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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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되었다. 완전히. 정말 완벽하게. 리뷰를 쓰고자 하는 <면도날>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읽은 <달과 6펜스> 얘기다.
고갱을 모델로 한 그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슬퍼서가 아니라 그 웅혼한 작품성에 완전히 압도되어 울었다.
눈이 멀고 문둥병까지 걸려 그림을 그려나가는 그 사내의 그 무모한 열정과 이상주의적 삶에 대한 치기가 속물 근성의
그 연약한 거죽을 통째로 벗겨 버린 듯한 착각. 이 한 권의 책이 서머싯 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의 절대적인
기반이 되었다.  

<면도날>을 읽고 나는 알라딘의 리뷰어들에게 감사했다. 칭찬일색의 그 리뷰들이 이 책을 챙기게 했고 오백여 페이지의
그 책을 다 읽고 난 새벽 한 시경 나는 예전 그 때와는 또다른 감동으로 한참을 오도카니 앉아 있게 됐다. 서머싯 몸은
흔히 대중적인 작가로 불리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소설은 여하튼 재밌기 때문이다.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며
일으키는 그 가벼운 바람은 진중한 작품성도 왠지 가벼운 것으로 치환해 버린다. 재밌기 때문에 되레 그의 인생에
대한 통찰과 사려깊은 성찰은 천덕꾸러기처럼 돼 버렸던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 나도 진부한 칭찬으로
이 책의 지름신을 강림케 하련다. 작품성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소설이니 얼른 읽으라고.  

1차 세계대전에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중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귀환한 래리 대럴이라는 젊은이가 삶과 신의
의미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여정을 중심으로 사교계의 노회한 신사이자 대단한 속물이지만
비열한 사람은 아니라고 몸이 변호한 엘리엇 템플턴, 그의 조카이자 래리의 약혼녀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물신주의에 경도되어 래리를 떠나 안온하고 부유한 결혼생활을 택하는 이사벨 등이 얽히고설켜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다.
인상적인 것은 작중 화자가 대놓고 서머싯 몸 자신임을 밝히고 등장인물들을 때로는 관조하고 때로는 다둑이고 때로는 비난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마치 논픽션인 것같은 효과와 더불어 서머싯 몸 자신의 이야기들도 다소 들어볼 수 있는 아주 유쾌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그는 못생긴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절대 익숙해지지 않으며 작가는 열과 성을
다해 몇 달에 걸쳐 완성해 놓은 책을 독자는 이 세상이 하나도 할 일이 없어질 때까지 아무 데나 놓아둔다는 생각에
몹시 우울해진단다.

주인공 래리 대럴이 사랑과 세속적인 부를 모두 놓아두고 떠나는 그 구도의 여정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대척점에 서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엘리엇의 얘기가 그것을 중화해 준다. 엘리엇은 지극히 리얼하고
지극히 유쾌하고 지극히 속물이지만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관심을 계속 기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주변 사람이다.
미국인으로서 프랑스의 상류층에 입성한 그는 파티를 숨구멍처럼 여기며 사교계를 그의 삶전체의 무대로 간주한다.
그런 그가 죽어가면서까지 공작 부인이 여는 가장 무도회에 초대장을 받지 못한 것에 격분하다 몸이 재치있게 공작부인의
비서를 사주해 만들어낸 초대장을 받고 참석하지 못함을 애석해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면서도 무언가에
끝까지 전체를 걸 수 있는 그 순진하고 정열적인 무모함에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유언은 정말 귀엽지 않은가? 

"엘리엇 템플턴 씨는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노베말이 공작 부인의 친절한 초대에 응할 수가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p.397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중략>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p.459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차 차창으로 뒷걸음치던 풍경마냥 자꾸만 스러져 가는 그 수많은 추억들의 덧없음과 비례하는
생생하고 절절한 기억들의 무게 속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우두망찰하는 요즈음 나에게 래리 대럴은 얘기한다.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거라고. 구도의 여정을 밤을 새워 들려주고 난 래리는 작중 화자이자 작가 서머싯 몸과 함께 아침에 갓 배달된 바삭바삭한 크루아상과 카페오레로 아침 식사를 한다. 래리의 얘기와
몸의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추임새가 엮어낸 하룻밤을 마감하는 그 아침의 크루아상과 카페오레의 그 아늑하고
그리운 냄새들이 나의 코앞에 와서 당도했다. 나도 그들과 밤을 지새운 듯한 피곤함과 또 래리의 구도의 여정 끝에
함께 당도한 듯한 그 아름다운 지향의 웅장한 아름다움(착각일지라도)이 뒤섞여 그 밤 나는 잠을 설쳤다.  

그리고 구정 전날 제사 일손을 거들면서 어머님의 주름 속에 알알이 박힌 그 수많은 추억들과 고단함에 진정한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것이 아주 짧은 시간만 유효한 사이비 약발일지라도 나는 몸에게 숭배를, 감사를 바칠 수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의 고장에 가 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정보국의 무리한 비밀 첩보 임무를 맡았다는 그런 사람에게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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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2-16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셋 몸 작품 중 못 읽은 책이네요... 서머샛 몸 작품 무척 좋아하는데. 캡쳐하신 글 와닸네요. 찰나와 영원. 영원한 기쁨은 없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찰나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습니다.

blanca 2010-02-16 14:0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명절 잘 치르셨는지요? 이 책은 피곤한 와중에도 열심히 읽었답니다. 무엇보다 몸 책은 재미있으니까요. 분량이 좀 있어서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금방금방 넘어가더라구요. 다음에는 '인생의 베일'을 읽어볼까 하고 있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1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모옴의 중단편집도 재미있으니 하나하나 독파해 보세요.그런데 계속 읽다 보면 모파상의 인물묘사를 연상케 하지요.모옴도 모파상의 작품을 좋아했으니까요.결국은 읽다 보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어요.그런 걸 극복하지 않으면 독서가 독이 될 수도 있죠.

blanca 2010-02-17 18:19   좋아요 0 | URL
모옴의 중단편집이 재미있군요. 그런데 모옴은 어떤 이상적인 인간을 꼭 대척점에 놓아 두는 것 같아요. 이게 조금 작위적이기는 한데. 맞아요. 박완서. 모파상. 모옴. 인간 속의 잔인하고 절망적인 속성을 너무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읽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츱츱해지는 단점이 있더라구요. 노자님의 고언을 들어야 이들의 독서가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18 16:20   좋아요 0 | URL
하긴 박완서도 우리 마음 속 누구나가 갖고 있는 속물근성을 잘 끄집어 내지요.특히 모옴의 성격묘사를 보면 아주 악랄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착한 사람이 남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당하는 이야기를 통쾌하다는 듯이 그리거든요.달과 6펜스에도 그런 인물이 나오죠.마누라를 뺏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