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하여튼 하루키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은 없으면서 그의 에세이는 나오는 족족 챙겨 읽게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일단은 재미있고 적어도 공허하지 않고 호흡이 짧아 부담이 없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읽어도 좋고 자투리 시간에 들입다 한 편만 읽어도 무언가 독서를 했다는 포만감으로 배가 부르다.

 

에세이적 자아로서의 하루키는 그의 소설과는 다르게(사실 이렇게 쓰면서 그의 소설이 무언가 아주 비범하고 다소 잔혹할 거라는 쉬운 판단을 내려 버린다.) 지극히 평범하다. 나이는 아버지보다 많은데 감성은 지금 나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신기해하는데 후기를 읽으니 역시나 서른넷에서 서른아홉까지 쓴 에세이를 추린 거란다. 지금의 하루키가 아니라 과거의 하루키의 복기이다.

 

'청춘이라 불리는 심적 상황의 끝에 대하여'라는 글은 내가 나의 스무 살에 느끼는 감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며칠 전 화장품 코너의 아름다웠던 이십 대의 점원에 대하여 가진 묘한 느낌과 맞물려 '청춘이 끝났다'는 것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그 뒷맛에 대한 섬세한 통찰이 반가웠다. 그리고 청춘의 종결에 대한 자각이 삼십 대 중반부에서부터 다가온다는 서글픈 공감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루키가 '청춘이 끝났다'고 깨닫게 된 것은 청춘 시절 좋아했던 여자와 비슷한 용모를 가진 여자에게 그것을 이야기하자 그녀의 너무나 시큰둥하고 남자들이 그런 말을 잘한다는 식의 전혀 진지하지 않은 반응에서 어떤 소중한 것이 훼손되었다고 느끼게 되었던 찰나였다.

 

물론 나는 과거의 그 여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은, 정확히 말해 그녀가 아니라 그녀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녀에 부수되는 나의 어떤 심적 상황이었다. 어떤 시기의 어떤 상황에서만 주어지는 어떤 유의 심적 상황-그것이 실로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청춘이라 불리는 심적 상황의 끝에 대하여> 중

 

그러니까 내가 <건축학 개론>을 보고 울음보가 터졌던 것은 스무 살 좌절된 짝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때 그렇게도 그 사람때문에 설레어 하고 하루 상간에도 천국과 지옥을 쉽게 넘나들던 그 감정의 파고를 떠안고도 견뎌야 했던 그 나약하고도 청승맞았던 나의 심적 상황에 대한 하나의 연민때문이 아니었을까.

 

짐 모리슨에 대한 이야기도 빌리 홀리데이에게 바치는 글도 팝음악을 그저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나에게는 생소했지만 왠지 그들을 기억해야만 할 것 같고 하루키가 직접 추천한 빌리 홀리데이의 음반을 당장 사러 나가서 턴테이블에 걸어야만 할 것 같은 부책감이 들 만큼 달콤하고 끌리는 찬사들이었다.

 

그런 음악이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젊었을 때는 숨을 죽이고 수없이 들어봐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부분이, 지금은 이렇게 와인잔을 기울이며 느긋하게 들어도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시원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들여다보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이를 먹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

-<LEFT ALONE-빌리 홀리데이에게 바침> 중

 

나도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적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싱그럽고, 또한 완벽하다. 위태롭고, 확고하고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행복하고, 그리고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다.'는 느낌을 그가 얘기한 빌리 홀리데이의 미국 컬럼비아 사에서 나온 <The Golden Years VOL. 1>이라는 음반을 들으면서 가져보고 싶다. 언어로 형상화하기 힘든 지점에서 그가 끌어오는 그 단순명료한 묘사들은 미처 입밖으로 꺼내어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일으켜 세워 한없는 청량감을 준다. 음악을 들으며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행복하고 가슴이 아리도록 슬펐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을 기억해 낼 수 없고 기록해 낼 수 없다면 그 찰나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런 순간들을 채집해서 눈앞에 보여주는 하루키라니. 그는 부정하겠지만 하루키는 친절하고 다감한 사람같다.

