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계몽사의 <<세계 소년소녀문학전집>>에서 톨스토이를 만났다. 그가 쓴 몇 편의 단편 소설(아마 어린이를 대상으로 했을)은 죄다 '이반'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나왔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술주정뱅이가 우연히 거리에서 구해 준 벌거벗은 천사는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나 그랬던 것 같다.
그 후 언젠가 <부활>을 지루하게 읽었고 사순절 기간 함세웅 신부님이 예수의 부활과 그 작품을 함께 언급한 강론에 감동받았고 서재에 와서 문학동네의 <안나 카레니나>의 몽환적인 표지에 사로잡혀 다시 톨스토이를 조금은 더 진지하게 만나게 되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실 안나 카레니나의 불륜에 초점이 맞추어진 소설이 아니다. 그랬다면 안나 카레니나가 철로에서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 덧붙여질 이야기들이 없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가 죽고도 이야기는 더 멀고 깊은 곳으로 뻗어나간다. 사회의 인습, 편견, 고정 관념에 역행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의 이야기는 그 중간 지점 정도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여기에 등장하는 '레빈'이라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가 그것을 뛰어넘는 철학적 성찰로 이야기를 확장한다. 유한하고 모순 투성이의 삶이 가지는 무한한 의미를 찾아 헤매는 그의 모습은 톨스토이의 그것이기도 하다. 어떤 이야기가 주인공으로 여겨지지 않는 주변부의 인물의 머릿 속을 유영하는 수많은 생각들의 향연으로 이다지도 멋지게 끝맺음하기는 힘들 것 같다. 현학적이지도 추상적이지도 지루하지도 않게 울림을 가지는 결말을 완성하는 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 켠에 슬며시 밀어넣고 더듬게 되는 삶 그자체 대한 허무감, 모순,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놓고 싶은 이야기들의 공명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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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상류층 출신이다. 백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막대한 영지를 상속받았다. 젊은 시절 그는 잠깐이나마 가진 것을 절제 없이 누린 경험도 있다. 그러나 그 잠깐을 제외한다면 그는 평생을 자신이 가진 것때문에 미안하고 괴로워했다. 가난한 농부들 앞에서 무위도식하는 듯이 보이는 귀족의 생활을 누리는 것은 그에게 흡사 형벌이었다. 노년에 접어들어 러시아에서 차르에 버금가는 권력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막강해졌을 때에도 그는 스스로를 여든 둘 먹은 바보 멍청이라고 자학한다. 그에게는 열여덟이나 어린 아내 소피야가 있었고 그녀에게는 양육해야 할 자녀들과 톨스토이가 포기하려는 세속적 가치들에 기대야 할 지난한 삶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저작물들의 가치를 포기하고 지팡이만 짚은 현자처럼 세상의 온갖 고매한 기대에 부응하려는 남편의 모습은 그녀에게 증오와 분노를 안겨 주었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아내에게 살인자, 짐승이라는 욕설을 듣게 된다. 그녀에게 그는 그저 무책임하게 가족들을 방기하고 떠나려는 증오스러운 가장으로 보이는 지경에 이른다. 그가 시골 기차역장의 집에서 객사하게 되는 최후는 슬프기 그지없다. 모든 것을 버리고 높아지라!는 주변의 기대와 요구는 서머싯 몸의 말처럼 톨스토이가 스스로의 메시지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톨스토이가 진정 원했든 그렇지 않든 그가 말년에 추구한 무소유의 삶은 가족 전체를 뿌리부터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고통스러워하며 그악스러운 아내에게서 도망친 톨스토이는 죽어가는 그 와중에도 끊잆없이 무언가를 쓰는 시늉을 하고 진리를 추구했음을 잇새로 힘겹게 내뱉었다.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의 고뇌로 맺은 결말은 톨스토이의 최후와 만난다. 톨스토이가 아내 소피야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끊잆없이 아내를 의식했고 그녀를 때로 측은하게 느꼈다. 그가 추구했던 형이상학적 가치들과 형이하학적 일상들이 어긋나는 지점에 오뚝 서 있는 소피야는 우리가 지향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들을 의식하게 한다. 삶 그 자체의 의미와 고매한 가치들을 목이 부러져라 쳐다 보아도 결국 우리가 딛고 서 있는 곳은 땅이다. 그의 비극적 최후는 우리가 아무리 별을 쳐다 보아도 결국은 고개를 떨구고 발을 옮겨야 함을 가르쳐 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