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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허덕이며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 문득 그 고개를 넘어 이미 내리막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는 사람의 얘기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
허세 섞인 과거담도, 지겹게 이어지는 신세타령도, 자만 섞인 충고도 아닌, 자기 마음에서 비늘을 벗겨낸 속살을 그대로 온전히 보여주기를 기대할 때가 있다. 그 속살에는 차곡차곡 나이테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 나이테의 어딘가에쯤 나의 좌표를 찍어 보고 좀더 담대해지기를 꿈꿀 때가 있다. 그럴 때 너무 다행하게도 섬님의 글에 이 책이 있었다.
나는 캠벨만큼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원시 사회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하늘이라고 하는 거대한 지붕 밑으로 펼쳐진 광막한 들판으로 나가거나, 수목에 묻혀 있는 숲속의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맛보고는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신들의 이야기가 왜 바람 속에서, 천둥 속에서 울려나올 수 있는지, 어째서 산자락의 시내는 다 하느님의 육성을 내는지, 어째서 온세상이 다 성소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빌 모이어스의 서문 중
이 책에서의 대담 2년 뒤 죽음을 맞게 되는 '그'의 이야기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었다.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메타포에 불과했다. 그 사이 사이 슬며시 '그'는 삶, 사랑, 결혼, 죽음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깨달음의 전언을 차분하게 들고 나온다.
여기에 있는 나는 여든을 헤아립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와 이루어진 대담. 틀린 부분이 보이는 데로 지적해주시면 앞으로 몇 차례라도 바로잡겠다고, 겸허한 자세로 시작하는 번역자 이윤기의 손끝에서 나와 더욱 찬연하다.
신화
이 책의 곳곳에서 신화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게 변주된다. '육신의 노래에서 부추김을 받은 상상력의 노래',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 그러나 가장 절창은 이것이다.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p.272
날빛 아래 드러난 세계는 구태의연하지 않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계 앞에서 우리는 부조리한 눈앞의 세계를 비로소 이해하고 쓰다듬게 된다. 실재를, 본질을 확신하고 스쳐라도 지나간 사람은 그 주변부에 있어도 안정감 있게 마음의 추를 내릴 수 있다. 신화의 문맥을 생각하면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조셉 캠벨의 얘기는 밤하늘의 별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오디세우스의 눈물의 여정. 그 어딘가에 누구나 슬며시 걸터앉아 있을 것이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는 하나의 지도가 되어 그의 삶을 완성하지 않았던가.
삶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p.132
"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p.133
여든을 헤아리는 사람은 삶 자체를 고결하다고 기만하지 않는다.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 슬픈 것. 내가 행하는 일들이 어떤 이들에게 해악을 주고 상처를 만들 수도 있음을 가능성이 아닌 하나의 숙명으로 인정하는 모습. 그러나 절망, 체념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 이토록 슬프고 무책임하고 잔인한 삶이지만 그래도 그 삶 속 순간 순간을 온전하게 향유하고 절절하게 살아나가기를 조언하는 신화학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어졌다. 슬프디 슬픈 삶이 허무하지 않다고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정직하게 희망적으로 얘기해 주는 노인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막다른 지점에 가서 진실과 희망은 흔히 양립하기 힘들다고 여겼었다. 이 위대한 노인은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하다고 찬탄한다. 참혹함이 역설적으로 삶의 무서운 신비라고 덧붙이며. 그리고 뒤이어 죽음의 이야기. 죽음조차 그의 앞에서는 삶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 못한다.
죽음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p.278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퍼가 내려앉고, 다음에는 타이어...... 그런 식으로 하나 하나씩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예측이 가능해요.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아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p.143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조셉 캠벨의 얘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너무 일찍 경험해 버린 죽음은 아직도 트라우마다. 나는 가족의 죽음을, 친구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것과 화해해야 하는 일이 결국은 오고 만다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언젠가는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도 납득해야만 하고 더 이상 '내'가 주어일 수 없는 세상사 앞에서 무력하게 호흡이 잦아들 것임을 생각하면 벌써 숨이 턱턱 막힌다. 살아가는 일은 결국 죽음과 맞닥뜨리러 가는 일과도 같다.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삶. 그의 전언을 뼛속까지 실감하고 싶다.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삶의 의미와 존재의 축까지 뒤흔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연민
서러운 삶을 공유하는 우리들. 이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일만 남았다.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도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이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p.359
그가 말하는 결혼을 기억하고 싶다. 날마다 사랑하고 날마다 용서하는, 사랑과 용서의 현재 진행형 성사가 결혼이라는 얘기. 성스러운 연결에 자신을 던져 넣는 행위. 전혀 낭만적이지 않는 결혼관임에도 더없이 이 얘기가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들려오는 것은 이 소중한 관계에서조차 영혼의 성장을 얘기하는 그의 진지함에 결국 승복하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서는 만물이 메타포다. 모든 것에서 배우고 모든 것에서 눈물겨운 연결과 메시지를 발견하는 그의 얘기들을 이제 곧 환갑을 맞이하게 되는 나의 친정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다. 이제는 책을 읽고 싶어도 노안 때문에 읽을 수 없다고 슬퍼하고 지난 삶에 부쩍 회한을 느끼고 남은 삶이 너무 미약하고 슬플까봐 두려워하는 나의 엄마.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린 것이다."
-.p.227
참, 그는 어머니가 영웅이라고 했다. 당신은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