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실로 저 늘 어두운 밤에 깊숙이 숨어서, 낮 동안은 모습을 보여 주는 일이 없고, 다만 '꿈일 뿐인' 세계에서만 환영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월광처럼 휘뿌옇고, 벌레 소리처럼 가늘고, 풀잎의 이슬처럼 여리고, 요컨대 암흑의 자연계가 만들어낸 처절한 도깨비나 요괴의 하나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늘에 대하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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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작가 다나베 세이코는 이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을 여성문화의 '황천'이라며 극찬한다. 오사카의 몰락한 상류 계층의 네 자매 이야기로 일본판 <작은 아씨들>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세설>의 작가가 정작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고백한 산문에서는 여성을 그저 '여자'로 어둠을 뱉어내는 구중중하고 어둑신한 존재로 폄하한다. 일본인 특유의 그늘과 어두움에 대한 감정적 지향을 전통 건축물과 종이, 그릇 등과 연결하여 섬세하고 고혹적으로 표현해 낸 문장들은 정작 여성 그 자체를 그저 그림자에 잠긴 사물로 물화하는 대목에서 튕겨 나온다. 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당시 식민치하의 우리나라를 비하하는 대목은 분명 일부이긴 하지만 거북살스럽다. 소설에서 작중 인물의 시선이 투과한 허구의 안전막을 걷어 낸 후 작가가 하는 말들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세설>이 가지는 그 엄청난 미덕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되기는 힘들 것 같다고 고백한다.
소설이 소설로 읽힐 때 가장 소설로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허구적이고 작위적이라는 완충장치를 벗어던지고 하나의 실현으로 독자를 포박해 올 때 우리는 문학이 주는 극치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세설>은 엄청난 즐거움을 준다. 서사의 기복이 큰 것도 아니다. 그저 단조롭게 네 자매의 일상들이 셋째 유키코의 혼담과 어우러져 전개된다. 당시가 전시라는 상황적 특성은 하나의 간주에 불과하다. 똑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태어난 일본의 문학과 우리의 문학을 대비시키켜 보겠다고 생각하면 감히 계속 읽어나갈 엄두가 안 날 만큼 분위기의 낙차가 크다. 반세기가 넘어 당시의 꽃 구경, 반딧불이잡이, 프랑스어 교습, 독일인 가족과의 친밀한 교제를 읽으며 즐거움을 느끼다 끼어드는 혼란감은 문득문득 치미는 생목 같았다. 따사롭고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이야기들이 식민치하 우리 조상들의 처절한 생활고와 핍박상을 그린 이야기들의 기억과 만날 때는 물론 대단한 죄책감을 느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멀미가 나기도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아이들 양육과 생활에 치여 지친 장녀 대신 그 역할을 떠맡은 둘째 사치코, 고분고분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오사카 여자의 전형으로 그려지는 유키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자유 연애와 스캔들에 얽히고 자기 일을 당돌하게 추구해 나가는 막내 다에코의 이야기들은 아직도 소설이 끝난 그 자리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맴돌고 있을 것만 같다. 특히나 노처녀로 몇 번이나 결렬되는 맞선의 주인공인 유키코의 혼담이 마무리되는 결말은 그녀가 결혼하고 나서 또 어떤 에피소드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모 포털 사이트에 그녀의 결혼이 성사되는지 여부의 질문이 올라와 있을 정도이니. 작가가 철저히 여성들의 입장에 동화되어 그녀들의 감정의 결을 세심하게 다루는 모습은 그가 과연 여성을 단지 그늘의 미학의 부속품 정도로 호기당당하게 묘사한 대목과 어긋난다.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혼담을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듯히 순종적으로 대처하는 유키코에게 그런 흔적이 언뜻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문득 문득 생기 있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면면이 이런 그늘을 지워 버린다.
1930~40년대의 일본 상류층의 풍속과 간사이의 지방색과 여성 문화가 다채롭게 그려져 있어 그것만으로도 진진하다. 간사이 특유의 사투리를 살릴 수 없어 번역자는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전라도 사투리가 가지는 무게감을 떠올린다면 그 아쉬움을 쉬이 떠올릴 수 있다. 원문으로 읽는 맛은 또다른 감칠맛이 있을 것 같다.
온갖 사념들이 머리 속을 휙휙 스치고 지나갈 때 시작해 볼만하다. 잡념을 일소한다. 뒷얘기가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 근질근질한 싫지 않은 초조함에 정작 내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은 저만치 대책없이 물러간다. 심각하게 무게잡고 진지해지겠다고 생각하면 또 한없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작품이다. 그냥 이야기 그 자체에 푹 젖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