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목욕탕에 가지 않게 되었다. 샤워로 대신하다 보니 때를 미는 일도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살이 벌겋게 될 때까지 때를 밀어야 제대로 된 목욕을 했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그러고도 살 수 있냐고 신기해한다. 물론 살 수는 있다. 하지만 때때로 그 뜨거운 김이 자욱한 목욕탕, 지우개 가루처럼 나오는 때를 무슨 전리품인 마냥 보람을 느끼며 씻어내는 맛, 무언가 정화된 느낌으로 먹으며 나오는 요쿠르트나 초코우유의 맛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동네에서 가까운 목욕탕을 찾아보면 대형스파나 찜질방과 연계되지 않은 그 옛날식의 아기자기한 목욕탕은 찾기 힘들다.
그러한 목욕탕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얘기다. 샤워만 해본 아이는 이해하지 못할 것 투성이다. 냉탕에 몸을 던지는 맛이며 죽은 듯 누워 엄마에게 고문당하듯 때를 미는 그 고통이며 그러한 고통을 값진 것으로 만들어 주는 포상품으로서의 시원한 야쿠르트 맛도 아이에게는 와닿지 않음에도 연거푸 계속 읽어달란다. 엄마는 항상 최소 두 번 이상 전신을 밀어야 밀린 숙제를 완수했다고 생각해서인지 나, 여동생, 엄마까지 도합 여섯 번의 강도 높은 때밀이 노동을 했다. 그 정도 되면 세 여자의 몸은 벌겋게 익어버린다. 이 때밀이 문화가 피부의 유익한 각질층까지 제거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도 도망다니며 울며 불며 때를 밀리고 나서는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야쿠르트를 하나 달고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 언 머리카락을 헤쳐 푸는 재미가 쏠쏠했다.
목욕탕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조금 멀어도 조만간 목욕탕 원정을 갈 것이다. 내 몸을 두 번 밀 힘도 없는 저질체력이라 나도 엄마처럼 아이를 데리고 가서 가열차게 때를 밀어주고 잡으러 다닐 자신은 서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줌마의 힘'이 엄마 세대에는 육아의 원동력이자 가정을 지키는 근원적인 힘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김이 풀풀 나는 온탕에 다리 하나를 걸치고 몸 전체를 막 넣었을 때의 그 화한 느낌을 감수할 용기를 내기 직전 그 찰나가 두렵기도 하고 기다려지기도 한다. 이럴 때에는 다시 아이가 되고 싶어진다. 죽은 듯 엎드려 엄마에게 때를 다 밀리고 타 낸 요쿠르트를 몰래 건네줄 장수탕 선녀님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서양의 요정보다 좀 엽기적이기도 하고 촌스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나이든 할머니 선녀님을 만나는 목욕탕은 언제고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