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여고생들은 미남자에 탐닉했다. 여기에서 무서운 여고생들이란, 용수철처럼 탄성 있는 지독한 곱슬머리, 혹은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원래 눈의 이분지 일 크기도 안보이게 하는 독한 근시렌즈의 안경, 무쇠 같은 종아리 중 어느하나라도 지녀 존재감을 빛내는, 그러니까 전혀 은교 같지 않은, 롤리타의 백만분지의 일도 안닮은 그런 여고생들을 뜻한다.  물론 그녀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눈부신 반전을 몸으로 이루어냈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들의 과거가 담긴 사진을 죄악시한다. 누군가가 그 사진을 싸이에라도 나도 친구좀 있었다며 올린다면 바로 그것때문에 늙어도 이지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쩡! 쩡! 봤냐! 봤어? 역시 그녀는 그 날 아침도 다크호스 소식을 물어왔다. 스탠바이미, 쥑인다. 리버피닉스! 환장한다!
<스탠 바이 미>는 나에게도 특별한 추억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 개봉한 셈이었지만 한참이나 지나 비디오로 접하고 그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르는 나의 절친은 영화 그 자체보다는 그 영화에 등장했던 어린 리버피닉스의 아우라에 굴복했다. 보지 않고도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 지레 물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그 영화를 정말 봤는지 봤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스탠 바이 미>를 떠올리면 그 무서웠던, 무모했던 지독한 장난꾸러기 여고생 4인방들이 떠올라 미소짓게 된다.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들은 친하다. 목소리도 작아지고 웃음도 줄고 스티븐 킹이 얘기했듯이 단순한 설렘도 점차 잃어가면서. 그래, 설렘의 순간이 줄어든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감정의 외줄타기의 그 곤혹스럽지만 황홀한 스릴은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빅맥 햄버거와 감자튀김의 문학적 등가물이며 평론가들이 개똥으로 안다는(그 자신의 표현이다.) 소설을 쓰는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로 만났었다. 글쓰기의 그렇고그런 작법이나 너절하게 늘어놓는 진부함대신 사실 그 자신의 문학적 자서전으로 재기와 말발이 용솟음치는 정말 사랑스러운 책이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책을 읽다 울기도 했다. 요즘같이 문자 텍스트가 천대받는 풍조에서 글만으로 독자를 미친듯이 웃길 수 있는 것은 정말 대단한 재능임에 틀림없다. 한편 이 책은 그 자신에 대한 하나의 선입견을 공고하게 하는데 일말의 책임이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 있을 것이라고 독설을 뿜고 진부한 플롯이나 문체에 치중하는 작품을 과도하게 비난하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어떤 예술적인 성취에 대한 열등감이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을 몰고 오니 말이다. 그는 허술한 반전에 걸핏하면 등장인물을 죽여대며  그렇고 그렇게 독자를 속여먹어 부자가 된 작가로 오인받을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나는 속았다. 그의 그런 작위적 허풍에. 그는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  

그가 중편의 작품들을 독립 출간할 기회를 벼르다 드디어 네 편을 두 권으로 묶어 내놓게 되었다. 그리고 이 네 편은 그가 단순히 공포물 작가가 아님을 방증한다. 그의 작품이 개똥으로 폄하될 이유가 없음을 강변한다. 이 두 권을 아우르는 타이틀 사계 중 가을, 겨울에 각각 속하는 '스탠 바이 미'와 '호흡법'을 거의 단숨에 다 읽고 나머지 봄,여름편을 같이 구입하지 않은 것을 통탄했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쇼생크 탈출'의 원작이 실려있다.  

제일 중요한 일들은 제일 말하기도 어렵다,로 시작하는 '스탠 바이 미'는 그의 자전적인 작품 같다. 서른 네 살 베스트셀러 작가의 늙어가는 몸뚱이 속(너무하잖아. 겨우 서른 네 살인데.)에 잠들어 있던 열두 살의 '나' 고든 라챈스의 그 여름을 복기해 나가는 얘기다. 그 여름, 열두 살에서 열세 살로 넘어가던 그 찌는 듯했던 여름, 죽은 형의 존재감 속에 부유하는 '나'는 블루베리를 따러 나갔다 실종된 레이 브라워라는 아이의 시체를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찾아 나서게 된다.

