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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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천도서목록에서 조르바는 꼭 현학의 과시처럼 포함되어 있다. 고전이고 다수의 추천을 받는 책들은 제목만으로 내용을 결정지어 버리는 묵은 습관이 있기에 나의 생각은 음. 그리스인 조르바가 젊고 아름다운 그리스 청년인 줄 알았고, 어떤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한 신에 가까이 닿은 그런 존재일 거라 상상했다. 

책을 펼쳐봄과 동시에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는 육십이 넘은 노인이고, 오히려 젊은 청년은 작중 화자(작가)이고,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욕망과 육체를 묶어 놓는 인습, 관념, 사회적 속박의 고삐를 완전히 풀고 망아지처럼 날뛰는 인간상이었다.  

이러한 인간에 그토록 열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머리로 지향하는 케케묵은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진저리와 무조건 욕망과 육체를 하위의 것으로 치부하고 꾹꾹 눌러담아 수단화 하려는 거대담론에 적극적으로 반항할 수 없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나의 전체적인 감상평은 기대이상은 아니었고, 딱 기대 만큼, 아니면 조금 덜한 정도. 일단 조르바보다 주인공의 나약한 선병질적 기질과 조르바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관념론에 기대어 현학적인 어휘를 마구 섞어 대는 것이 진부하게 보였고, 친구의 언급이 지나치게 소설적이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인 면이 있다. 고전은 반드시 고전인 이유가 있다.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서사 구조가 조금 지리하더라구도 꾸욱 참고 읽으면 차를 타고 가다 차창 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눈물겹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정말 그랬다. 기억하고 싶은 대목들. 

조르바가 늙은 할머니가 토요일이면 이웃집 처녀를 우르르 찾아오는 청년들을 의식해 곱게 단장하는 모습을 철저하게 비웃고 무시하는 대목. 그것으로 할머니는 종말을 맛본다. 여자는 언제까지나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녔다는 것을 희화화해서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독자는 포복절도하게 된다. 유언이 조르바를 붙잡고 "나를 끝장낸 건 바로 너다." 라고 했다면 여기에서 배꼽을 쥐어잡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조르바의 여성에 대한 폄하가 조금 거북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 대목에서는 기탄없이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조르바의 외할아버지가 항상 갓 도착한 나그네를 탐색하여 찾아내어 대접하고 "말하소!"라고 외치는 부분. 나그네를 따라 간접경험의 길을 떠나는 조부에 대한 회상이 너무나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조르바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한 가슴팍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구 들이부어주는 기분이었지만, 특히 이 말은 꼭 메모해 두고 싶었다. 이 얘기를 심장에 박아 두어야지. 사람이 미워질 때마다. 열어 보아야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리고 이 책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오히려 조르바보다 마치 퇴물 기생처럼 묘사되고 있는, 그러나 조르바 앞에서 여자이고 싶어 우스꽝스런 치장으로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미래를 꿈꾸는 가련한 부불리나를 제일 사랑하게 되었다. 크레타의 혁명당시 온 네 나라의 제독을 무릎위에서 가지고 놀았다고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그녀의 허풍이 너무 귀여워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조르바와의 결혼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는다. 그녀의 죽음을 기회로 그녀의 하찮은 물건들을 어떻게든 훔쳐가려고 전전긍긍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추한 인간 원형의 밑바닥 욕망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려 나의 사소하고 추잡스러운 작은 욕심들을 채우려는 인간의 가장 저급한 모습.    

 

조르바가 추진한 케이블 고가선이 다 무너지면서 그들의 갈탄광 사업은 망한다. 그럼에도 그 지점에서 그들은 마음껏 마시고 춤추며 그 순간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이 결론이 좋다. 리얼리티. 실존 인물이었다는 조르바와의 아름다운 인연은 여기에서 끝이 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번역자의 후기에서 보면 조르바의 딸이 환갑이 넘어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찾아온 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유대는 사후에도 피가 되어 흐르는 것 같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철학서를 대한 느낌이었고, 나에게 조르바 같은 인연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하였으며, 고전을 읽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한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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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도 많이 들어 읽은듯한 이 책을 읽기로 이 연말에 문득 결심을 한 것은 누군가 나를 조르바 같은 인간이라고 불렀기 때문인데, 이 리뷰를 읽으니 읽을 힘이 나네요ㅎ (땡투를 드리며 휙)

blanca 2009-11-12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올해부터 리뷰를 꼭 쓰기로 결심한 거구요. 읽기만 하고 기록을 안남기니 참 허무하더라구요. 조르바 같은 인간은 극찬인데요? 꼭 읽어볼만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