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면데면하게 지냈던 과동기 두 명이 오월 축제의 그 달보드레한 분위기 속에서 정작 열광한 것은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였다. 무언가를 기다렸던 그 긴 줄 속에서 그 두 명이 남기고 간 호들갑스러운 헌사들을
들고 온 손 끝으로 나는 이미 그 영화의 비디오 테잎을 플레이어에 밀어넣고 있었다.
연년생 여동생은 지루하다,를 남발하며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다 조금 울기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면서
나를 들쑤셔 댔지만 그렇게라도 마치고 난 영화의 끝 자막이 올라가는 자리에서 우리 둘은
같이 숙연해졌다. 그런 영화였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영화의 몇 장면을 생각하면
가슴 한 곳에서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그 애상어린 감정들을 추스리기가 뭣하다.  
97년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수상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가
남기는 잔상이 얼마나 깊고 길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마냥 내 깊은 곳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의 궤적을 따라 지도를 그리는 영화다. 그 지도는 사막에서도 이탈리아의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도 그려진다.
온몸을 사프란빛 화상으로 뒤덮은 영국인 환자 알마시(랄프 파인즈)와 그의 곁에 남아 간호하는 캐나다인 간호사 해나(줄리엣 비노쉬), 인도인 용병 킵, 그리고 연합군 스파이로 활동한 카라바지오가 이탈리아에서 기이한 동거를 하며 펼쳐나가는 이야기는 영국인 환자 알마시가 사막 탐사를 하며 끼워넣게 되는 한 여인과의 비감어린 사랑얘기와 어우러진다. 

캐서린은 사막의 탐사팀에 뒤늦게 합류한 이의 아내였으니 진부한 불륜의 도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알마시와 그녀가
대저택의 후미진 곳에서 벌이는 은밀하고 암시가 가득한 정사장면. 인도인 용병 킵이 간호사 해나를 도르래에 태워 번쩍
날아오르게 하여 교회의 성스러운 벽화를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장면.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야외에 전신화상으로 옴쭉달싹할 수 없었던 달마시를 들것에 태워 나가 킵, 해나. 카라바지오가 함께 비를 맞으며 그들만의 축제를 열며 열광하는 장면. 지금도 현현한 이 영상들은 나의 눈에 붙어서 나의 내밀하고 여린 부분에 붙어서 같이 숨쉬고 있다. 

영화의 구성은 아무리 치밀하다고 해도 영상안에 담아내려는 온전한 시도들을 위하여 허술한 공간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의도적이기도 하다. 그 틈에 관객들의 상상력이, 때로는 습관화된 경멸이 스며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 영화를 주변에 권해주기도 한다. 적어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원작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심증을 굳어지게 했다. 영화의 짜임새가 불친절하면서도 아주 예민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글로써 파고 들어간 부분이 있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아버렸다. 

마이클 온다치라는 이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성을 가진 작가가 뒤에 있었다. 부커상을 수상한 것은 차라리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는 것은 일장일단이 있다. 영상의 틀 안에서 굳어져 버린 인물의 이미지를 습관적으로 투영하게 되기 때문에 원작의 인물을 왜곡해서 해석할 우려가 있지만, 적어도 죽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 그 수많은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묘사를 눈 앞에서 마술처럼 즉시 생생하게 재생할 수 있는 기막힌 특혜도 누릴 수 있다. 

