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김숨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신산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그러한 풍경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속단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에 하필 읽은 이러한 이야기들은 위로가 된다기보다는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누른다.

 

김숨의 소설집의 그녀, 그들은 늙었거나 가난하거나 배신당했다.

지금 이 순간 젊거나 행복하거나 부유한 자는 없다.

김숨의 그녀, 그들은 탐욕스럽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다.

추상적인 문제들이나 고차원적인 사고나 뜬 구름 잡는 식의 호사가 그네들에게는 없다.

그래서 잘 읽히나 그 읽힘이 편안하지 않고 뒷맛이 쌉사래하다.

그것은 작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시선에서 조망된 우리네 삶이 본래 그런 식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국수>

이미 읽었던 작품인데 다시 읽어도 마지막 대목에서는 눈물이 또 툭 떨어진다. "그래요, 지금은 반죽의 시간입니다...."로 시작하여 국숫발을 뚝뚝 끊어 설암에 걸린 계모에게 먹여주는 마지막 장면까지 반죽을 치대고 밀고 썰어 자신의 아이를 낳지 못하고 전처의 자식 넷을 거두었다 말년에 홀로 외롭게 암으로 투병하며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예전에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국수를 만들어 주는 과정 하나 하나에 모녀의 관계를 투영한 이야기는 여자의 인생, 가족의 숙명, 삶의 지난함 등이 눈물겹게 형상화되어 있다. 소설이라는 것이 대단한 서사를 스펙터클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 하나의 과정, 하나의 감정을 심도있게 묘파해 내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방증 같은 이야기다.

 

 

 

 

 

<옥천 가는 날>

옥천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곳이다. 열두어 살 무렵 할머니집이 있는 대구로 내려가다 아버지는 접촉 사고를 내셨고 대부분 안 다친 상황에서 나는 이를 심하게 다쳤다. 가장 가까운 장소가 옥천이었고 아무데나 짚어 간 조그마한 치과에서 중년의 여의사는 응급 처치를 아주 정교하게 신속하게 잘 해치웠다. 사고수습으로 바쁜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행한 나이 든 사촌 오빠를 아버지로 착각한 그녀는 어떻게 하다 아이 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냐고 심하게 야단을 쳤다. 여하튼 옆으로 넘어간 이를 지지대로 다 세우고 상처난 곳을 붕대로 덮어주는 등 그녀의 처치는 나중에 다른 치과 의사들한 테도 매우 깔끔하고 인상적이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래서 '옥천' 하면 아무 연고도 없이 기착지처럼 들른 그곳이 참 믿음직하고 따뜻하게 기억된다. 그러나 정숙과 애숙 두 자매가 옥천으로 가며 주고받는 이야기들로만 짐작할 수 있는 그녀들의 사연은 어둑시근하고 가슴아프다. 구순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그녀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길인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느라 노모를 돌보지 못하는 언니 정숙,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노모를 마지막까지 돌보았으나 요양급여를 타기 위해 노모의 온전한 정신을 치매로 위장해야 했던 동생 애숙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들은 그녀들의 팍팍하고 고생스런 생계와 노모와의 아픈 추억들을 외연으로 밀어낸다. 완전히 죽어 있다는 암시 대신 마치 지척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듯한 암시를 주는 노모와 그녀들의 자리는 마무리 즈음에 가서야 구급차라는 것을 알게 된다. 좁은 구급차 안에서 생과 죽음이 속살거리는 풍경.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중풍에 걸린 홀시아버지를 모시는 첫애를 임신한 며느리의 마음 속은 무간지옥이다. 하루종일 오리 뼈를 고아 그 국물을 마시며 생에 대한 끈덕진 애착을 시위하듯 표현하는 노인은 어느 날 이웃집 여자에게 빌려 준 돈 삼십만원을 대신 며느리가 받아 쓰라는 이야기를 한다. 산책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노인, 약속한 귀가 시간을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 시아버지에게 삼십 만원을 빌려 갔다는 이웃집 여자의 부재.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어쩌면 그 누구의 귀환도 바라지 않는 여자의 진심일런지도 모른다. 어떤 대답도 듣기 어려운 삶 그 자체일런지도 모른다.