1960년 여름, 그들이 철길을 따라 간 길은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왜 하필 캐슬강 교각 위에서 기차를 간발의 차로 피하며 건너는 그 무모한 경로를 택했는지, 곧죽어도 두 개의 선로 위를 고집했는지를 한참 후에야 의아해하면서도 그래서 그 대단찮은 여행이 대단한 것으로 변모했음을 깨닫는다. 그 시절에는 항상 어리석고도 과감하고도 우직한 길을 선택한다. 나중에는 항상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길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택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전진을 했음을 안다. 그건 성장이다. 꼭 그 길이 아니었어도 됐었을 것이라고 깨닫는 순간 그 길을 고집했던 치기와 미숙함은 저멀리 흩어져 간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을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씁쓸하고 알딸딸한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결국 그 불쌍한 아이의 시체를 두고 갑자기 차를 타고 편하게 오는 반칙을 한 형들과 서로 접수하겠다고 다투는 장면이 연출된다. 그러다 결국 누구도 그 시체를 접수하지 못한다.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않고, 안 하고, 못하고, 해서도 안 되고, 하려고 하지도 않고, 하려고 해도 못하는 죽음에 대해 섬뜩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과거를 이해하고 죽음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설을 쓴다는 그의 고백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별볼일없는 하층민 집안의 아이로 없어진 우유값의 도둑으로 지목되고 대학진학반의 천덕꾸러기로 낙인찍혔던 크리스가  그 아이의 시체가 '우리 거'였어 라고 얘기하는 대목은 그가 갈망했던 것이 결국 어른들의 이해와 존중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잘해나가는 아이들한테만 정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해나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더 절실함을 호소한다.이 은근히 진중하고 의젓한 아이는 미래의 유명작가가 될 '나'에게 이런 아름다운 조언을 한다. 이 대목은 정말이지 더없이 문학적이다. 개똥이라니! 

네가 그렇게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하느님이 재능을 주셨기 때문이야. 이건 하느님의 말씀이야.너한테는 이걸 주겠다. 꼬마야. 잃어버리지 마라. 그런데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뭐든지 잃어버리기 마련이야. -p.180 

이런 친구가 물 속에서 나를 아무리 끌어내릴지라도 결국 같이 살기 위해 그의 소망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임은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넘어가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던 철로를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것으로 묘사했던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시 이 책에도 그 보석처럼 군데군데 빛나는 통찰들이 박혀 있다. 특히 글쓰기에 대한 적나라한 자기고백, 삶에 대한 깨달음들. 

내 경우에는 글쓰기는 언제나 섹스를 대신하고 싶어 하지만 언제나 섹스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이다. <...>지금은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그래서인지 즐거움이 조금은 줄어들었고 자위행위처럼 죄책감이 섞인 이 쾌감이 내 머릿속에서 인공 수정처럼 냉정하고 분석적인 이미지와 결합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 다시 말하자면 출판 계약서에 명시된 규칙과 규범에 따라 사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p.151

그가 끼적인 소설을 누군가가 보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던 경험을 회고하는 대목은 글쓰기가 가지는 그 은밀하지만 이중적인 즐거움을 얘기해준다. 글을 쓰는 행위는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럽지만 또 단 한명의 독자라도 염두하게 되는 모순적인 행위다. 또 그 점이 글쓰기가 가지는 아주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나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으면서도 또 공유하고 싶기도 한.  

이 무모하고 약간 괴기스럽기도 한 탐혐이 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그 탐험의 와중에 친구들을 거의 미칠 정도로 매혹시킨 작가지망생 소년의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작품 두 편도 감상할 수 있다. 특히나 블루베리 파이 먹기 대회의 반전을 다룬 액자 소설은 또다른 수확이었다. 스티븐 킹은 문자 텍스트로 영상 이미지를 띠워 올리는 특출난 재능을 가진 것 같다. 축 늘어지기 쉬운 문자들에게 쭉쭉이를 시켜줘서 신나게 뛰어다니게 한다. 독자는 그러니 지루할 틈이 없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는 영화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의 소설에서는 이런 추체험이 가능하다.   

 함께 실린 <호흡법>은 그가 공포작가로 찍히기를 주저하지 않고 이 중편집에 실은 유일한 작품이다. 우연찮게 노년의 남성들의 기묘한 클럽에 들어가 그 멤버중 한 명이 산부인과 의사시절 환자로 만났던 미혼모와의 얘기를 듣게 되는 구도로 진행되는 얘기는 섬뜩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그 아름다운 미혼모가 순산을 도와주는 호흡법을 열심히 연습하며 사회적 편견들을 헤쳐나가다 맞게 되는 비극적인 최후는 스릴러처럼 흐르려던 작품의 기류를 하나의 처절한 비극적 아취로 마무리지어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의지의 겨울, 인간의 의지가 무력하지만은 않음을 모정을 통해 보여준다.  