일단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달마시는 완벽했다. 그 달마시를 알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원작 속의 달마시도 불가해하게만 여겨졌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을 다이어리처럼 들고 다니는 남자.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지도화하는 남자. 사막의 문맥 속에 항상 물기 속에 행복해했던 여인 캐서린을 끼워 넣으며 고심했던 남자. 그러나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주장당하는 것도 주저했기 때문에 잔인하게 사랑의 마침표를 찍고 만 사람. 캐서린이 결국 남편의 질투로 인한 의도적인 비행사고로 거의 죽게 되자 동굴 속에 그녀를 안고 가 정성어리게 그녀의 몸에 마지막 책을 쓴 사내. 캐서린이 달마시보다 열여섯살이나 연하로 설정된 것은 영화에서 거의 같은 연배로 보였던 여배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틀어진 것이었지만.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해나는 세상에, 스무살이었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던 그런 원숙하면서도 들까부는 여인이 아니라 완전히 미성숙하면서도 묘한 체념의 무게를 가진 여자애였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인도인 공병도 이십대였고 그가 해나에게 해 주었던 그 벽화 감상 기행은 원작에서는 중세를 연구하는 노학자에게 준 선물이었다. 원작과는 조금씩 다른 부분이지만 원작을 왜곡했다는 생각보다는 영상으로 가동했을 때의 그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한 의도적인 수정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책. 이 책. 진부하고 또 진부하지만 나는 이 책에 별 다섯 개가 아닌 온 지구상의 별을 아니 온 태양계의 별을 다 그러모아 붙여주고 싶다.(과장이 심한가?--;) 번역한 책의 행간을 연필로 그어 더럽혀 보기는 처음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들. 비선형적 시간을 넘나들고 등장인물 사이를 마음대로 미끄러져 오고 가는 그 수많은 아름답고 명징한 단어들. 어구들. 시인의 심장을 가진 소설가라는 시카고 트리뷴의 찬사는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는 밤이면, 그는 다시 또다른 별자리가 된다. 그는 천 개의 적도로 이루어진 팔을 베개 위에 올려놓고 , 포옹하며 잠들어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파도가 친다. -p.282 

사랑은 참으로 작아 바늘귀도 들어갈 수 있다.-p.380 

게다가 이러한 시인의 심장은 2차 세계대전이 떨치고 간 그 수많은 불합리와 그 비이성에 대한 준엄한 심판과 더불어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감싸여 더 세차게 고동친다. 폭탄해체를 위해 투입된 인도인 용병 킵의 인생 그 자체가 작가가 전쟁이 남기고 가는 그 수많은 상흔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사회소설로서의 가치를 부여받는 대목도 이 곳이다. 

이제. 스리랑카 태생의 미국인. 영원한 이방인의 슬픔을 머금고 걸어갈 수밖에 없는  작가 마이클 온다치와 이 소설의 영화화 작업을 아주 매혹적이고 도전적이었다고 즐겁게 회상했던 고인이 된 앤서니 밍겔라 감독에게 작별인사와 더불어 그들의 그 이름들을, 달마시가 끝내 사막에서 잃어버리고 만 그 이름들을 내 손 안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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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1-23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파인즈는 저 영화이후론 별 신통치가 않아요,,,아쉽게도,,,쩝
저는 아직도 저 영화를 보면 무너집니다,,,그래서 책은 읽지 않고 있어요,,,,
멋진 페이퍼에요~.^^

blanca 2010-01-23 13:54   좋아요 0 | URL
우와! 나비님이당! 맞아요--;; 랄프 파인즈 이 영화보고 완전 빠졌었는데 도통 좋은 영화가 안나오네요. 열입곱 연상 여인네랑 살림 차렸다는 얘기까지만 기억하고 있어요. 저도 이 영화 보면 수시로 무너집니다. 원래 영화랑 원작 있으면 둘 중 하나는 기울기 마련인데 책보면 더 무너집니다. 이 책은 일상에서 좀 떠나 한적한 곳으로 여행가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책에 빠져 있다가 일상을 돌아보면 괜히 신경질이 나서-..-

순오기 2010-01-2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파인즈, 더 리더의 그 남자였지요?


blanca 2010-01-23 14:2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는 더 리더를 안봐서^^;; 더리더에 나왔나 검색들어가 봅니당!

blanca 2010-01-2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네요. 저 몰랐어용!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0-01-2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만 봤지요. 생각만해도 두근거려지는 영화에요.
역시 원작의 저렇게나 아름다운 문장이 영상으로 표현되기엔 한계가 있겠어요.
원작을 읽고싶어집니다. 시인의 심장을 가진 소설가라 칭송 받다니요.

blanca 2010-01-24 20:28   좋아요 0 | URL
솔직히 원작이 많이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상당부분이 이미지로 얘기되어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아. 정말 대단한 작가더라구요.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 수많은 분위기와 이미지를 그렇게나 잘 표현해 놓다니.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질 만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