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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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 옮긴 이가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감동이 찾아 온다고 속보이는 칭찬을 하는,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인 작가가 쓴, 그렇고 그런 책인 줄 알았던, 이 책.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 마지막 대목을 읽으며 결국 옮긴이의 속보이는 그 칭찬에  동조하게 되었다.  광고회사의 잘 나가는 아트 디렉트였고, 세 번 결혼을 했고, 이제 일흔하나인 그는 오른쪽 경동맥 수술을 위해 수요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 그는 아직 떠나고 싶지 않았고, 아니 영영 떠나고 싶지 않았고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했지만, 심지어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내일을 그렸지만 그는 이제 없었다.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과거 추억을 복기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머나먼 미래, 그것도 '나'라는 존재가 없어 울 수도 웃을 수도 불평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이상 알아 보고 안아 줄 수도 없는 상황을 섬뜩하고 슬프게 그려 보기는 처음이었다. '있음'을 치우고 난 후에는 그 어떤 것의 의미도 '나'를 걸러 건져 올릴 수 없게 된다. 여전히 남은 사람들은 지겨워하며 일상을 누리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상처를 내는 언사들을 날릴 것이고 영원히 살고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모든 것들을 오만하게 움켜쥘 것이다. 

소설의 처음은 소설의 말미에 희망을 품고 수술실에 들어간 '그'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 거기에서 목도한 옆침대 소년의 죽음, '에브리맨'이라는 상호의 아버지의 보석가게, 그리고 하필 겨우 서른 넷에 머나먼 얘기인 것 같은 죽음을 의식했던 일 등 그의 죽음 전에 삶을 채웠던 기억의 편린들은 조각조각 그 '있음'과 '없음'의 간극을 메운다. 흔해 빠진 죽음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추상화된, 일반화된, 간접화법으로만 떠오를 수 있는 단어였다. 불멸의 보석을 팔았던 그의 아버지와 그 보석상의 이름인 '에브리맨'과 그는 모두 그 무한한 '무'에 도달한 그 시점에서도 결코 그것과 화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죽음은 부당하다. 논리적이도 유의미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 그건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그럴듯한 논거들을 갖다 붙여 정당화해도 그건 다 사기다. 왜냐하면 그것을 얘기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살아 있지 않는가. '있음'의 지점에서 '없음'의 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척 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 앞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발적인 죽음을 택하고 "좋아"한 것은 불가능하고 도저한 일을 이루어 냈기 때문에 회자되는 것이지, 모두가 가능한 일은 특히 에브리맨이 가능한 선택지는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이 섬뜩했던 것은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을 수긍하지 않는 주인공의 헛된 미망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그'는 소위 사회적인 시선으로 매우 성공한 축에 꼈던 사람이다. 전도유망한 아트 디렉트였고 퇴직 후에는 고급 은퇴자 마을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건 우리가 부러워하는 삶의 전형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래도 끝은 역시나 허망하다. 더 허망했다. 

희망을 얘기하고 의미를 덧붙이는 이야기가 날아가고 난 자리에 슬몃 끼여든 이 적나라한 무의미한 삶에 대한 폭로.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정말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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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2-0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번역서를 고를때, 역자를 좀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어요.
정영목님은 그런 의미에서 제가 왕 애정하는 역자세요.
그분이 번역하신거면 그냥 읽고봐요, 후회하는 법이 없죠.
그런 의미로 지명도와 다르게 제겐 별로인 분이 김석희 님이세요~^^

참,참,참...참 고우시더군요~
신문을 들추다가 '와락~' 신문을 끌어안았다니까요.
올핸 님을 롤 모델로 삼아도 좋을 것 같아요.
(전 일주일에 4권,한달에 열 여섯 권 정도 읽어요.)

님 명절 잘 보내시구요~^^

blanca 2011-02-01 20:50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저는 예전에 첨부된 글들은 안 읽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꼭 옮긴이의 글을 읽게 되더라구요. 저는 아직 양철나무꾼님처럼 역자 이름과 성격들을 잘 구분해서 알지는 못해요. 이 책의 감동에 역자의 공도 있었군요. 신문은--;; 그저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양철나무꾼님도 구정설 잘 보내세요!

