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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 산다는 것 - 잃어버리는 많은 것들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제니퍼 시니어 지음, 이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한동안 일상 생활을 갈무리 하는 것도 무언가 좀 환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엄마니까 밥을 짓고 아기를 데리고 아이를 등하교 시키고 숙제를 챙기고 그렇게 살았다. 비교적 타인의 도움 없이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늦잠을 잔 아이가 숙제도 안 하고 공책도 어디 갔는지 모르면서 그러한 것들을 다 엄마 책임으로 돌리는데 순간 욱하고 말았다. 아이는 울면서 학교에 갔다. 고작 1학년인데. 내 아이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다른 많은 아이들의 아픎을 제대로 헤아릴 수나 있을까. 자괴감이 들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아주 기적 같은 일이다. 지금도 나는 내가 이 아이들을 낳았다기 보다는 이 아이들이 단지 나를 빌려 세상에 나온 것만 같은 느낌이다. 뱃속에서 태동을 느끼고 죽겠다고 버둥거리며 낳은 시간들은 머나먼 과거의 추억만 같다. 첫애를 키우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싸지도 못하는 시간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냥 기본적인 것들이 제대로 안되니 자아는 고갈되고 또 닳아 없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 순간의 기쁨과 환희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반드시 그것을 능가하는 고통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모성애가 좔좔 넘쳐 흐르지 않았고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아이가 미친듯이 이쁘지 않아 놀랍고 슬펐다. 그래서 내가 다시 자처해서 엄마가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년 뒤에 나는 내가 자처해서 또다시 엄마가 되어 첫애 때 겪었던 그 수면 박탈과 자유 박탈과 자아 고갈의 지난한 과정을 다시 겪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만큼 고통스럽거나 이성을 잃을 것만 같은 순간은 거의 없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임을 미리 알고 체념한 덕택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안다. 이러한 시기는 아주 잠깐이고 이 시기 나의 아이는 너무 무력하고 조그마해서 내가 세상 전부라는 것을.
수많은 육아서가 범람한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미덕은 다 있다. 우리의 전통 어부바 육아도 프랑스식 아이들처럼 우아하게 키우는 비법도 다 고개 끄덕여지는 구석이 있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다 나와 우리와 옆집 엄마와 떨어져 있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육아서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게 좋을 것이다,라는 훈수 대신 부모되는 것이 각 단계마다 어떤 어려움과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한 친절한 예시와 공감을 구했었나 보다. 그럼 이 책이다.
<부모로 산다는 것>의 원제는 <ALL JOY AND NO FUN>이다. 저자 제니퍼 시니어가 '뉴욕 매거진'에 쓴 커버기사의 제목이었다. 이 기사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던 것같다. 부모로 산다는 것이 생각보다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임을 때로는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희생들이 개인으로서의 행복감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실제 미네소타주에서 행해지는 영유아 교육프로그램 현장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가정을 방문하고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각계 전문가들의 조언들을 충실히 반영하여 부모가 된다는 것의 각 단계가 가지는 의미를 연대기적으로 충실히 구성하게 된 이 책을 내어놓게 된다. 영유아 시기부터 사춘기까지 이제 부모들은 솔직하게 부모 역할의 어려움들을 그녀 앞에서 토로하게 된다. 심지어 <몰입의 즐거움>의 칙센트미하이까지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순전한 몰입이 어렵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그는 이 일들이 덜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예측할 수 없는 아이들, 항상 지금 당장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아이들 앞에서 성인이 몰입을 경험하는 일이란 머리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입양한 딸이 자궁경부암으로 죽어가며 남긴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 샤론 바틀릿의 모습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이러한 영유아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을 좀더 긴 생애주기적 관점에서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손자와 바닥 분수장에서 즐겁게 뛰어 다니고 구름다리에서 아이 다리를 받쳐 주며 유일한 이 순간을 음미한다. 샤론은 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몰입의 순간을 방해하고 자신의 자아를 때로 고갈시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바로 이 순간에나 가능한 일임을. 저자는 샤론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의 육아에 매몰되어 피곤에 쩔어 있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샤론의 딸은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몇 번이나 가출을 하여 샤론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딸을 다시 받아주었고 딸아이가 임신해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의 죽음을 지키며 남기고 간 손자를 최선을 다해 키운다. 저자가 인용한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처럼 인생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과 모든 것이 다 기적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할 지는 아이를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맞게 되는 순간이다.
스펀지밥이 그려진 신발을 신고 아빠 직장에 몰래 찾아가 아빠와 비슷한 사람을 보고 아빠라며 달려갔던 그 귀엽던 여자 아기는 이제 없다. 이제 아이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도 가야 하고 숙제도 해야 한다. 이제 그 아이 때문에 나의 몰입이 방해 당하고 내 자아가 고갈 되기까지 하는 순간은 거의 없다. 대신 아이는 한국식 교육 제도의 그 촘촘한 그물망에 어쩔 수 없이 걸려 버리고 말았다. 아직은 시간이 있지만 나도 곧 아이의 교육과 관련하여 불안한 순간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골목길에서 종일 고무줄을 하다 저녁에 밥먹으로 들어왔던 나의 여덟살과는 다른 아이의 교우 관계에도 엄마가 친구를 초대하거나 어울릴 기회를 만들어 주는 등의 역할 보조가 필요한 시대다. 또 다른 피곤함이다.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같다. 이제 아이들은 부모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추동하는 과잉 양육과 스케줄로 관리당한다. 미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싣고 끊임없이 이 장소, 저 장소로 이동하며 운동레슨, 스카우트 활동 등을 통하여 아이들이 심심해하며 자신과 놀아달라고 요구하지 않도록 한다. 부모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린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 불과 70년밖에 되지 않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짜 진정한 부모의 모습이라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사춘기 아이들과 관련한 대목이었다. 한국에도 중2병이라는 얘기가 있듯 미국의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에게 주는 상처의 깊이와 예리함도 만만치 않은 것같다. 사춘기 아이들을 둔 부모들이 블로그를 하지 않고 더이상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다는 저자의 지적은 예리하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맘' 블로그에 사춘기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글쓰기를 연재하는 엄마는 거의 없다. 아이들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춘기가 소금과 같아 가깝게 닿는 것은 무엇이듯 격렬하게 만든다는 저자의 묘사는 아주 적절하다. 수면 밑의 갈등 들은 드디어 떠오른다. 아이에게 전부를 걸었던 엄마들은 좌절하고 아이와 멀어졌었던 아버지는 자신을 밀쳐내는 아들 앞에서 오열한다.
아이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나면 지금까지 아이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부모의 생활을 비추는데, 그 순간 부모가 충족된 삶 사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p.324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이 시기에 비로소 부모로서의 우리는 진정한 '나'로서의 우리를 아이들과 함께 한 지나온 궤적을 뒤돌아보며 다시 성찰하게 된다. 부모들은 울면서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예측가능한 것은 없다지만 이 대목에서도 저자는 '성장'을 이야기한다.
손자를 돌보았던 샤론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말기암으로 죽어간다. 그녀는 자신이 입양했던 딸과 사춘기에 자살했던 아들과의 시간들을 고통으로만 회상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앞세웠지만 그녀는 영원히 그 아이들의 엄마라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는 손자가 살아갈 세상을 준비하며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영원한 사랑'을 손자와 함께 이야기한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모든 고통과 희생, 심지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이미 되어버린 부모로서의 자리는 물릴 수 없다. 다시 화살을 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우리의 아이들. 이 사랑은 아무리 큰 고통과 상실 속에서도 기적처럼 찾아온다,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 울지 않고 차마 읽을 수가 없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