휘스터블로 분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 그녀가 앤과 세라에게 던지는 조언은 자신의 나이로 누르는 편견과 강압이 아니라 깨알 같다. 하나 하나 발췌하여 작은 수첩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고 싶을 정도의 가르침. 이것은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가 우리들에게 남기는 소중한 별밭 같다.

 

희생이라니! 얼어 죽을 희생! 희생의 의미가 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봐. 그건 따뜻하고 관대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겠다고 느끼는 영웅적인 한순간이 아니야. 가슴을 칼 앞에 내미는 희생은 쉬워. 왜냐하면 그런 건 거기서, 자기의 본모습모다 훌륭해지는 그 순간에 끝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나중까지-온종일 그리고 매일매일-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희생을 하려면 품이 아주 넉넉해야 하지.-252

 

맞다! 특히나 아이 앞에서 엄마의 희생은 멋지고 폼나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딸 세라가 반대하는 리처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앤은 재혼이 결렬되자 진짜 삶과 더불어 세라와의 유대의 끈을 놓아 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딸 세라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었다. 로라가 지적한 것처럼 그녀의 품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여기에서 갈등은 시작되었고 세라가 자신을 방기하고 겉만 번드르르한 불량한 남자와 결혼을 강행할 때도 엄마는 딸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무심코 방조했다. 흔히 자식 앞에서의 무조건적이고 품이 넓은 사랑 대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범위로 모녀의 관계를 축소, 또는 확대하며 묘파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펜끝은 예리하고 아프다. 그녀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함과 약점들은 사소한 것들에 끄달리는 우리의 모습이다.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섬뜩하다. 우리는 많은 예외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드러내고 만다.

 

그러니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나 자신의 일기를 적는 것과도 같다. 좋은 엄마가 되는 일은 다시 산다고 해도 또다시 실수를 번복하고야 마는 나의 삶의 재방송과도 닮아 있다. 그저 '엄마'라는 것에 기대어 완벽한 헌신의 축복이 쏟아질 거라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만용이다. 내면에 적어도 로라 휘스터블 정도의 조언가 한 명 정도는 두고 끊임없이 돌아보고 반성하고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 죽는 그 순간까지 성장한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조언을 남발하는 나이 든 이들의 성마른 모습이 기우인 것도 그녀가 결국 남긴 가르침이 이것인 까닭일 게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라면 사는 것은 소모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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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8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9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4-05-22 10:32   좋아요 0 | URL
흠, 님도 두려운 맘이 있으시군요 근데 많은 분들이 어머니가 되고, 그러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근데 제가 왜 저걸 비밀글로 해놨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려고...??

blanca 2014-05-22 12:10   좋아요 0 | URL
비밀로 댓글을 달면 그 댓글에 또 비밀로 댓글을 달아야 할 것만 같은 ㅋㅋ 강박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