2011-02-04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2-01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의 소설은 <더 플롯 어게인스트 아메리카>(영문이 안 나오네요 ㅠㅠ)를 사전 찾아가며 따문따문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 소설 당기네요. 특히 이 대목이요.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 거기에서 목도한 옆침대 소년의 죽음,"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었고, 거기서 앞 침대의 할아버지가 주검이 되어 실려나가는 걸 목도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러니 저로서는 꼭 읽어야 하는 소설이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명절 잘 쇠세요 블랑카님^^

blanca 2011-02-01 20:52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정말 그런 경험이 있으셨어요? 그럼 꼭 꼭 반드시 읽으셔야 합니다. 분량도 얇고 재미도 있어서 시간도 별로 안 걸려요. 후와님의 평이 꼭 들어보고 싶어요. 게다가 주인공과 같은 추억의 공유라니요. 후와님도 즐겁고 따사로운 명절이 되시기를...

비로그인 2011-02-01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우선! 양철님의..
-> 신문을 들추다가 '와락~' 신문을 끌어안았다니까요.

이 신문은 경향신문이겠죠? 아~주 익숙한 주소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ㅎ
그런데 이게 네 번하고 끝이라니,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좀 더 많은 사람을 인터뷰해도 괜찮을 것 같던데..^^

음. 왠지 남기신 글은, 요새 좀 집중해서 보고 있는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다룬 영화의 장면을 닮은 것 같아서 마음에 닿습니다. 새벽에 앉아 있으려니 술이 덜 깬 것 같아 머리속이 어슴푸레 하지만, 그 영화의 색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닮은 구석이 있네요.


blanca 2011-02-01 20:54   좋아요 0 | URL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솔직히 참 힘겹게 읽었어요. 분량도 너무 많고 나중에는 좀 집중이 안되더라구요.(재미가--;;)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맘 한켠이 어찌나 시리던지. 아이를 두고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 맘이 감히 상상이 안되더라구요. 영화를 봤으면 더 저릿했겠죠. 기네스 펠트로가 아이들을 그네에 태우며 미소짓는 장면 캡쳐한 것만 봐도 슬프던걸요. 그건 저도 나중에서야 제가 끝인 줄 알았답니다.^^;;

마녀고양이 2011-02-0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말이죠, 경향신문 가서 바로 찾았어........ 방금여~
흐흐,,,,, 봐따봐써. 언제 했대여... 아이 이쁘당.... 반가와요.

음, 책 리뷰 보고, 있음 없음에 뭉클해서 생각에 잠기다가 댓글 보고
검색하고 그 바람에 그 감성 다 날아갔네... 어쩔 수 없어요. 즐거운 설 연휴!!

blanca 2011-02-01 20:55   좋아요 0 | URL
마고님 ㅋㅋㅋ 저 느무느무 부끄럽고 그래요. 잊어주세요--;;; 내일 가열차게 일할 예정입니다. 마고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2011-02-01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1-02-0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국문학 작품을 읽게 되면 번역가 이름과 이력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유독 정영목이라는 분의 역서를 많이 읽었던거 같아요.
지금도 민음사 <오스카 와일드 단편선>을 읽고 있는데 이 책 번역 역시 그 분이더군요 ^^
제가 아는 분도 필립 로스의 이 소설을 강추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읽어봐야겠어요.
최근에 <울분>이라는 제목의 신간도 나왔더군요.
설 연휴 잘 보내시구요,, 명절 증후군 조심하세요 ^^

blanca 2011-02-03 22:46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읽는 책도 정영목시의 번역이네요. <오스카 와일들 단편선> 좋은가요? 궁금했는데. 시루스님 아주 자알 보냈습니다. 힘좀 썼죠 ㅋㅋㅋ 생각보다 안 힘들어서 제 저질체력이 개선되었나 좋아하고 있답니다. 시루스님도 잘 보내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