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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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기 같은 눈에 폭폭 발을 담그며 만나러 간 고등학교 동창들의 눈에는 이제 더이상 열망이 없었다.
대신 피곤체념이 버무려진 눈동자가 각자의 고충과 애환들을 드러낼 때만 형형했다. 

난 전세계에서 터졌을 어마어마한 양의 불꽃들을 상상했고, 내가 옛날에 헛되이 쏘아올렸던 마음의 불꽃들을
생각했다. 내 것이 아니었던 열망들에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고, 난 돌아섰다. 안녕. 무모했던 날들이여.-p.230

에메랄드빛이 바랜 타자기가 잿빛의 물빛을 머금고 오롯이 놓여 있는 표지는 왠지 바랜 열망들과 꿈들을 상징하는 대유로
보여 마음이 끌렸다. 책을 읽다가도 몇 번이나 표지를 다시 넘겨보고 그 타자기를 쓰다듬어 보게 되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표지와 가볍고 화려해 보이지 않는 속지의 재질들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물리적인 책의 외형만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을 만큼이었다. 북디자인이 가지는 무게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가벼운 책은 소박한 내용에 맞춤한 옷 같았다. 

한국에서 여류전업작가로, 게다가 시인으로, 독신으로 살아나가는 것에 대한 쓸쓸한 고충들이 서른에 끝난 잔치 타령으로
상처받은 그녀의 입에서 절절하게 나온다. 사실 나부터도 그냥 그 시 제목에 같이 흥청댔던 당시의 기억 속에
그녀를 도발적인 팜므파탈 정도로 찍어 넣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그 소비지향적 이미지에
더하여 더이상 시가 소비되지 않는 역설의 시대에서 자기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 모습이 낯설고 슬펐다.  

그 해 여름, 나는 비를 막느라 비닐포장을 두른 슬레이트 지붕아래 러닝셔츠 차림으로 누워 생각날 때마다 시를 썼다. 매일
쓴 게 아니라 매시간 썼기 때문에 시를 쓸 때마다 옆에다 쓴 시각을 적어놓을 정도였다.-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中

시인은 닮았다. 가난하다. 김연수가 시인이 아닌 소설가로 방향을 틀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도, 조정래가 아내 김초혜를 시인이라 더 예우해 주는 대목도 결국 시는 삶이 아닌 천상의 가치와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시인들은 생활인으로는
서툴 수밖에 없다. 

그녀가 끝까지 시인으로, 그리고 당당한 여류전업작가로서 이제는 뒤로 했다는 열망을 다시 앞으로 끄집어 내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 생이 반드시 먹고 호흡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로 연결될 수도
있음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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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9-12-3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작품은 책만 사놓고 아직 못 읽고 있네요.
당장(!) 읽어야겠다는 다짐이.. ㅋㅋ

저도 대문 글 보면서 뭔가(!) 느끼고 갑니다. ^^;;

blanca 2009-12-30 20:55   좋아요 0 | URL
빨리 읽어 보세요. 책장이 잘 넘어간답니다.^^ 그리고 저 벌써 오늘 하루 3잔 마셔버렸습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노이에자이트 2010-01-0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종종 들러서 댓글 남겨도 되죠?

blanca 2010-01-01 16:39   좋아요 0 | URL
고맙죠ㅋㅋㅋ 노이에자이트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노이에자이트를 줄여 노자라고들 하시던데 사람 이름을 딴 건지 궁금하네요. 오타날까봐 두번이나 되뇌었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01 16:44   좋아요 0 | URL
'새로운 시대'의 독일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