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을을 보면 마음이 참 이상하다. 참 좋기도 하고.
아버지는 운전하다 석양을 보면 으레 서툴게나마 그것을 찬미하고 싶어했다. 신경숙 작가의 말처럼 언어는 삶의 바깥을 흐르기 마련이라 아버지가 못다한 수많은 얘기들이 그 속에 있음을 짐작했다.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절절하기도 하고 뭐 그런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또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뒷날들이 오버랩 되는 그 지점에서 장녀에게 해주고 싶은 수많은 얘기들을 언어화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도 함께였을 것 같다.
법정 스님 스페셜에서 상좌스님이 동자승들을 곁에 두고 노을을 보며 배경처럼 나지막하게 한 얘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바로 어제 너희들 같았었는데 저렇게 저물거라고. 지금 나는 정오쯤 온 것 같다고.
하루해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맑게 갠 날만이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듯이
자기 몫의 삶을 다했을 때
그 자취는 선하고 곱게 비칠 것이다.
남은 날이라도 내 자신답게 살면서,
내 저녁 노을을
장엄하게 물들이고 싶다.
-<허의 여유> 중
저녁 노을을 보며 법정 스님을 추억할 뒷사람들을 마치 예감이라도 한듯하다. 어젯밤 이 대목을 읽고 왜 노을을 보면 마음이 애잔해 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삶의 일몰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모습은 언제나 얼마쯤은 슬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삶의 성실성을 유추해 낸 그의 혜안과 내 저녁 노을을 장엄하게 물들이고 싶다던 그의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이 가슴께를 뻐근하게 했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닌, 충만하게 존재하기 위해 살라는 그의 얘기가 허공에 흩날리는 수사로만 들리지 않았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는 않고, 새로운 물건이 진열된 선반으로 끊임없이 이끌린다.
-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중
소유의 가치가 존재의 무게감과 직결되는 듯한 환상을 주입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이고 지고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갈 수 없다. 억만장자라도 그건 별 수 없다. 다 버리고 가야 한다. 그 때에서야 비로소 순간의 있음으로 엮인 삶의 정수를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 슬픈 도식은 정형화된 삶의 패턴 같다. 알베르 카뮈도 얘기했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 받을 것이다,라고. 공교롭게도 그 날 본 티비 단막극에서는 여주인공이 사랑은 원레 헤픈 거라고 누가 그렇게 움켜쥐며 싸가지 없게 사랑하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랑은 원래 헤픈 거라고.
적게 가지고 많이 사랑하라고. 저녁 노을을 볼 때마다 삶의 황혼에 이르렀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연상해 내고 역설적으로 현실에 더 충만하게 존재하라고.
노을을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 달라질 것도 같다. 종교를 떠나 절절하게 순간순간 삶을 꼬옥 꼬옥 눌러 밟았던 스님의 얘기를 들으니 지저분한 내면이 조금 정갈해 지는 것 같아 상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