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분한 낙화... 
검은 플러스펜이 이 지점에서 무언가를 썼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중2였는지 중3 때였는 지조차 가물가물하다.
중학생이었고 이 시를 배우던 날 바깥은 화창했기 때문에 우리는 야외수업을 연호했고 사투리가 심하고 화끈한 국어샘은
우리를 데리고 벤치로 갔다. 나는 필기에 목숨거는 필기만 범생인 바야바 머리의 여중생이었고 이 시구에 검은 플러스펜으로
무언가를 메모하며 순간 행복하다, 고 생각했다. 나에게 시는 그렇게 가슴을 치고 걸어들어왔다. 

중3때 윤동주를 알게 되었고 순전히 서시를 읊조리듯이 우수에 젖은 얼굴이 마음에 들어 좋아하기 시작했다.
범우 사르비아 문고였나? 그의 시집을 사기 위해 사당동에서 상도동까지의 그 언덕을 혼자서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
그리고 그 시집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윤동주의 후배가 되리라고 다짐했었다. 



이 사진은 꽤나 오랫동안 내 다이어리 뒷편에 철해져 있었다. 시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여학생의 흠모는 그 태어난 시인의 단명한 삶에서 더 많은 우수를 찾아 환상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용정에서 연희전문대학생이 가지는 의미는 아주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방학 때면 꼭 교모와 교복을 착용하고 마실을 다닐 것을 ㅋㅋ 권유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런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드리는 듯 문밖까지 교모를 쓰고 나갔다가 마당 안으로 휙 던져 놓고는 나가고는 했다고 한다. 남앞에 나서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나 보다.

그가 일제 치하 생체실험대상이 되어 스물 여뎗 살에 죽고 만 비화는 최근에도 방송이 되었다. 그 안에서도 동생이 "가을이 와서 귀뚜라미가 울어요."라고 편지를 보내자 답장에 "너의 귀뚜라미는 여기에서도 울어주는구나."라고 써 보냈다는 그. 그가 생체실험의 희생자로 죽고 나서도 그의 어머니는 비교적 담담하게 슬픔을 삭히는 모습이었지만 빨래바구니에서 윤동주의 셔츠가 나오자 그것을 들고 뒷산으로 가서 거기를 몇 번이나 굴러 내리면서 오열했다고 한다. 

그가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 문익환 목사와 절친이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학창시절 그의 사촌 송몽규와 나란히 1,2,3 등을 자치했다고 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제에 투옥되어 죽고 혼자 남은 문익환 목사는 후에도 이들을 참 많이 그리워하고 슬퍼했다고 무릎팍도사에 문성근이 나와서 얘기했다. 

부끄럽게도 시집 하나를 통독한 것은 그의 것이 전부이자 마지막이다. 그의 시는 나처럼 문외한이 그저 쓰윽 읽기만 해도 가슴 속에 시구 하나 하나가 알알이 들어와 박혀 생채기를 낸다. 그 생채기에는 나의 청소년기의 추억들이 스며 지금도 화석처럼 굳어 있다. 윤동주를 생각하면 그 안에 닥치는 대로 읽고 봤던 나의 어린 시절이 들어와서 맴돈다. 겉보기에는 초라했지만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고 다시 산다고 해도 또 똑같은 시간들을 되살고 싶을 만큼 영롱한 나날들이었다.

다시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연말을 다 흩뜨려 놓은 내 주변의 것들을 그러모을 수 있는 하나의 응축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누군가의 시가. 시인이 되려다 소설가가 되었다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 자신의 한계가 몰아낸 길이기도 하고, 시를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어져 가는 현 세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시인이 태어나기 힘든 세상이다. 시집을 검색해 보니 리뷰도 적고 출간일들도 다 오래 전이다. 문학의 뒤안길로 나앉은 것 같은 서글픈 모습이다. 김연수가 시가 자신을 치유했다면서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를 추천했는데 이 시집을 구할 도리가 없다. 외서에도 없다. 비행소녀에게 부탁해야 할지 고민중이다. 영어 실력이 초짜라 구한다고 해도 온전히 그 감동을 누리고 치유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오늘도 이리저리 검색하다 반가운 책을 만났다. 내일 아마도 이 책을 주문하게 될 것 같다. 6% 할인을 누리기 위해 참으로 많이도 기다렸던 1일이 아닌가. 책을 살 명분은 모으고 모으면 화수분처럼 계속 피어난다. 돈이 아니라, 사야 할 이유가. 
 암, 나는 선생님과 함께 읽지 않으면 안되는 우둔한 학생이다. 백석은 월북시인이라 재조명 받은지 얼마 안된다. 언젠가는 꼭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사생활 얘기도 있다니 금상첨화다. 나 같이 가십을 좋아하는 유형에게 안성맞춤이다. 12월이 오면 나도 시를 읽게 된다. 시인이 될 수는 없으니까 시를 읽는다. 시를 읽으면 어느 순간 내 속의 그 팽팽한 현이 갑자기 파르르 떨리면서 아주 묘한 환각의 느낌이 오른다. 소설이 줄 수 없는 부분이다. 시는 천상과 닿아 있는 것 같다. 시인은 인간이 모국어 속에 몰아 넣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을 꾹꾹 담아 읽는 자가 그것을 하나씩 펼치게 한다. 내 손에 들어왔던 것은 작은 조가비였는데 어느 순간 나는 바닷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그리고 혀에서는 짠내가 느껴진다.  

시인이 많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시를 많이 읽는 분위기가 다시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시를 읽으면 겸손해지니까. 덜 슬퍼지니까. 덜 외로워지니까. 삶이 환상일지라도 드문드문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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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2-0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본 백석시집'과 자야 여사가 쓴 '내사랑 백석'을 갖고 있지만 꼼꼼히 읽지 않아서...
저에게도 시집 읽는 연말, 연초가 됐으면 생각합니다.^^

2009-12-01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09-12-0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수정했습니다. 제가 읽고 웃었네요 ㅋㅋㅋ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백석시가 생각보다 잘 안읽힌다고는 하더라구요. 읽을 책이 다 떨어지니 괜한 짓만 자꾸 하구 빨랑 책들이 와서 다시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순오기님, 저 자꾸 아리랑 지르고 싶어서 어떡하죠? 당분간 참아야 되는데-..-

순오기 2009-12-01 19:00   좋아요 0 | URL
조정래선생님 대하소설 3부작은 필히 소장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접니다.^^
아리랑은 그야말로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어떤 역사서보다 잘 보여주니까 질러도 후회 안해요!!

302moon 2009-12-0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집을 연이어 읽기만 하고, 아직 리뷰를 안 썼어요.
주신 댓글 따라 들렀답니다.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분이 백석 시인이었는데,
정본 백석 시집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가지 나오면 또 솔깃하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웃음)
반갑습니다. 종종 뵈어요. ^^

blanca 2009-12-08 23:29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백석을 아셨어요? 우와...나이가 어케 되시는지 ㅋㅋㅋ 평안도 사투리가 너무 어렵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탄복하게 되더군요. 정말 시인은 태어나는게 맞는 것 같아요. 리뷰 기다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