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얘기. 그런 얘기는 언제나 모래 바람이 남기고 간 입안의 서걱거림처럼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역사 소설은 배경과 굵직한 사건들의 리얼리티의 기둥 사이로 잊혀진 우리들의 삶의 서사를 통과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얘기되어야 하는 것들과 얘기해야 하는 것들,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그것들의 얽힘과 때로는 저것들의 폐기의 지점이 실패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검은 꽃>은 참 읽고 싶었던 작품이다. 경영학 석사까지 마친 작가의 이력이 막상 소설 창작의 길로 내닫고 주요 문학상을 싹쓸이하고 10여개 국에 번역되어 나가는 성공까지 거두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히 이채로운 일이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가끔 읽게 된 인터뷰 내용이나 에세이들까지 나는 그저 김영하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의 소설은 화장실에서 신문에서 연재되던 <퀴즈쇼>를 드문드문 읽은 게 전부였으면서도 나는 그의 보헤미안적 삶의 기행에 무조건 열광했고 무언가를 하고 싶으면 할 수 있고 쓰고 싶으면 쓸 수 있는 그의 자유가 부러웠다.  

그를 아는 체하기 위해 <검은 꽃>을 읽겠다고 집에서 몇 정거장이나 떨어진 도서관에 돌도 안된 아기를 들쳐없고 받아 온 그의 책은 산산히 분해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돌적으로 이 책에 덤벼들었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너덜너덜해진 그 책의 갈라진 배 속에서 탈출을 준비하고 있던 그 수많은 속지들을 순서대로 추리면서 나는 그를 알기를 단념했다. 한마디로 내키지 않았다. 책을 읽은 자는 말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 책을 정리했던, 혹은 꺼내주었던, 또 나에게 건네 주었던 그 사람들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돌보지 않은 그 의식적인 책에 대한 무관심과 무례함이 싫었다.  

그런 <검은 꽃>이 김영하의 컬렉션으로 재발간되어 왔다. 풍선처럼 부풀 대로 부푼 기대 앞에서는 그 어떤 작품도 경이로울 수 없다. 송곳처럼 까칠한 시선 앞에 그의 무미 무취한 캐릭터들과 소설적 비약들이 내내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거슬렸다. 두툼한 분량도 아닌데 진도가 안나갔다. 그러나 조금씩 밀고 나가는 그의 이야기들이 마침내 영원한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작품이 이룬 성취에 박수를 쳐 줄 수 있었다. 지극히 소설적인 그의 목소리가 결국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 아님을 현실의 그 수많은 한계와 난관을 뛰어넘는 인간의 꿈꾸는 눈동자에 대한 사려깊은 응시임을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1905년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 팔려나간 1032명의 그들의 이야기. 애니깽으로 회자되는 그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두드려 깨우고 그들의 꿈을 복기한 이야기. 언제나 잊혀진 역사 속 이야기들을 다시 듣는 일은 힘겨운 추체험이다. 역사 속 이름없는 민중들의 사소하지만 그들에게는 전부인 삶의 이야기가 훑고 간 자리. 심지어 남의 나라 혁명의 부속품으로까지 이용되고 버려진 그들을 기억하는 일은 하나의 의무 같다. 그게 남은 자의 최선이자 도리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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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3-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여, 이런 책이 좋은 책이며 한번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진짜 손이 안 간답니다. 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해요. 읽은 이후 다가오는 질척한 상념이랄까 우울이랄까 현실 직시랄까 이런 것들을 이겨낼 용기가. 좋은 소설들은 더 마음을 울려놓잖아요.. ㅡㅡ;;

그래서 맨날 읽는 책이 일반 교양(과학, 심리, 역사)와 경제와 자기 경영 여행, 그리고 현실 도피적인 추리 소설과 환타지를 왔다 갔다 한답니다. 블랑카님 대단해여!

blanca 2010-03-09 14:22   좋아요 0 | URL
그런데 이런 책들의 한계는 그냥 결말을 열어놓아서 허무하다는 거예요. 지금 한창 소설에 조금 질려서 저도 마녀고양이님처럼 일반 교양 분야로 넘어가려 합니다. 소설은 약간 집중이 안되는 경향도 있고 어릴 때의 그 몰입되는 순간도 이제는 없더라구요. 슬퍼요, 흑흑.

순오기 2010-03-10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의 책은 하나도 안 읽어서 몰라요.ㅜㅜ

blanca 2010-03-10 13:33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읽고도 김영하를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재능이 많은 작가임에는 분명한데 저랑 완전히 코드가 맞는 것 같지는 않고 그래요^^;;

저절로 2010-03-1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혈이 심해 그래,이젠 도서관이야. 괜히 대출이란 게 있겠어? 하며 도서관으로 달려가면,
쩝~ 꼴들이 말이 아닙디다. 성질같아선 그 너절한 책들 확 바닥에 패대기쳐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구입 희망도서란에다 '웬만하면 새로들 장만하시죠' 소심하게 적어놓고 도망치듯 나옵니다. 끙.


blanca 2010-03-10 13:35   좋아요 0 | URL
그죠? 진짜 너무 심한 책들이 있어요. 읽다가 절로 불쾌해지는.... 도서관도 멀고 불쾌한 경험도 좀 하고 나니 점점 멀어지네요. 중고샵을 많이 이용해 보려고 해는데 사실 그것도 책을 계속 늘리는 일이니 서재에 대한 로망만 계속 커지고... 그래서 답은 책을 최대한 천천히 보기로 했어요^^;;

꿈꾸는섬 2010-03-1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알라딘 김영하 컬렉션 광고는 봤는데 클릭을 안해봤거든요. 검은꽃이 개정판으로 나왔군요.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네요.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었어요.^^

blanca 2010-03-11 14:34   좋아요 0 | URL
책은 실물이 참 이쁘더라구요. 이렇게라도 뒤늦게 읽어보니 기분이 좋더라구요. 꼭 읽고 싶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