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여백과 공백 사이로 핵심 메시지가 들고 난다. 많은 것을 말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이해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지 덜어내야 하는지를 기민하게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은 성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희에게>는 드라마틱한 서사가 없다. 대학 입시를 앞둔 딸 하나를 이혼 후 홀로 키우는 윤희가 일하던 곳에서 휴가를 얻지 못하자 충동적으로 그만두고 딸과 함께 일본 오타루로 여행가는 게 주요 이야기다. 핵심은 윤희가 왜 하필 일본으로 무리해서 딸을 데리고 가느냐는 것이다. 거기엔 고등 시절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일본인 혼혈 친구 쥰이 있다. 쥰은 일본으로 가고 윤희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연락이 끊겼다 우연히 쥰에게서 편지를 받는 것이 그 계기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이 영화의 깊이와 감동은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울림을 가지는 지점은 그런 여백과 공백을 김희애라는 노련한 배우가 소화해서 연기하는 곳이고, 오타루의 눈이 부시는 설경과 그 설경 속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ost고, 많은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사랑하고 독립해 나가는 큰 딸과 엄마의 현실적인 교감의 지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너무나 조화롭게 형상화해낸 연출의 역할이다. 


아주 오랜만에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반드시 많은 것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는 각성을 준 좋은 작품을 만났다. 좋은 이야기를 좋은 방식으로 하는 일은 언제나 설득력을 지닌다. 



















라디오 PD 정혜윤 작가의 글에는 실재가 있다. 언제나 산 체험이 있고 절실한 경청이 있다. 물론 그 글이 언제나 전부 다 내 의견과 같다거나 전적으로 긍정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 다른 생각도 있었고 의문을 가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글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을 수 있었던 건 함부로 쉽게 무언가를 재단하고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혜윤 작가의 글에서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는 이 세상의 연약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다. 그 애정은 잊고 살았던 것들을 환기시킨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 유족들과 지하철 노조 덕택에 불연재로 된 지하철 좌석에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것. 그 이전에는 지하철 내부에서 화재가 생기면 쉽게 옮겨 붙는 가연재 재질의 지하철 좌석에서 위태롭게 졸고 있었다는 것. 아직도 그날 그 불붙은 지하철 안에서 "미안하지만 돈까스는 못해줄 것 같아." 라고 마지막 메시지를 자녀에게 보냈던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한 사연으로 울컥한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이 되어 사형당해야 했던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의 잊혀진 사연도 이야기한다. 일본 식민지 시절, 다만 배를 안 곯기 위해 지원했던 연합군 포로 감시원직은 청년들을 졸지에 BC급 전범으로 만들어 버렸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대단한 명분도 악의도 없이 일본이 위에서 시킨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그들은 종전 직후 갑자기 천하의 몹쓸 죄인이 되어 사형당하거나 설사 석방되었다 해도 정신, 육체의 피폐함으로 평생 고통받으며 살아나간다. 자녀에게 때로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당시 함께 일하다 죽은 동지들의 이름과 고향 주소를 적은 종이를 "우와기"에 넣고 다니며 세상에 드러내어 놓고 한탄할 수 없는 고통을 사는 그들의 증언은 뼈아프다. 왜 하필 그런 일을 했냐? 거부할 수는 없었냐? 고 묻는 일은 가볍고 그런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과 이후의 그들의 비극적 삶은 한없이 무겁다. 자신의 무지를 죄악이라 여기며 죽어갔던 이십대 젊은이의 유서.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서 개인의 개별적, 구체적 삶은 통째로 무시되고 폄하됐던 그들의 삶과 죽음 앞에서 숙연해진다. 


죽은 아기 돌고래 주위에서 먹이도 먹지 않은 채 계속 그 돌고래를 수면 위로 펌핑하듯 띄워 올리는 엄마 돌고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해경이 그 아기 돌고래를 보트에 묶어 운반하자 엄마 고래 '시월이'는 휘슬 소리를 내며 계속 따라온다. 아기의 죽음을 알고 그 슬픔을 표현할 길 없었던 돌고래의 마음이 전해져 와 눈물이 났다. 세월호, 이태원, 그밖에 많은 사건, 사고들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차마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약하고 덧없는 생명들에게 연민과 사랑을 전하는 작가의 마음은 결국 우리가 그러한 이야기들을 경청함으로써 좋은 삶을 발명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확장된다. 모르니까 그러는 것일 뿐, 우리는 이야기를 듣고 앎으로써 결국 공감과 사랑으로 만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소중하다. 오늘 하루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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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31 09: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특별한 서사가 등장하는 게 아니고 요란하지도 않은데요, 저는 <윤희에게> 를 보면서 울어버렸습니다. 하아-

blanca 2023-10-31 12:00   좋아요 3 | URL
저 ˝나도 네 꿈을 꿔.˝라는 김희애 마지막 대사에 울었어요. 완전 울컥하는데...이제는 연락이 끊긴 고등 때 단짝 친구가 떠오르더라고요. 감독이 각본까지 다 썼다는 얘기에 놀랐고요. 이미 김희애 여배우를 떠올리며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