스티븐 킹이 알고 있는 가장 따뜻한 마법,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따뜻한 곳으로 가는 그 환상적인 체험을 하고 오는 길, 주인공 고든 라챈스의 바람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 

내 마음의 일부는 언제나 6월처럼 거의 9시 반까지 하늘 한 구석에 햇빛이 어슴푸레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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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1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탠 바이 미> 영화를 못 봤답니다. 그런데 4월 행사로 DVD 세일을 하는거여여..
그래서 냉큼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지나친 구매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며칠을 미루었어요...
그 사이에 홀랑 품절 되었답니다. 으흐흑...

blanca 2010-05-11 18:00   좋아요 0 | URL
아, 그랬던 거였어요? 저는 품절된 상태만 봤는데 그랬군요. 지나친 구매에 대한 반성의 의미 ㅋㅋㅋ 저도 자숙과 반성기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무슨 책을 주문했는지 기억 못하는 상태로 치닫고 있답니다. 무서워요, 제 자신이--;;

L.SHIN 2010-05-1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추천을 2개 주고 싶은데.

"네가 그렇게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하느님이 재능을 주셨기 때문이야. 이건 하느님의 말씀이야.너한테는 이걸
주겠다. 꼬마야. 잃어버리지 마라. 그런데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뭐든지 잃어버리기 마련이야."

생각해봤습니다. 나를(재능을) 돌봐주는 것은 수 많은 책들과 알라디너들의 이야기들 때문은 아닌가 하고.
나를 키운 것은 책이 5할이었어요.

blanca 2010-05-11 18:01   좋아요 0 | URL
L.SHIN님 8할이 아니라 5할이라고 하시니 그 나머지가 더 궁금해집니다. 저도 이 대목을 읽으며 괜히 뭉클하더라구요. 저는 잃어버리지 않았나 싶어서요--;;

순오기 2010-05-1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킹은 참 매력적인 작가예요~ 결코 공포작가로만 기억하면 안되겠군요.

blanca 2010-05-12 14:1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는 정말 몰랐어요. 그렇고 그런 작가인 줄만 알았는데 자녀분들이 좋아한다고 하셨죠? 참, 좋은 작가인 것 같아요.

순오기 2010-05-13 00:53   좋아요 0 | URL
우리 애들은 스티븐 킹 많이 읽었어요.
나는 책을 빌려오거나 사주기만 하고 '유혹하는 글쓰기'외에는 제대로 안 봤지만, 영화는 제법 봤어요.^^

穀雨(곡우) 2010-05-12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다닐 때 스티븐 킹에 빠져 한 동안 헤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순오기님 말씀처럼 공포스릴러 작가로만 기억하면 스티븐 킹의 한면만을
보는 일이네요.

blanca 2010-05-12 14:13   좋아요 0 | URL
곡우님 그러셨군요. 저는 대중소설적 재미만 추구하는 작가인 줄 알았어요.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순오기 2010-05-1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은 글샘님이 전공이시니 관련 책도 많이 보셨을 듯합니다.
저는 어린이 책은 몇 권 봤지만 일반인을 위한 책은 달랑 '건방진 우리말 달인' 하나 봤거든요.^^

blanca 2010-05-14 16:4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순오기님 오늘 날씨 정말 너무 더워요. 근처 공원에 갔다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었답니다.

후애(厚愛) 2010-05-15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왜 하나밖에 안 될까요... 속상해~ ㅜ.ㅜ

주말 행복하게 보내세요~ ^^

blanca 2010-05-16 16:55   좋아요 0 | URL
후애님, 주말이 거의 다 저물었네요. 벌써 초여름 날씨 같아요. 행복하게 보내셨죠?

후애(厚愛) 2010-05-17 08:16   좋아요 0 | URL
이곳은 아직 일요일 오후에요.
조용히 잘 보내고 있어요.^^

2010-05-16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7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05-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탠바이 미에 나왔던 리버 피닉스를 알고 있는 십대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스탠바이미는 우리 세대를 위한 책이 아닌가 싶어요.

blanca 2010-05-18 16:42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 그럼요. 그 책을 읽고 정말 꿈을 꾸는 느낌이었어요. 다시 그 시절로 귀환한 듯한. 그리고 리버 피닉스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정지되어 있고요. 스티븐 킹에 대하여 과연 책이나 많이 팔아치우는 싸구려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원서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