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류진의 <연수>를 읽으며 기시감이 들었다. 나에게 도로 연수를 해줬던 오십대 여자 강사와 너무나 닮은 인물의 모습에. 벌써 면허를 땄지만 겁보라 혼자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나에게 맘 카페에서 소개 받은 노련한 그녀는 열 시간의 연수를 마친 후 바로 나를 매정하게 독립시켰다. 


"아, 조금만 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혼자 아직은 무서운데."

"됐어. 이제 혼자 할 수 있다니까. 혼자 해요. 할 수 있다니까 그러네."

그녀가 둥지 위에서 새끼 새를 날리듯 나를 떨어뜨리고 난 후 며칠 뒤 다리를 덜덜 떨며 나는 난생 처음 혼자 운전을 하게 되고 바로 그날 사고를 내는 기염을 토하고 만다. 이 사고 이야기는 또 너무 길어져서 생략하기로 하고. 여하튼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운전대를 잡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주연이 마침내 그 연수 강사에게서 독립해서 홀로 운전대를 잡고 나가는 장면은 다시 읽어도 여전히 울컥했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사회적 성공을 거둔 주연은 어머니에게서 또 적절한 연령에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서 심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 연수를 통해 마침내 홀로 도로에 나서게 된다. 뒤에서는 주연을 든든히 지켜주는 강사가 따른다. 사실 운전 연수가 아니라면 연령대도 종사하는 분야도 전혀 다른 두 여성이 만나 이렇게 교감을 나눌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주연이 비로소 자신을 옭아매던 그 모든 속박과 사회적 통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지점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모처럼 통쾌했다. 장류진 작가는 우리가 그냥 꼭꼭 묻어두고 사는 답답한 지점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이야기로 해소하는 장점이 있는 작가다. 더운 여름 그녀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땀이 식는다. 







언제까지 청춘일 것처럼 보였던 작가 김연수는 이제 오십대가 됐다. 그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에 길어 올린 어떤 깨달음들은 나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준다. 그가 예고했던 사십대의 그 계곡 같은 고통의 지점도 그러했고 이제는 반추의 양이 더 많아진 오십대의 삶의 긍정에 대한 전환도 그러할 것 같다. 마지막에 실린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은 그가 겪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죽음과 작별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다. 뉴욕제과의 막내 아들이었던 그가 복기하는 어머니와의 아련한 추억들과 코로나 시국에 겪은 어머니와의 작별까지 따라 읽다 보면 자꾸 책장을 덮고 한숨을 쉬게 한다. 그건 복습과도 같고 예습과도 같아서. 그가 이야기하는 생의 정경들이 얼마나 핍진한지 나는 그것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 속으로 툭툭 떨어진다. 이 짦은 이야기들을 어느 서점에서 독자들에게 낭독해 들려줬었다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고독을 주제로 스물두 명의 작가가 쓴 에세이집이다. 사실 어떤 것을 테마로 여러 작가가 글을 써서 책을 만드는 것에 개인적으로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초등학교 시간 과제로 했던 특정 단어를 넣어 만들어야 했던 짧은 글 짓기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어서 였다. 그러나 이 책은 달랐다. 미리 다 숙고했던 것처럼 단 한 편의 글도 가볍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삶의 한 대목에서 가장 고독했던 그 지점을 신중하게 길어올린다. 아, 이래서 작가구나, 싶을 정도로 마치 잘 정제된 단편처럼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외로웠던, 고독했던 그 정경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제프리 레너드 앨런의 <어머니의 지혜>가 감동적이었다. 싱글맘의 노동과 사랑에 기대어 컸던 어린 시절과 이제는 노쇠해져버린 어머니와의 관계의 역전에 대한 묘사가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그들을 고통에서 구해낼 도리가 없는 바로 그 가장 고독한 지점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상기가 마음을 울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가장 고독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인생의 가장 황폐하고 잔인한 대목이다.




뜨거운데 춥다. 그런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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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3 1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라디오에서 <연수> 소개를
해주더라구요.

마침 도서관에 가는 길이라 빌리
려고 했는데, 신간이라 이미 대출
중이더라구요. 아마 읽어 보려면
시간이 마이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

좋은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만나
면 좋겠으련만.

blanca 2023-07-04 07:49   좋아요 1 | URL
아, 라디오에 소개됐군요. 저는 <연수>만 따로 문예지 발표되었을 때 읽어서 사실 이 단편은 두 번 읽게 된 거였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마지막 대목은 뭉클하더라고요.

2023-07-04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4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