 

<명당을 찾아서>

홀린듯이 부동산의 사내의 '명당 운운'에 석모도라는 섬을 따라나선 부부의 이야기는 기막히게 괴괴하다. 김숨 작가의 서스펜스적인 문장들은 큰 사건 없이도 읽는 이의 간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신기루처럼 잡을 듯하면 사라지는 꿈꾸었던 집 대신 이 부부가 당도하게 되는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역시나 이야기는 흔쾌히 답을 주지 않아 김이 좀 빠지기도 한다.

 

<구덩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 구제역으로 숱한 돼지들의 목숨줄을 끊어놓아야 했던 아픈 시간들을 우리는 금세 잊어버렸다. 이 이야기는 돼지들을 살처분할 구덩이를 파는 사내의 던적스러운 삶의 행로와 인간들이 꾸역꾸역 살기 위해 그 구덩이 속에 파묻어버리는 것들의 풍경이 교차하면서 읽는 내내 소름이 오소소 돋게 한다.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종용받는 사내와 그 사내가 지금 하는 일에 끊임없이 욕설을 퍼붓는 교통사고 휴유증을 앓는 주인집 아들의 대면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삶의 행로를 따라 비어져 나오는 숱한 지저분한 실수들과 악행들의 무게를 실감케 한다.

 

삶과 나이듦과 죽음의 그 거칠고 적나라한 속살. 한결같은 그 천착이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자꾸 동심원을 맴도는 것 같아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하고 그렇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과 손길이 빚어낸 이야기들의 울림은 크고 깊다. 입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턱 언저리에 묻기도 하고 흘리기도 하는 국숫발을 반죽하는 시간이 우리의 삶이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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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숨, 역시 대단하군요.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이 소설집을. 한달 뒤에나 가능한 얘기지만.. 여튼 블랑카님 글은 늘 균형있고도 설득력 있는 섬세함을 잃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전 단편 '국수'만 읽었거든요. 두번 읽어도 같은 부분에서 찡했어요.)

blanca 2014-01-08 16:29   좋아요 0 | URL
섬님도 국수 읽으셨군요! 어떤 대목에서 찡하셨는 지 궁금합니다. 저는 솔직히 읽으면서 어울리지 않게 국수가 자꾸 먹고 싶어져서 ㅋㅋ 혼났습니다. 엄마가 아주 어렸을 때 손수 국수 반죽을 밀어 동네 아주머니들과 나누어 먹던 기억도 떠오르고요. 요새는 참 보기 힘든 풍경이지요.

페크pek0501 2014-01-0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어린 데도 읽을 것 다 읽으시는 님의 책에 대한 열정... 을 봅니다.
차라리 아이가 어릴 때 저도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젊었으니 눈이 피로하지도 않았고
오랜 시간 책을 봐도 끄떡없던 시절이었어요.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좀 커서는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줄창 책을 봤어요.

김숨 작가의 글은 (이름은 들어 봤으나) 아직 읽어 보지 못했으니 제가 이 시대를 잘 따라가지 못함은 확실한 것 같네요.
느릿느릿... 저는 고전에 묻혀 지낼 새해가 될 것 같아요.
대신 님의 리뷰 보면서 아, 이런 소설이 있구나, 하는 정도는 하고 살아야겠어요. ^^

blanca 2014-01-10 09:40   좋아요 0 | URL
아, 아이 안고 재우거나 수유할 때 책을 보게 되요. 그래야 즐겁게 견딜 수 있거든요^^;; pek0501님의 모옴 여정이 너무 기대됩니다. 페이퍼 열심히 찾아가서 볼게요.

세실 2014-01-1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숨 작가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되는, 외면할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이군요.
읽어봐야 겠습니다.

blanca 2014-01-13 21:2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젊을 때부터 지금도 젊지만 나이 든 사람들의 내면을 그려내는 솜씨가 아주 비범한 작가예요. 주로 노인들의 고달픈 삶, 내면을 많이 그려서 사실 읽고 나면 한없이 다운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을 아주 노련하게 잘 그려내고 읽히는 재미도 있어서 추천드리고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