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서른다섯이 채 안된 아는 동생이 아직 다섯 살이 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들었다. 익숙한 어려움, 낯익은 환희들, 피곤함 등이 떠올랐다. 대체 서른다섯이 되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봄" 에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 같지도 않다. 스무 살의 봄은 생생한데 그 반환점의 기억이 흐릿하다니...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수명이 일흔여덟에서 여든이 되고, 여든에서 여든둘이 되고, 여든둘에서 여든넷이 된다. 그런 식으로 인생은 조금씩 길어지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람들은 자신이 벌써 쉰이 되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쉰이라는 나이는 반환점으로는 너무 늦다. 백 살까지 사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된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저도 모르는 사이 인생의 반환점을 잃어가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풀사이드> 중




여덟 편의 단편에는 하루키의 실명이 등장한다. 소설가가 청자로서 기능하고 우연히 마주친 화자들은 대부분 그 인생의 반환점에 다다랐거나, 혹은 그 이전 정도의 나이로 저마다 겪은 인생의 이야기를 하루키에게 털어놓는 방식의 이야기들이다.  하루키가 가장 자신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실린 <레더호젠>이다. 이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화자 역시 다른 이야기 속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젊지만 그녀가 이야기하는 오십 대의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당시 하루키의 나이를 생각할 때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다는 것이다. 은퇴를 앞둔 남편를 두고 독일에 홀로 여행을 떠난 중년 여성이 남편의 반바지를 구입하며 문든 남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직시하게 되며 스스로의 반환점을 뒤늦게 만드는 이야기다. 그건 해피엔딩이었을까? 하루키도 그 이야기를 해줬던 아내의 친구도 섣불리 단정짓지는 않는다.  어떤 변화는 급진적으로 전개되지만 이미 그것은 그 사람속에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유일하게 인생의 턴지점인 반환점을 삼십대 중반에서 오십대로 나름의 기준으로는 너그럽게 양보한 이야기다. 

















줌파 라히리는 이제 영어로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탈리아에 이주해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고 꾸준히 번역 작업도 하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예민하고 섬세한 촉수로 이방인의 정서를 어루만진 글을 좋아하지만, 외국어로 이중의 이방자 의식을 조탁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이제 점차 오십대 중반에 아이들을 독립해 보낸 중년의 쓸쓸함으로 가닿은 변화가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반환점을 맞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특유의 버석거림이 로마라는 이국적 도시의 정경과 맞물려 그녀 특유의 서정적 정조 아래 투명하게 드러난다. 문득문득 작가 자신의 고백이 아닐까, 하는 심증이 들었지만 그것조차 독자의 자의적 해석의 영역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이라는 틀을 자의적으로 부여했지만 그 생물학적 맞물림은 거기에서 우리를 쉽사리 해방시키지 못한다. 내가 이 정도 나이이니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느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가 그러하다. 실제 육체적 노화도 큰 준거점이 된다. 에너지는 떨어지고 그건 분명 삶의 반경을 제약한다. 잃어가고 타협하고 이해하게 된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무도 섣불리 단정짓지 못한다. 반환점을 인식하지 못했으니 나의 반환점은 아직 오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 반환점이 오면 다시 턴하고 나에게 남은 시간들을 제대로 세게 될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10-19 1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나 너무나 좋은 블랑카 님의 글입니다.
저도 줌파 라히리의 신간 주문해 받았어요. 곧 읽을 생각에 설렙니다.

blanca 2023-10-19 16:32   좋아요 0 | URL
애정하는 작가가 있다는 건 또 그 작가가 신간을 낼 수 있다는 건 참 일상의 큰 기쁨인 것 같아요. 작가들의 부고가 뜰 때마다 참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스파피필름 2023-10-19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 이 글 참 좋게 읽었습니다^^ 저도 주문했습니다.

blanca 2023-10-19 16:32   좋아요 1 | URL
스파피필름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