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태어난 자녀를 둔 부모는 이듬해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할지 고민하게 마련이다. 다섯 살배기가 몇 개월 빨리 태어난 아이들과 섞이는 것을 막고 싶기 때문이다. 이 경우 대부분의 부모는 몇 개월 뒤처진 것으로 인해 유치원에서 겪는 불이익이 무엇이든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건 하키와 마찬가지다. 연초에 태어난 아이가 누리는 아주 작은 이익은 연말에 태어난 아이가 겪는 불이익과 마찬가지로 꾸준히 이어진다. 성취감과 낙담, 용기, 좌절이 일종의 패턴이 되어 그 아이를 수년간 묶어두는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 중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에 대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쑥 내민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씨근거리며 읽던 중 통화하게 된 집주인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청자 중심의 완곡어법으로 내 애간장을 태웠다. 대한항공 801편 괌추락사건에 대한 신랄하고도 흥미로운 분석은 바로 동양인들의 권력 관계를 의식한 불명확한 의사표현에서 비롯된 기장과 부기장 간의 비행조종의 비능률적 소통 행태가 극심한 피로로 판단능력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기장을 적절하게 통제, 보완하지 못한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엄동설한에 이사를 가야 한다는 그 힘든 얘기가 에둘러 돌아온 바로 그 길이었다. 아이는 12월생이고 그나마 몬테소리라 맘껏 뛰어놀게 해 준다는 그 유치원의 십 대 일의 경쟁률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이래저래 참 마음이 시리다.
아웃라이어는 아웃라이어가 아니다. 결국 성공은 개인의 미덕이 아니라 환경과 기회의 강력한 조합으로 예측 가능하다,는 그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 설득력이 강한 사례들을 하나 하나 따라가는 경로에 저자가 동행한다. 빌 게이츠는 사립학교의 부유한 어머니회가 투자해서 만들어 준 컴퓨터 터미널을 마음껏 활용하여 실시간 프로그래밍을 배울 수 있었고, 1955년에 태어난 덕에 개인컴퓨터 혁명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1975년에 때맞춰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저자는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의 특별한 기회에서 성공이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난들 시대가 때맞춰 그 자질을 요구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량 정도로 치부되고 말것이다. 이 대목은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존 롤스의 정의론과 조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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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는 특정한 시기에 사회가 가치를 두는 자질 역시 도덕적으로 임의성을 띤다고 지적했다. 내 기술이 결실을 많이 맺고 적게 맺고는 사회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1860년대의 석유와 철도 재벌들의 어마어마한 부의 축적도 사회적 수요와 맞물려 가능했다. 심지어 롤스는 노력의 결과로 성공을 치하하는 것도 경계한다. 노력하는 능력도 하나의 행운으로 주어진 것일 수 있다. 결국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끈질긴 믿음을 버릴 것을 마이클 센델은 역설한다.
그렇다면 이런 각종 임의적인 요인들이 적절하게 조합 발화되어 이루어지는 성공 앞에서 독자들은 망연자실하고 말 것인가. 하필 출생률 절구형 그래프의 불룩한 부분 언저리에 그것도 십이월에 아이를 낳아버린 내 앞에서 말콤 글래드웰은 그런 출발선부터 뒤처진 아이들에게도 기회를 줄 것을, 마이클 센델은 발빠르게 성공한 사람들의 성취물을 공공의 이익으로 함께 나눌 것을 얘기한다. 빈약한 결론이 그들 담론의 핵심은 아니다. 존재하는 방식이 그 자체로 옳은 것은 아니다,라는 그 당연한 진리를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다. 익숙한 집을 떠나는 것과 거대담론의 투망을 벗겨내는 것은 어느 정도 비슷한 일인 것 같다. 귀찮지만 가끔 해줘야 허섭쓰레기들을 미련없이 비워낼 수 있다. 관성은 언제나 쉽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당연하게 눈앞에 쌓아놓게 한다. 하필 읽은 책과 일상에서 벌어진 일들이 섬뜩하게 만나는 그 지점에서 때이른 추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