 

<유명하다는 것에 대하여> 그가 느끼는 소회는 더없이 솔직하고 놀랍다. 지극히 평범했던 그가 유명해지면서 겪게 되었던 소란에 대하여 그가 느끼는 감정은 평범하지 않다.

 

그런데 사람이 한번 유명해지면 전혀 파악이 불가능한 세계로부터 파악이 불가능한 유의 호의와 악의를 동시에 받게 된다. 어떤 때에는 무의미하게 매도당하고, 어떤 때에는 무의미하게 치켜세워진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얽힌 적이 없는 없는, 이름도 모르는 상대로부터.

-<ON BEING FAMOUS> 중

 

이러한 것이라면 글쎄다. 별로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하루키는 작가로서의 자아와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철저히 분리하여 생각함으로써 유명세에 대처하고 있다고 한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나의 가설이라고. 가설은 자기 자신은 아니다,라고. 아, 이러한 대처는 상당히 유연하고 건강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적절하게 통합이 가능한 것이 또 하루키만의 강점이겠지만. 괜찮은 대처법인 것같다.

 

번역가로서의 그가 영어 회화 자체를 능수능란하게 하지 못해도 전혀 괘념치 않아하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공개하고 괜찮아할 수 있는 하루키의 모습도 부럽다. 삼십 대의 하루키가 육십 대의 하루키와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육십 대의 하루키 속에 편재하는 그 모습들이 낯설지 않고 납득할 만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게 이 책의 매력이다. 나머지의 에세이들이 시간의 연대기순으로 그의 나이듦을 반영하고 있다면 모조리 갖고 싶어질 정도로.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어느 할머니와 나눈 이야기. 그 소중한 이야기들은 칠십 대의 시선과 깨달음과 회한을 반영하고 있겠지만 삼십 대의 청춘과 사랑을 포함하고 있기에 할머니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삼십 대의 하루키가 이야기하는 하루키의 저물어 가는 청춘에 대한 단상은 꼭 그 만큼의 깨달음과 치우침을 가지고 있어 뒤돌아 보아도 앞서 보아도 어떤 애틋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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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자 2012-10-08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로 형상화하기 힘든 지점에서 그가 끌어오는 그 단순명료한 묘사들은 미처 입밖으로 꺼내어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일으켜 세워 한없는 청량감을 준다." 제 느낌에는 blanca님의 글이 딱 그렇습니다^^; (그런 분에게 상찬을 받는 작가라면. 읽어보고 싶네요)

한남자 2012-10-08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blanca님 뭐 한가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페이퍼 쓰실 때 혹시 글씨체가 뭔가요? 굴림? 돋음? 이것저것 해 봤는데 왠지 다르게 반듯해 보여서요

blanca 2012-10-08 09:13   좋아요 0 | URL
니코니코님 안녕하세요. 어이쿠, 감사합니다. 니코니코님 덕분에 제 페이퍼의 글씨체를 지금 확인해 봤어요. 굴림체가 맞아요^^;

프레이야 2012-10-08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는 이 책을 읽고싶어 선물 받아놓고는 읽고있는 게 있어 아직 소중히 옆에 두고 흐뭇하게 바라보고만 있어요. 책도 참 아담하니 예쁘지요. 님의 리뷰에 어서 읽어보고싶어 안달 나요. 맛깔스런 리뷰! 오늘하루도 평안히 보내요, 우리^^

blanca 2012-10-08 09:14   좋아요 0 | URL
아, 선물받으셨군요! 저는 솔직히 착한 가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읽게 될 줄 알았는데 이거 한 권 읽으니 모조리 다 읽고 싶어졌어요--;; 여전히 오늘 하늘도 참 이뻐요^^

다락방 2012-10-0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은 참(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감수하고) 리뷰를 잘 쓰세요. 에세이는 그보다 더 잘쓰시지만요.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으면 참 질투나요.

blanca 2012-10-09 09:2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ㅋㅋ 건방지게 안 들리고 황송하게 들려요. 다락방님은 일상에서 책 얘기를 너무나 부드럽게 잘 풀어내시잖아요. 다락방님만의 스타일. 그게 딱 확립되어 있어서 저는 그 점이 참 부러운 걸요.

2012-10-17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8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