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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원래는 강력한 독신주의자였다. 삶을 사랑한다는 확신은 없었는데 아이들은 아주 좋아했다. 현모양처와는 대체로 멀었고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서툴렀다. 서른 이후의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고 씩씩하게 혼자 늙어가는 모습을 그려본 적은 있다. 결론은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결혼했고 적잖은 기다림 끝에 아이를 얻었고 살면 살수록 겁나는 대상들의 목록이 늘어간다. 그리고 이젠 팔십이 된 나도 상상할 수 있다. 죽는 게 무섭고 때로 진저리 나기도 하지만 가을에는 특히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좋다. 살면 살수록 삶에 더 연연하게 되는 것 같다. 죽음과는 더 불화하게 되는 것 같다. 계획과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삶은 혼자서 흘러간다. 그리고 그러면 그런대로 또 그 풍경은 싫지 않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게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안심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의 영화를 봤던가? 나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로라 브라운이 어린 아들을 놓아두고 어느 날 탈출을 감행했던 장면을 분명히 기억한다. 분명 세 명의 여자들의 시공간이 펼쳐졌을 터인데 나에게는 중산층의 전업주부 로라가 아들을 떠났던 그 장면만 남아있다. 왜 그랬을까?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연년생의 동생이 태어나고 할머니집에 잠시 맡져졌다 돌아와서는 엄마가 나를 떠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었다. 꿈에서 엄마는 매일 나의 동생을 업고 나만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그래서 로라가 결국 아들 곁으로 돌아왔음에도 나는 '떠났다'고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그 당시에 세상 그 자체였다. 그 세상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고문이었다. 그래서 로라 브라운이 둘째를 품고 모텔에서 단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 아들 곁으로 돌아왔을 때 놀랍기도 하고 안도가 되기도 했다. 엄마는, 모성애는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작동되는 생래적인 것이 아니고 완벽한 것도 아니다. 작가는 이것을 알고 있고 직시한다.
이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공유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어느 날 외투에 돌을 가득 집어 넣고 호수로 걸어 들어가던 그 날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20세기 말 뉴욕의 동성애자 예술가에서 사이에서 비교적 성공한 축에 속하는 여인 클래리사는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는 동료이자 한 때 사랑했던 리차드(그는 클래리사를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부른다)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준비한다. 시간은 1949년 로라 브라운 여사와 1923년 런던 교외의 호가스 하우스에서 신경 발작을 일으키는 버지니아 울프를 끊임없이 왕복한다. 세 여인은 동성애적 성향과 페미니즘적 가치관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인습의 힘은 중력의 힘보다 강하다'는 절망감을 공유한 채. 일상에 때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못한다. 작가 마이클 커닝햄은 이 지점을 포박한다. 그 불가사의한 삶에 대한 애착. 버지니아 울프가 결국 호수로 걸어들어가 모든 지각을 멈춘 것도 로라 브라운이 끝내 자살을 포기하고 자식들보다 더 오래 살아 온순한 노부인이 된 것도 그 엄마가 자신을 떠날 것을 예감하고 붙잡는 그 한 마디 "사랑해"를 외쳤지만 끝내 자신은 병마에 서서히 먹혀 들어가는 종말에 먹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던 리차드도 (로라 부인의 아들이었다) 결국은 삶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죽음과 타협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마이클 커닝햄의 통찰은 놀랍다. 그리고 그 통찰은 미려한 문장으로 술술 풀려 나온다.
몇몇 사람은 창에서 뛰어내리거나 스스로 물에 빠지거나 알약을 삼킨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대부분의 절대 다수는 서서히 어떤 질병에 먹히거나, 아니면 아주 행운아라면 세월에 먹힌다. 위로 삼을 것이라곤 아주 간혹 우리의 삶이 아주 뜻밖에도 활짝 피어나면서 우리가 상상해왔던 모든것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아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그리고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이런 시간 뒤에는 불가피하게 그보다 더 훨씬 암울하고 어려운 다른 시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인간은 도시를, 그리고 아침을 마음에 품는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더 많은 것을 희망한다.
-p.306
성장은 희망을 키우고 세월은 희망을 포기하도록 학습시킨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우리는 희망과 작별하지 못한다. 그것은 고문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여인을 읽고 삶을 읽게 하는 책. 마이클 커밍햄이 첫키스보다 강렬했다고 추억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이렇게 그에게 첫사랑의 추억담처럼 돌아왔다. 그것을 듣는 일은 근사하고도 저릿한 일이었다. 로라 브라운은 '아이는 엄마를 영원히 지켜볼 것이다'라는 작품 속 예언처럼 아들의 죽음 앞에 다시 돌아왔다. 떠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을 떠나려고 했던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단죄를 받았다. 저마다의 희망은 고정된 인습의 틀 바깥으로 튀어 나가지 못하도록 조종된다. 그 너머로 넘어가는 일은. 삶을 넘어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